
먹이
보르도
*트리거 워닝 주의
최산과 박성화의 관계는 조금 어려운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최산은 17살이라는 나이에 남해를 벗어나 서울로 올라왔다. 힘들게 들어간 소속사에서는 데뷔조에 곧장 최산을 끼워 넣었는데, 거기서 박성화를 처음 만났다. 처음 들어올 때는 배우가 목표였다던 성화는 대충 모인 데뷔조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우선은 아이돌로 데뷔를 해야 배우의 길이 열린다는 말을 믿고 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아무리 배우가 목표였어도 성화가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산도 곧잘 따랐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한 게, 24시간 중 반을 넘게 얼굴을 보고 몸을 부딪히다보면 예상치 못하게 그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일이 생긴다. 성화와 산도 그런 경우였다. 연습생 때까지만 해도 같은 방을 썼던 둘이라서 거의 자는 시간 빼고 얼굴을 보고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동경이라 생각한 작은 두근거림이었다. 집에서 나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지내며 불면증이 생긴 산은 매번 해가 지고 밤이 늦어도 뒤척이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캐모마일차를 가져다주는 성화에게 처음으로 두근거림을 느꼈다. 다정한 사람이라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생에게 이렇게까지 다정하게 구는 사람은 팀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은 동경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는 산에게 차를 내어주고 아침이면 5분이라도 더 자게 배려해주는 행동이 설렜다. 늦게 끝난 연습에 지쳐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척이는 산을 부축하는 것도, 평가를 잘못 받아 엉엉 우는 산을 밤이 새가며 달래주는 것도 전부. 산은 본인도 모르게 성화를 마음에 담고 있음을 인정했다. 모든 게 완벽한 성화가 좋았다. 최산이 17살, 박성화가 19살. 겨우 두 살 차이였지만 어른스럽고 동생들을 잘 챙기는 성화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느새 마음에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한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키워가던 감정이 아니었다. 남들이 보면 단순히 산이 성화를 잘 따른다고 생각할 관계였지만 둘은 그 ‘친한 형과 동생’, ‘같은 그룹이 될 멤버’ 따위의 선이 모호했다. 산은 잠이 안 온다는 이유로 본인의 침대를 두고 ‘친한 형’ 침대로 가서 같이 자지 않는다. 그리고 그 행동을 받아주는 성화도 단순히 본인을 ‘동생’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새벽까지 이어진 월말평가 준비로 힘이 빠진 둘이 비틀거리며 숙소로 가던 길, 몰래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고 일부러 뒷골목으로 돌아서 갔을 때 분위기에 홀린 듯 입을 맞추었던 그 시점부터 둘은 사귀자는 말만 없지 연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배우 박성화 씨는 이번 작품에 굉장한 애착을 가지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TV 화면 속에서 웃고 있는 성화를 응시하다 전원을 꺼버렸다. 연습생 생활이 2년이 넘어간 시점에서, 성화는 그룹 데뷔조를 빠지고 배우로 데뷔했다. 대형 소속사가 아니었던 둘의 소속사에서 갑자기 배우들을 영입하기 시작한 후로 벌어진 일이었다. 무려 2년이나 아이돌 준비를 하던 성화가 갑자기 웹드라마에 출연하게 되고, 그 반응이 좋아서 데뷔조에서 아예 빠져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팀의 리더 직책을 담당하고 있던 성화가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올랐지만, 산은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데뷔조에 빠진 것도 모자라 숙소까지 나가버린 성화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었나. 산은 성화의 짐이 전부 빠지고 허전해진 방에서 몇 시간이고 울었다. 그 후로 친구인 윤호가 방에 들어왔으나 산은 더욱 심해진 불면증을 이기지 못하고 반은 죽은 듯이 지내야만 했다. 데뷔도 간신히 했다. 초심을 잃은 것 같다며 하루에 몇 번이고 혼이 났고 종이뭉치로 머리를 맞았다. 차라리 이제 관계를 정리하자는 말이나 들었으면 미련이라도 안 생기지. 산은 데뷔 날짜가 잡히자마자 혀를 씹고 손가락을 깨물며 버텼다.
