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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 톡.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좁은 원룸 구석에서 울렸다. 정작 소리의 주인은 눈앞의 작은 화분을 노려보느라 사소한 소음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집요한 시선 끝에 닿은 투박한 디자인의 화분에는 짙푸른 이파리 사이로 붉은 꽃봉오리가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다. 차가워지는 공기에 무채색으로 변하는 창밖의 풍경과 대조적인 빛깔이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에서 생생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성화는 화분에서 잠시 시선을 거두고 지끈거리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두고 이런 소모적인 고민을 하는 건 평소의 본인답지 않았다. 거기다 잠시 잊고 있던, 제출기한이 코앞으로 다가온 과제들이 떠올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결국 결심한 듯 한쪽으로 치워둔 묵직한 책을 가까이 끌어왔다. 족히 천 페이지는 되어 보이는 책의 표지에는 ‘식물도감’이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박혀있었다. 일부러 도서관에서 제일 두꺼운 책으로 빌려온 보람이 있었는지 붉은색에 집중하며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곧 익숙한 꽃 사진을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시클라멘. 앵초과의 여러해살이풀. 대표적인 겨울 꽃으로 날이 선선해지는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화려한 꽃을 피운다…”

 

특별할 것 없는 정보들을 읽어 내려가던 성화의 목소리가 어느 지점에서 뚝 끊겼다. 잘못 봤을 리가 없는 짧은 단어 두 개를 한참은 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이어 나직하게 내뱉었다.

 

“…꽃말, 질투.”

 

덮어버린 책을 책상 끝까지 밀었다. 아까보다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게 느껴져 과제고 뭐고 오늘은 일찍 자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쓰고 양을 세어 봐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았다 하면 그 녀석이 제게 붉은 꽃 화분을 들이밀던 장면이 고장 난 TV처럼 반복 재생됐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게 다, 송민기 때문이다.

붉은 꽃의 꽃말은

dim

최근 민기는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뭐 하냐고 연락하질 않나, 점심때만 되면 같이 밥 먹자고 쫓아다니질 않나. 그 정도는 같은 과 선후배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한 학년에 백 명을 훌쩍 넘기는 경영학부에서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다. 선후배 간의 돈독한 정을 다지기보다는 막대한 공부량과 과제를 쳐내기에 바빠 혼자 다니는 쪽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물론 성화도 그중 한 명이었다.

 

결정적으로 민기와 성화는 절대 빈말로도 친하다고 할 수가 없는 관계였다. 군 휴학을 막 마치고 복학한 성화와 신입생인 민기. 둘의 접점이라곤 민기네 새터조 조장을 맡았던 홍중이 성화의 몇 안 되는 친한 동기라는 점뿐, 그 이상의 무엇도 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여기서 뭐하냐, 나.’

 

‘그’ 송민기가 지금 성화 바로 앞에서 전공 책에 빨려 들어갈 듯 고개를 처박고 졸고 있었다. 갑자기 같이 기말 공부하자고 도서관으로 불러내서 사람 당황시키더니. 세상모르게 잠에 빠진 모습에 어이가 확 달아났다. 깨울까, 잠시 고민하다 문득 이런 적도 처음이다 싶어 잠든 민기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딱히 엮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적어도 성화가 본 민기는 그랬다. 큰 키에 큰 목소리, 빈말로라도 순하다고 하기 힘든 인상, 무엇보다 채도 높은 새빨간 머리칼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외적인 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될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저런 류의 사람들은 자신과 잘 맞지 않았다. 복학 기념이라며 억지로 끌려간 개강총회에서 성화는 민기의 첫인상을 그렇게 멋대로 결론 내렸다.

 

정신없이 흘러가던 일상에 민기가 끼어들기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2학기 첫 재무관리 수업. 개강 후 첫 수업들이 으레 그렇듯 앞으로의 강의 계획 정도만 짧게 소개하고 마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특히 이 수업 교수는 출석이나 성적에 워낙 관대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평소 같았으면 학생들로 꽉 차있어야 할 강의실은 한눈에 보기에도 텅텅 비어 있었다.

 

“옆에 자리 있어요?”

 

수업 시작 5분 전, 무료하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성화는 머리 바로 위에서 쏟아지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자마자 자연스럽게 옆에 앉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누군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데만도 한참이었다.