20살에 데뷔해 어느덧 아이돌로 24살이 되었다. 성화는 배우라는 직업에서 점차 성장해가며 주연까지 맡을 정도였고, 산의 그룹은 대박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그래도 적자 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국내에서 얘기하면 다들 어느 정도는 안다며 얘기하는 수준. 당장 아이돌이 쏟아지는 시대에서 이 정도만 해도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었다. 우습게도 같은 소속사였지만 그 후로 성화와 마주한 적은 없다.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한 번은 마주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우습게도 회사 건물에서조차 마주친 적이 없었다. 심지어 회사 관계자분의 결혼식 때는 보지 않을까 싶어 바쁜 스케줄 중에서도 참석했더니 성화는 중국 팬미팅으로 한국에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사귀자는 말도 없이 연인이 되었던 것처럼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남이 되었다.
“성화 형 결혼한대.”
산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결혼? 그 형 이제 26살이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윤호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연예계가 다 그렇듯,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이상 이렇게 일찍 결혼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근데 심지어 그 사람이 요새 한참 주가 오르는 박성화고, 결혼하는 상대가 2년 전에 찍은 드라마 상대역이고. 산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연애할 생각이 없긴 했으나 최산은 아직도 고등학생 때의 과거에 머무르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는데, 이별의 말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바람에 미련조차 지울 수 없어 지금도 문득 눈물이 나는데.
당연한 거겠지만 청첩장은 오지 않았다. 같은 팀인 홍중이나 윤호, 심지어 별로 안 친했던 여상이나 종호까지 전부 받았는데 최산만 못 받았다. 성화가 숙소를 나가고 한동안 산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홍중은 부러 산을 위로하며 무언가 실수가 있었을 거라 했지만 최산은 알고 있었다. 남들 모두 받았던 그 청첩장이 자신에게만 오지 않는 이유는 최산이 박성화를 사랑했고, 박성화가 최산을 사랑해서였다. 힘든 연습을 끝마치고 작은 일탈과 함께 입을 맞추었던 그 날과 몇 번이고 산을 재우기 위해 타주었던 캐모마일까지 전부 지워버리려는 거라고.
분한가? 이 감정을 단순히 분하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는 건가? 산은 괜찮다며 같이 가자는 홍중과 멤버들을 뿌리치고 혼자 숙소에 남았다. 단순히 초대 받지 못한 곳에 간다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없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신부와 그 옆에서 사랑을 속삭일 턱시도 차림의 박성화를 볼 자신이 없어서 그냥 비참하더라도 숙소에 남기를 선택했다.
“내가 형을 어떻게 해야 돼?”
최산은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힌 캐모마일 티백에서 박성화를 읽었다.
사랑에 모든 걸 내던진 사람처럼 굴었던 박성화의 차기작은 느와르 영화였다. 사랑 얘기라고는 한 장면도 없는 모래사장 같은 남탕 영화, 심지어 주연.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로맨스물만 찍어온 주제에 이제야 사랑꾼 노릇 좀 하겠다는 그 심보가 우습다. 다만 박성화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 느와르 영화에 최산이 출연한다는 것이었다. 흔히들 얘기하는 아이돌 끼워 넣기였다. 소속사에서 대고 있는 투자금이 있으니 아이돌 한 명 조연으로 출연하는 건 이 바닥에서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산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작품이 아니면 성화를 볼 날이 더욱 없어질 거라 생각했고, 어차피 자신을 피하겠지만 대화라도 몇 마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산은 뭐가 됐든 본인의 커리어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작품 준비를 했다. 살을 급하게 빼야 된다고 해서 촬영 날짜에 맞춰 살을 뺐다. 남들이 닭가슴살 먹으며 빼라고 할 때 부러 굶었다.
“형.”
“…….”
“결혼 축하해.”
산은 코코아를 쥔 채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얼굴 곳곳에 상처 분장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산과는 달리 스크래치 하나 없는 성화는 산의 얼굴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렇게 사소한 거 하나에도 최산은 상처를 받는다. 영화의 주연과 조연, 멀끔한 정장 차림의 박성화와 도망자 역할을 하느라 가벼운 티와 바지가 전부인 최산, 그런 모든 사소한 것들이 다 둘 사이에 벽을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진짜 맞은 것도 아닌데 얼굴에 생긴 상처 분장들이 아파오는 것만 같다. 속이 곪아가고 있었지만 코코아 한 모금을 마시는 걸로 대신했다. 매니저가 산을 찾아서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성화는 산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아저씨….”
“이제 더 갈 곳도 없어.”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한 번만 눈감아주시면 안 돼요?”
“너희 아빠가 돈 받고 판 건데 살려주고 말고가 어디 있어. 나는 너 데리고 가면 되는 거고, 그 후에 그 조선족 새끼들한테서 벗어나는 건 네 몫이지.”
싸늘한 시선이 최산에게 꽂힌다. 연기로 주고받는 말들과 시선이었지만 최산은 그 눈빛 속에서 박성화의 본심을 읽었다. 단순히 어린 날의 방황 정도로 생각한 과거가 산의 입 밖으로 나올까 두려워하는 그 눈빛이 오히려 까만 뱀이 되어 최산을 조여온다. 대본에는 없었지만 최산은 마른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12월 초,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그 다음 대사를 기계처럼 읊었다.
“저 아직 17살이에요, 아저씨.”
산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어린 날들을 떠올렸다. 남해에서 올라와 아무것도 모르고 향수병에 빠져 눈물로 지새던 그 날들이, 캐모마일이, 박성화가. 추위에 빨갛게 얼어붙은 손이 중심을 잃고 세차게 흔들렸다. 젓가락 하나 제대로 들 수 없을 것만 같은 마른 손가락은 이내 자신의 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고,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감정을 내보인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오케이를 외치는 감독님의 목소리와 함께 감았던 눈을 뜬 산은 어느새 곧장 몸을 돌려 촬영장을 빠져나가는 성화의 뒷모습을 한 번 보고는 볼 위로 차게 얼어붙은 눈물을 닦아냈다.
영화 속 산이 맡은 역할은 돈에 눈이 먼 아버지 때문에 사채업자들에게 장기를 뺏기게 생긴 17살 고등학생이었다. 어릴 적부터 부모의 사랑은 받아본 적도 없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 하나로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받는 그런 아이. 하루하루를 억지로 버텨 살아가는 와중에 우연히 만난 옆집 아저씨의 멀끔한 정장 차림을 동경해 말을 걸며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하지만 그마저도 중간 브로커 역할인 그 아저씨한테 붙잡혀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게 생긴 기구한 삶이었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한 역할은 누구보다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촬영장은 싸늘하기만 했다. 산과의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심기가 안 좋은 티를 내며 입을 다물고만 있는 성화 때문이었다. 둘이 같이 아이돌 그룹을 준비했음을 아는 이들은 저마다 왜 둘의 사이가 나쁜가에 대해 소곤거렸다. 입에서 입으로 옮겨가는 얘기에 점점 뼈가 생기고 살이 붙었지만 산은 구태여 신경 쓰지 않았다. 배우의 삶은 모르겠으나 최산은 아이돌이었기에 남들 앞에서 생글생글 예쁘게 웃는 법을 알았다. 그 싸늘한 촬영장 속에서 분위기를 풀고 애교를 떠는 건 아이돌 최산의 몫이었고, 멤버들과 팬들이 보내는 밥차나 커피차 등이 도왔다.
“산 씨, 그 찌라시 봤어요?”
“찌라시요?”
“네, 산 씨랑 성화 씨 얘기 같아서요.”
평소 산에게 제법 친절하게 굴었던 스태프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애초에 찌라시 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던 산은 스태프가 건네는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그 속에 적힌 말을 훑었다.