 

자리도 많은데 왜 하필 여기에? 아니 애초에 1학년이면서 왜 2학년 수업을? 머릿속에 물음표가 수도 없이 떠다녔지만 때마침 들어온 교수님 덕분에 물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OT 내내 뻔뻔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던 녀석은 마치자마자 홍중이 형한테 얘기 많이 들었다는 둥, 전부터 친해지고 싶었다는 둥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더니 아득바득 성화의 연락처를 받아 갔고,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이번 학기 내내 재무관리 강의시간 성화의 옆자리는 민기 차지였다.

 

‘그래도 제일 이상한 건 그거지. 꽃.’

 

노을 진 햇빛을 받아 더 붉어진 민기의 머리칼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성화는 창가 앞 책상 위에서 아마 같은 노을에 물들었을 붉은 꽃을 떠올렸다. 결국 사흘 전 건네받은 그것의 이유를, 오늘도 묻지 못했다. 앞으로도 물어보지 못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놈의 꽃말은 좀 찝찝하긴 했지만.

 

갑자기 뒤척인 탓에 흐트러진 붉은 앞머리가 신경 쓰여 손을 뻗었다. 그저 이런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그래서 그런 거지 다른 의미는 전혀.

 

“예쁘다…”

 

무심코 뱉은 말에 본인이 더 놀라 불에라도 덴 듯 황급히 손을 뗐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려다본 손끝이 어쩐지 화끈거렸다. 따끈한 간지러움이 남은 손가락을 엄지로 몇 번 쓰다듬었다. 하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생경한 감각.

 

자신에게도 이상함이 옮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건 다, 송민기 때문이다.

 

 

*

 

 

“형, 진짜 죄송해요. 제가 대신 집 앞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괜찮은데.”

“저 때문에 괜히 이 시간까지 학교 남아계신 거잖아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뭔가 더 거절하기도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조금 후회했다. 나란히 서서 걷는 것도, 실없는 잡담을 하는 것도 처음이 아닌데 오늘따라 발걸음이 자꾸 꼬였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성화 형 자취방 동문 쪽이었어요? 상경대 건물이랑 완전 가깝네요. 전 서문 앞에 기숙사 사는데.”

 

아침에 늦잠 자면 죽어라 뛰어야 돼요, 하고 툴툴거리는 말에 적당히 맞장구쳐주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가깝다는 게 이렇게 다행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 일단 찬물로 세수부터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려는데 조심히 들어가란 상투적인 인사보다 묘하게 상기된 목소리가 더 빨랐다.

 

“맞다, 형 잘 있어요? 그… 꽃이요.”

"꽃? …아아, 그거. 잘 있지."

"정말요? 다행이다."

 

뭐가 그렇게 다행이길래.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눈앞의 함박웃음에 그냥 픽 하고, 저도 따라 웃고 말았다. 이내 연신 꾸벅이며 오늘 정말 죄송했다고, 이제 진짜 가보겠다는 말만 몇 번을 반복하던 녀석이 골목 너머로 사라진 후 집에 들어서자마자 창가부터 확인했다. 당연하다는 듯 자리하고 있는 붉은 꽃 화분. 잘 있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도 왠지 한 번은 보고 자야할 것 같았다.

 

어, 이거.

어제까지만 해도 봉오리였는데.

 

마지막까지 접혀있던 꽃 하나가 거짓말처럼 활짝 피어있었다. 알아차린 순간 아까부터 이어져오던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뚝 그쳤다. 대신 차가워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오버랩되는 꽃, 손, 붉은 머리칼, 함박웃음, 송민기.

 

망했다.

 

나 얘 좋아하네.

 

 

*

 

 

[죄송해요. 안될 것 같아요.]

 

한참만에 온 답장을 확인한 성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큰맘 먹고 연락해 본 거였는데. 명백한 거절이 서운했다. 혹시 자기가 뭐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닌지 아무리 되돌아봐도 짚이는 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던 연락이 기말고사를 기점으로 눈에 띄게 뜸해졌다. 하필이면 제 마음을 깨달은 시점과 맞물려 날이 갈수록 초조해져 갔다. 진짜 좋아하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얼굴 한 번 보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항상 먼저 연락하는 건 민기라는 불문율을 깨고 주말에 시간 있냐고 겨우겨우 보낸 문자에 돌아온 대답이 저거.

 

[그럼 언제 시간 되는데? 밥 한 번 먹자.]

 

자기가 생각해도 구질구질했다. 그래도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설마 방학 내내 하루도 시간이 안 날까. 안일한 생각을 하며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방이라도 좀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생각을 좀 비워보려고 시작했던 청소가 그렇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손이 습관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는 내내 머릿속은 며칠 전 동기 모임에서 들었던 말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별 무게감 없이 쏟아지는 대화 내용들 사이에서 마침 1학년 얘기가 나오자, 요즘 민기는 뭐 하냐고 자기 딴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박성화가 남 얘기 묻는 거 의외라는 반응이 터져 나오면서도 아는 대로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동기들이었다.

 

걔 요새 술 마시러 다니던데? 밤늦게 북문 쪽에서 봤다는 애들 되게 많아.

맞아 거기 다 술집이잖아. 나도 봤어.

나도 나도.

 

듣자마자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책상 위에 높게 쌓여 있던 전공 책을 치우자 가려져있던 시클라멘 화분이 드러났다. 겨우 며칠 신경 못 써줬다고, 축 늘어진 줄기며 색 빠진 꽃잎이 척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아 가슴이 철렁했다. 자괴감에 빠지려는 찰나,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

 

[죄송해요.]

 

최악. 갈수록 최악이다. 쌍방인 줄 알았는데 그냥 혼자 착각한 거였나? 서러움에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흐릿해지려는 시야에 시들한 꽃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대충 눈에 보이는 종이가방에다 화분을 집어넣었다. 아쉬운 사람이 움직여야 했다.

 

 

*

 

 

기숙사 앞은 한산했다. 그나마 저녁까진 조금씩 지나다니던 발걸음도 밤 12시를 기점으로 뚝 끊겼다. 서문 앞 기숙사면 여기 하나뿐이니까 잘못 찾아온 건 아닐 텐데. 진작 기숙사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딱 한 시간만 더 기다려보자.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꽁꽁 얼어붙은 손을 비비는데 멀찍이에서 물이 빠져 전보다 색이 옅어진, 익숙한 빨간 머리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부르려던 이름이 중간에 턱 걸려 나오지 못했다. 민기는 혼자가 아니었다. 척 보기에도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을 거의 껴안다시피 부축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였지. 누구였더라. 곧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에 흰 피부. 웬일로 괜찮은 애가 들어왔다며 1학기 초에 동기들이 잔뜩 들떠서 떠들어대던 게 생각났다. 앞뒤 사정 같은 건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었다.

 

"성화 형? 언제부터…"

 

기숙사 앞에 서 있는 저를 발견한 민기는 눈에 띄게 당황한 눈치였다. 깜짝 놀래키려던 게 목표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두 사람에게서 고기 냄새,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거, 더 이상 못 키우겠어. 도로 가져가."

 

손에 들려있던 종이가방을 떠넘기듯 쥐여 주고 돌아섰다.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뒤에서 잠깐만요, 하고 무어라 말하려는 게 느껴졌지만 딱히 쫓아오진 않는 것 같아 돌아보지 않았다. 집까지 가는 길이 유독 칙칙하게 느껴졌다.

 

 

*

 

 

삐삐삐삐삐―

 

벌써 세 번째 울리는 전화 벨 소리에 누군진 몰라도 정말 끈질긴 놈이라고 생각하며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긴장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발신인 경영17김홍중. 그럼 그렇지.

 

―와, 박성화. 뭐 하느라 이제 받냐?

"왜, 또."

―목소리 뭐야, 잤어?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알아?

"잔소리할 거면 끊는다."

―야야야 잠깐만, 너 이따가 7시까지 북문으로 나와. 계속 그러고 처박혀만 있지 말고 바람도 쐴 겸 한잔하자.

 

귀찮은데,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화는 이미 끊겨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6시 45분. 7시까지 도착하려면 지금 당장 출발해야 했다. 김홍중 미친 거 아냐? 기가 막혀서 그냥 씹을까 하다가 거의 일주일을 집에만 틀어박혀있던 게 생각났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좀 아니다 싶어 대충 눈에 보이는 대로 옷을 걸쳤다. 집을 나서기 직전, 텅 빈 창가에 시선이 닿았다 떨어졌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허전함을 애써 달랬다.

 

홍중을 따라 제법 으슥한 골목까지 들어갔다. 추운데 대충 아무 데나 가지 뭐 하러 이런 데까지 오냐고 툴툴댔지만, 앞서가는 뒤통수는 조금도 반응해주지 않았다. 이제 다 왔다는 말에 고개를 든 순간 가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빨간색. 쨍한 빨간색 머리.