현재 같은 영화에 출연하게 된 P씨와 C씨는 연습생 시절 같은 그룹으로 데뷔하기 위해 동고동락하며 같이 지냈다고 하는데요. 원래부터 배우가 꿈이었던 P씨가 C씨와 다른 멤버들을 배신하고 그룹을 나온 후부터는 눈도 안 마주치는 사이가 됐다고 합니다. 한순간에 버림을 받은 C씨와 멤버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P씨는 C씨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과는 연락을 하고 지냈는데, 그 증거로 저번 P씨의 결혼식에는 C씨의 모습만 볼 수 없었다고….
덤덤한 표정으로 찌라시를 읽어내리던 산은 쥐고 있던 핸드폰을 돌려주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쩜 이렇게 맞는 말들만 적었는지 모르겠네, 라는 뜻을 담은 웃음이었지만 스태프는 산이 그 찌라시를 비웃는 것이라 생각한 듯 따라 웃었다. 말도 안 되죠? 하지만 이 상황에서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는 없으니 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곤란하다는 듯 뒷목을 주물렀다. 형이 배우로 데뷔하고서 어색해진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남처럼 굴고 그런 건 아닌데…, 형 결혼식 때는 제가 스케줄이 안 맞아서 저만 못 갔거든요.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는데, 소문은 무서운 것 같아요. 최산은 사람을 굴리는 법을 안다.
*
항상 무언가를 서두르다보면 꼭 사고가 일어났고, 최산은 서두르지 않았다. 현재 그룹도 휴식기에 들어서면서 다른 스케줄을 잡지 않은 산은 촬영에 있어 느긋한 마음이었지만 성화는 아니었다. 대본에 수정이 들어가면서 산과의 촬영 기간이 길어지자 성화는 내심 초조한 티를 냈다. 촬영장에만 오면 예민한 티를 냈고, 항상 모든 것을 서두르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신혼이라 그런 거라며 다들 성화를 이해하는 듯 굴었지만 사실은 최산을 피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라는 건 산 혼자만 알았다.
서두르던 박성화로 인해 사고가 났다. 감독의 신호를 무시하고 차를 몰았다가 조명에 부딪혔고, 몇 백이 넘는 조명이 우르르 무너지면서 모든 게 멈췄다. 차 안에 타고 있던 산은 조명과 부딪히고 보닛 위로 깨진 유리들이 나뒹구는 것을 보면서 기회를 잡았다.
원래 오늘이 강원도에서 보내는 촬영의 마지막 날이었다. 영화 속 산이 성화를 피해 도망가다 죽음을 선택하고, 그 장면을 끝으로 다들 서울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조명은 이틀 후에 도착하지만 당장 하루라는 시간이 비었고, 그렇다고 해서 서울로 올라가기에는 시간적으로 불필요한 행동이었기에 급하게 숙소를 잡았다. 물론 조명을 깨트린 박성화가 숙소를 잡고 식비를 댔으며 조명까지 물어주었기에 다들 별 말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나마 제일 가까운 호텔에 머무르기로 했다. 룸서비스까지 부담하겠다는 성화에 스태프들 전부 각자 방마다 모여 때 아닌 회식을 했고, 본인의 방에서 혼자 대본을 읽던 산은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스태프들이 전부 술에 취해 잠에 빠진 시간, 호텔 내부에 외부인들도 몇 없는 새벽 세 시. 산은 익숙하게 방을 빠져나와 언뜻 주워들었던 성화의 방 호실을 떠올렸다. 산은 망설임 없이 성화의 방으로 찾아갔다. 호텔 로고가 새겨진 배스로브 하나만 걸친 채로 문을 두드리는 모습은 찌라시로 돌기 딱 좋은 모양새였지만 산은 개의치 않고 똑똑, 몇 번이고 노크를 한 후에야 열린 문 사이로 성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잠깐 얘기만 해.”
“…….”
“할 말 있어서 그래.”
대답 하나 없이 가만히 산을 바라보던 성화가 그제야 몸을 옆으로 틀었고, 산은 그 틈을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함정이라도 깔아놓은 듯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은 산이 성화를 응시했고,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살살 어루만지는 성화는 그런 산과 눈을 마주칠 생각이 없는 듯 부러 다른 곳을 응시한다.
“왜 그랬어?”
“그 얘기는 별로 안 하고 싶다.”
“형.”
“…….”
“사랑이었지?”
주변의 잡음이 둘의 사이에 끼어든다. 이제 겨우 대화 한 번 이어가나 싶었더니 피하려는 주제를 꺼내자마자 입을 다무는 성화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배스로브의 끝을 잡고 살살 굴리던 산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 때, 몰래 편의점에서 간식 사고 숙소 들어가던 길에 했던 키스는 뭐였어? 매일 밤에 불면증 때문에 뒤척이던 나 끌어안고 달래주던 건? 그건 사랑해서 그런 거잖아. 정작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산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보이는 성화와 지금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지분거리는 성화는 너무 달랐다. 산은…, 성화에게 그 때의 얘기를 듣고 이제라도 늦은 이별을 듣고 싶었다. 당시의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그 후에 모든 걸 정리해 주었으면 했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우습게도 박성화는 이 주제를 완전히 피해버린다. 모르는 척 일방적으로 지워버린 과거들은 온전히 산에게 떠밀렸고, 산은 외면당한 과거의 최산까지 끌어안았다. 지금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허무하긴 했다. 언젠가 먼 미래에 성화와 과거를 얘기할 수 있는 때가 되면 꼭 물어보고 싶었고, 끝을 듣고 싶었다. 우습게도 몇 년이고 그 기억에 얽매여 과거의 박성화에 의존하며 살아오는 최산에게 자유가 필요했으니까. 당시에는 사랑이 맞았으나 이제는 아니라고, 그 단순한 말이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불안감 때문인지 아까부터 자꾸만 만지작거리던 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아내의 손가락에도 똑같이 있을 그 은색의 반지가 유난히 반짝거리는 것만 같아서, 산은 한참이고 그 반지를 들여다보다 손을 등 뒤로 숨기는 성화의 행동에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차라리 과거를 지워버릴 거면 완벽하게 지워서 이렇게 어색하게 굴지나 말던가. 산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형 결혼하고 행복한 것 같아서 부럽네.”
산은 아직까지도 눈을 마주치려고 들지 않는 성화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된 대화 하나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억지로 자리를 잡고 버틴다고 해서 나아질 건 없었기에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나무의 끝에 애매하게 걸쳐진 달이 꼭 박성화 같다. 자꾸만 숨으려는 그 모양새가 아주 똑같아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산은 그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침대를 짚고 일어났다.
잘 자, 숙소 잘 쓸게. 산은 배웅조차 없는 이를 두고 방을 빠져나왔다. 성화는 산이 침대를 벗어나 큰 방을 지나 문을 열 때까지도 시선 하나 던져주지 않았고, 산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 닫을 때가 되어서야 인기척을 냈다. 등 뒤로 철컥,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죽이겠다며 칼을 들고 쫓아간 것도 아닌데 덜컥 겁을 먹은 모습이 우스웠지만 산은 구태여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점점 땅을 파고 깊어지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려 엄지로 관자놀이 언저리를 꾹꾹 눌러 진정 시킨다. 어차피 예상한 결말 중 하나였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아라.”
최산은 그 날, 꿈에서 모든 것들을 보았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숨기고 달마저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산은 갑자기 자신의 앞에 튀어나온 검은 고양이 한 마리에 걸음이 막혔다. 그 고양이는 산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따라오라는 듯 굴었는데, 산은 뭐에 홀린 듯 고양이의 뒤를 따라 두터운 얼음판 위로 발을 올렸다. 분명 흙 위에서 신고 있던 신발은 얼음판에 발을 디디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맨발이 되었다. 발바닥이 시리진 않았다. 산은 그저 긴 꼬리를 살랑이며 얼른 따라오라 재촉하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뿐이었다.