 

"잠깐만. 여기 말고…"

"아 왜애. 여기 안주가 싸고 맛있다 그랬단 말이야.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

 

한참 문 앞에서 뜸 들이고 있는 사이, 먼저 가게에 들어간 홍중이 민기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게 보였다. 결국 마지못해 가게에 들어서는데 하필 눈이 딱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혹시 뭐라고 말이라도 걸까봐 서둘러 홍중이 앉아있는 자리를 찾아 구석 쪽으로 돌아앉았다.

 

"야, 민기 여기서 알바한대. 알고 있었어?"

"…아니."

"그치? 17 중에 아무도 몰랐을걸?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쟤, 요새 걔랑 자주 붙어 다닌다던데. 그 왜 있잖아, 피부 하얗고 키 좀 작고."

 

둘이 사귀나? 자기 딴엔 가벼운 농담이었겠지만 이쪽은 그 한마디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갑자기 속이 답답해져 안 마시던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술이 쓰냐, 인생이 쓰지.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꿀꿀할 때 마시는 술이 더 빨리 취한다고, 몇 잔 안 마신 것 같은데 눈앞이 핑핑 돌았다. 멍한 머릿속에 문득 식물도감에서 읽은 설화 하나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양치기에게 배신당하고 하늘로 올라가버린 멍청한 요정 시클라멘. 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 요정과 겹쳐 보였다. 바보같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다 잃고 떠나버린다고 생각했는데, 그 심정이 조금은 이해될 것도 같았다.

 

"홍중아, 나 휴학할까."

"미쳤어? 복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휴학이야. 박성화 취했네."

 

쨍그랑―

이어지려는 홍중의 타박을 날카로운 소리가 가로막았다. 테이블과 접시가 강하게 맞부딪히는 소리. 알바생이 언제 시켰는지도 모를 안주를 놓다가 손이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무거워진 고개를 테이블에 반쯤 처박고 있느라 알바생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터였다. 깨지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네.

 

"야, 쟤 너 왜 저렇게 보냐?"

"뭐가아…"

 

홍중이 하는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소리도, 시야도, 오만 감각이 다 몽롱했다. 과음했나. 점점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어렴풋이 누군가가 가게를 뛰쳐나가는 소리, 중년 남성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

 

 

술자리가 파하고, 데려다주겠다는 홍중의 말을 몇 번이나 거절하고 나서야 겨우 혼자서 집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어지간히 술을 많이 마시긴 했나 보다. 그래도 찬바람을 맞으니 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정신이 돌아올수록 눈에 들어오는 새벽 자취촌의 스산한 풍경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지만 정말인지, 요즘 따라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송민기, 여기서 뭐해."

 

집에 들어서려는 순간, 빌라 앞 계단에 앉아있는 큼지막한 인영에 비명이 나올 뻔한 걸 꾹꾹 눌러 참았다. 저를 보고 벌떡 일어난 사람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큰 키에 새빨간 머리. 거기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건지 코끝 하며 귀끝, 손끝 할 것 없이 죄다 머리랑 똑같은 색을 하고 있었다.

 

"혼자서 온 거에요? 아까 많이 취한 것 같던데,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위험하잖아요."

"딴소리 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뭐 하러 온 거냐고."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내가 누구 때문에 술을 이렇게 마셨는데.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할 말 없으면 간다, 하고 돌아서려는데 뭔가가 눈앞에 훅 다가왔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 창가에 있던 그 꽃 화분이었다. 분명 시들했었는데, 활짝 핀 꽃은 다시 생생하게 예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이건 왜…"

"좋아해요."

"뭐?"

"좋아한다구요. 성화 형, 진짜 좋아해요. 좀 더 그럴싸하게 준비해서 제대로 고백하고 싶었는데, 제가 바보였나 봐요. 알바한다고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실수도 많이 하고. 그냥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

"…그러니까, 휴학 안 하면 안 돼요?"

 

허.

다리에 힘이 쫙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그 와중에도 그놈의 화분만큼은 품에 꼭 안은 채로.

 

"형, 괜찮아요? 추운데 이런데 앉아있으면 안 되는데."

 

발을 동동 구르던 녀석이 제 옷자락을 잡고 일으키려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하곤 얼어붙었다. 앞에 주저앉아선 횡설수설하는 꼴이 제법 웃길 법 한데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물어야 할 게 있었다.

 

"걔는?"

"네?"