분명 두터웠던 얼음판이 점점 얇아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제법 걸음을 서둘러도 괜찮던 얼음이 지금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 쩌적 갈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아슬아슬함에도 멈추지 않던 산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커다란 흰색 개가 검은 고양이의 목을 물어뜯고서야 화들짝 놀라며 멈추었다. 희고 불투명한 얼음 위로 고양이의 피가 새어나와 물들였는데, 금방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금이 간 얼음판 틈새로 검붉은 피가 색을 입히고 있었다. 고양이의 목을 문 채로 낮게 으르렁 거리던 개의 눈이 매섭다. 산은 다음 목표가 자신이 될까봐 주춤했고, 그 잠깐 사이에 개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온통 주변을 둘러봐도 얼음판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그 개가 뛰어든 곳에는 숲이 있다. 산은 당장 앞으로 몇 걸음만 나가면 깨질 살얼음판 위였지만 그 개를 따라가기에 겁이 나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부러진 목을 물고 있는 개의 눈빛이 최산을 살얼음판 위로 떠민다. 개를 따라가지도, 당장 저 살얼음판 위를 걷지 않아도 되지만 최산은 뭐에 홀린 듯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동시에 잔뜩 금이 갔던 살얼음판이 와르르 무너지며 그 속으로 떨어진다.
“너는 레비아탄의 먹이가 되리라.”
정작 물 한 방울 없는 얼음판 밑으로 점차 끌려가던 최산은 지직거리는 노이즈 속 말을 들었다. 레비아탄? 알 수 없는 말들에 우선 이 담청색 공간을 나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뒤늦게 손을 뻗어 부서진 얼음을 쥐려고 하자 그 위에서 바다뱀 한 마리가 천천히 내려와 산의 팔뚝을 감쌌다. 마치 먹물이 선을 긋는 것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할 새도 없이, 산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차가운 손에 소름이 돋아왔다.
눈을 감고 있으나 산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속눈썹 하나하나 신이 직접 만든 것 같이 아름답다. 차분히 감긴 눈꺼풀이었으나 산은 어쩐지 그 눈꺼풀 밖으로 자신의 모습이 들킨 것 같아 고개를 피할 수 없었다. 얼음판처럼 하얀 상체와 달리 하체는 푸른빛이 돌았는데, 산은 그제야 머릿속으로 인어라는 말이 떠올랐다. 수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곳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는 인어, 산은 이질감을 느꼈다.
“이게 너의 미래가 될 것이니.”
산은 문득 자연스럽게 깍지를 껴오는 차가운 인어의 손이 느껴졌고, 이내 점점 밑으로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너는 얼음물 속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라.”
내내 어딘가 붕 뜬 사람처럼 굴었다. 서울에서 급히 내려온 조명들에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대본을 확인했고, 혹시 대사를 잊었을까봐 몇 번이고 매니저를 붙잡고 연습을 했다. 분명히 내뱉는 말과 목소리, 표정 같은 것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매니저도 이대로만 하면 감독님이 좋아할 거라며 엄지까지 치켜들었는데…, 이상하게 최산 혼자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굴었다. 무언가를 하려다가도 기억이 나지 않아 멈칫하는 일이 있는가하면 자꾸만 넋 나간 사람처럼 허공만 바라보다 지나가던 이가 붙잡고 괜찮냐 물어볼 정도였다.
괜찮은가? 잘 모르겠으나 일단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사 빠진 사람처럼 굴어도 연기는 제대로 했으니 루즈해진 촬영장을 질질 끌고 싶지 않았기에 일부러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성화에게서 도망치는 장면에서 숲 속을 뛰다가 크게 넘어졌지만 컷 소리가 나오기 전에 벌떡 일어나 다시 뛰었다. 다들 당황해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도 카메라는 최산을 찍고 있을 테니까, 그 부분 하나만 생각하고 까진 손이고 얼얼한 무릎이고 전부 무시하고 뛰었다.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고 썩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크게 한 번 휘청거렸더니 발목이 시큰거렸다. 다들 이래도 되나 싶은 불안한 눈길로 저마다 눈치를 볼 때쯤, 숲을 빠져나와 커다란 저수지 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멈추었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끝이 언 저수지가 산의 눈에 담겨 고요한 파도를 일었고, 동시에 감독님이 오케이를 외쳤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았다. 주연 소속사의 아이돌 끼워 넣기, 노래와 춤만 해온 아이돌의 데뷔작이라는 부정적인 소문들이 가득했던 상황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내달린 최산에 저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작 담요를 들고 뛰어온 매니저는 산의 몸 곳곳에 남은 상처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화를 냈지만 산은 개의치 않고 저수지를 눈에 담았다. 추운 겨울의 흰색을 담은 저수지가 자꾸만 최산의 가슴 한 켠을 간지럽힌다.
“산 씨, 깊이 확인은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서 들어가요. 허리 반쯤만 들어가고 오케이 소리 나오면 바로 나오시고요. 얼음물이라서 저체온증 조심해야 돼요.”
네, 괜찮을 거예요. 산은 덮고 있던 담요를 벗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에게 건네고는 추위에 빨갛게 언 손을 꽉 쥐었다. 영화 초반에나 나올, 산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저수지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죽음을 선택하는 17세 고등학생, 이만큼 비참하게 끝나는 인생이 있을까. 산은 저수지 한참 뒤로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는 스태프들과 카메라들, 촬영용 커다란 마이크와 감독님 옆에서 담요를 덮고 대기하고 있는 성화를 순서대로 눈에 담았다.
남의 것을 탓하지 말아라.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되면서 산이 크게 숨을 들이쉬고 파르르 떨며 내뱉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 가득 들어차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뛴다. 산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그 카메라가 박성화라도 되는 것마냥 뚫어져라, 어차피 영화 속에서는 두 인물의 시선을 담은 것처럼 나올 테니 상관은 없었다. 너는 레비아탄의 먹이가 되리라. 산은 가볍게 떨어지는 걸음을 천천히 옮겨 얼음판 위로 내디뎠다. 꿈과는 달리 무게가 닿자마자 파사삭 부서지는 얼음이 곧장 산의 다리를 감싸왔다. 파르르 떨리는 손에 주먹을 꾹 쥔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바다가 아닌 저수지라 자꾸만 푹푹 빠지는 탓에 힘들었지만 산은 멈추지 않았다.
이게 너의 미래가 될 것이니. 산은 미리 사전에 정해두었던 허리에서 한 걸음 더 걸었다. 어느새 명치 언저리까지 차오른 물에 촬영장의 분위기가 애매하게 굳었음을 알아차린 산이 더는 들어가지 않고 멈춘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돌아보는 순간 차분히 내려앉은 굳은 표정의 최산을 바라보는 박성화, 어느새 카메라는 뒷전이었다. 몰입을 위해선지 모르겠으나 인상까지 쓴 채로 자신의 연기를 바라보는 박성화의 발 밑에서 뱀이 요동친다.
“차라리 제가 죽을게요.”
“…….”
“아저씨를 나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그냥…. 그냥 제가 죽을게요.”
이상하게 물이 차갑지 않다. 산은 얼음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지만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촬영으로 인해 반지를 뺀 박성화만을 눈에 담고 기억 속 대사를 읊으며 부러 감정을 흔들었다.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맺혔던 눈물은 추위에 얼기 전에 볼을 타고 흘렀고, 그 눈물은 곧 턱 끝에 매달려 간신히 버티다 수면 위로 톡 떨어졌다.
산은 묵직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옴을 느꼈다. 단순히 저수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쓰레기일 거라 생각했지만 순식간에 그 무언가가 산을 물 밑으로 이끌었다. 수면이 점점 차오르며 힘없는 몸뚱이를 삼킨다. 명치에서 가슴팍, 가슴팍에서 쇄골, 쇄골에서 목. 마지막으로 매니저와 스태프들이 놀라 뛰어오는 모습들이 보였다. 내내 모르는 척을 하고 관심 없는 척 굴던 박성화마저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 우스웠다.
마침내 수면 밑으로 머리까지 전부 삼켜졌을 때가 되어서야 산은 문득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인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몸에 푸른 꼬리를 가지고 있던 꿈 속의 그 인어, 눈을 감고도 최산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인어. 산은 레비아탄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어쩌면 이 인어의 이름이 레비아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더 깊이.
너는 얼음물 속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라.
최산은 편히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