"걔는 뭔데. 맨날 붙어 다녔다는 걔. 저번에 기숙사도 같이 들어갔잖아. 걔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내뱉고 나선 조금 후회했다. 첫 번째는 꼴사납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튀어나와서. 두 번째는 민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이없는 소리를 들은 것 마냥 기겁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알고 보니 그 애랑은 그냥 어릴 때부터 한동네 산 친구고, 부모님이 꽃집을 하셔서 꽃 사는 김에 키우는 법 물어보고 그런 것뿐이란다. 기숙사 같이 들어간 것도 알바 퇴근하는 길에 근처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 끌고 온 게 다라고.

 

"아 뭐야아…"

 

들을수록 김새는 이야기들뿐이다. 결국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오해한 거라는 뜻이었다. 억울하고 쪽팔려서 눈물이 더 날 것 같아 고개를 푹 수그렸다.

 

"형 혹시, 질투했어요?"

"아니?"

 

나오려던 눈물이 그만 쏙 들어갔다. 황당해서 바로 부정하는 말이 튀어나갔다가, 잠시 멈칫하곤 금방 깔끔하게 인정했다. 어, 질투한 거 맞아. 여기까지 와서 숨기는 게 뭔 소용인가 싶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린 녀석만 빼면. 빨리 대화 흐름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화젯거리를 찾으려 바쁘게 굴러가던 눈에 처음 봤을 때만큼 새빨개진 머리가 딱 들어왔다. 저거다.

 

"머리, 염색 새로 했네."

"아 이거… 형 때문에 한 건데."

"나? 왜?"

"형이 그때 예쁘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하고 맞받아치려다 도서관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얼굴로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때 깨있었어?

 

"네. 저 진짜 예전부터 형 좋아했어요.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요."

"……"

"그러고 보니까 아직 대답, 못 들었는데."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잇던 민기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어쩐지 그 시선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손에 들려있는 화분만 한참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이거… 꽃. 키우기 힘들더라."

"그건 갑자기 왜…"

"나름 인터넷으로 키우는 법도 찾아보고, 물 제때제때 주는데도 자꾸 시들고."

"……"

"그러니까, 민기야. 같이 키울까."

 

우리 둘이.

 

그러려면 물어볼 게 많았다. 길바닥에서 얘기할 순 없으니까,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아직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얼빠진 표정을 보니 그제서야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달리 긴 새벽의 시작이었다.

 

 

*

 

 

"이거, 이제 꽃 다 져버렸네."

"그거 원래 겨울 꽃이잖아요. 이제 봄이니까 질 때도 됐지. 죽은 거 아니니까 걱정 마요."

"이야. 우리 민기, 완전 꽃 박사 다 됐네? …내가 걔랑 그만 만나라고 했지."

"그런 거 아닌데. 저 혼자 공부한 건데요?"

"어어."

"아니, 진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로 한껏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말 그대로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아 저거, 얼마 전에 염색했으면서 흰 수건 쓰지 말라니까.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요.

 

"그렇게 잘 아는 놈이 꽃말도 안 알아보고 꽃 선물을 해? 질투가 뭐냐, 질투가."

"어? 제가 아는 꽃말은 그거 아닌데."

 

그럴 리가. 제가 못 믿는 눈치니까 진짜라며 휴대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눈앞에 들이밀었다. 시클라멘의 꽃말, 수줍음. 제 수줍은 마음을 표현한 뭐 그런 거죠, 하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빨리 준비하고 학교나 가. 1교시 수업 늦겠다."

"뽀뽀해주면?"

"니가 애냐…"

 

정말 뽀뽀해주기 전까진 꼼짝도 안 할 것처럼 구는 탓에 마지못해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가볍게 입술을 마주 댔다가 쪽, 소리 나게 뗐다. 방금 씻고 나와서인지 물기 어린 입술이 조금은 차게 느껴졌다.

 

"자, 됐지? 그럼 이제…"

 

뒷말은 다시 맞닿아오는 입술에 삼켜져 나오지 못했다. 무어라 말하려고 살짝 벌려진 틈을 타 비집고 들어오는 혀가 입술과 달리 뜨거웠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마지막 남은 이성을 붙잡고 더 깊게 들어오려는 걸 억지로 밀어냈다.

 

"나 그냥 오늘 1교시 가지 말까?"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 하는 건 반칙이지. 닿아오는 손에 허리께가 화끈거렸다. 너 저번 주에도 이랬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왠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한참을 망설이던 눈이 마침내 허락하듯 감기기 직전, 흐릿한 시야에 가득 차는 붉은 색.

 

아마도, 그 선명한 빛깔을 너무 사랑하게 되어버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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