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nce again
익명
Once again, 밍낫.
“ 헤어져. ”
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산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관계를 끝내는 것, 단지 그거였다. 뭐라도 말하려 입을 우물거리는 산을 뒤로 하고 송민기는 돌아섰다.
민기야. 눈물이 계속 나와 힘들게 말을 꺼낸 산이 민기를 멈춰서게 했다. 돌아봐주길 바랐다. 다시 한번 안아주길 바랐다. 내가 미안해, 라고 말하면 지금보다는 뭔가 달라지겠지. 비극적인 스토리를 어떻게든 바꾸고 싶었지만 최산은 아무것도 못 했다. 이미 차가워진 표정으로 산을 바라보던 민기는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그리고 산은,
“ 헉, 헉… . ”
오늘도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몇 년이 흘렀음에도 송민기는 자꾸만 꿈에 나와 산을 괴롭혔다. 상체를 반쯤 일으켜 침대헤드에 기대어 숨을 고르던 산이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잠을 청하려 똑바로 누웠다.
산은 눈을 감지 못했다. ㅡ확률은 적었지만ㅡ 눈을 감으면 꿈이 이어지곤 했다. 뒤척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방문을 열리고 산을 아들이라 칭하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산의 머리를 쓰다듬다 산이 눈치채지 않게 천천히 일어섰다. 산은 그 찰나를 또 어찌 들었는지 가지 말라며 외롭다며 잡았다. 영인이 부를까 아들?
산의 어머니도 걱정이 컸다. 다 큰 남자애가 아직도 혼자 못 잔다니 속상할 만했다. 산에게는 송민기 자체가 악몽이었다. 그래서 오늘 같은 꿈을 꾸던 민기와 연애할 때의 꿈을 꾸던 산은 일어나면 몸을 떨었다. 영인이는 부르지 마. 그리고 산은 영인을 싫어했다. 결혼에 그렇게 성급해야 할 나이도 아닌데 부모님은 산을 영인과 혼인시키려 했다.
수많은 사람 중 왜 정영인이었냐 묻는다면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어릴 때부터 둘이 장난처럼 결혼할 거라고 말해와서. 제일 골치 아픈 두 번째 이유는 최산은 장난이었는데 정영인은 진심이라서. 영인이가 산이 말고는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아요, 라는 영인의 부모님의 말에 산의 부모님은 둘의 혼약을 허락했다. 물론 산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로.
“ 엄마 진짜 이건 아니지. ”
이제부터 너를 섬길 사람이라는 어머니의 말에 산은 들고 일어났다. 너 혼자 못 자잖아.
아니 엄마, 그니까 그게 왜 송민기인건데. 산의 어머니가 다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산은 어린아이처럼 쾅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친한 애 붙여놨더니…….
여기서 문제점 두 가지. 첫 번째는 산이 민기를 아직 못 잊었다. 제일 골치 아픈 두 번째 문제점은 그 아무도 이 둘이 연애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온 소꿉친구인 줄 안다는 것이다. 둘의 연애가 알려지는 것을 최산은 별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싫어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그래서 둘은 거의 비밀연애를 하다시피 했다. 그 연애에 먼저 지쳐 민기가 헤어지잔 얘기를 꺼냈다고 말해도 거짓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똑똑 하는 짧은 노크와 함께 송민기가 등장한다. 산은 지금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나가. 오랜만에 한 방 안에 이방인과 같이 있자니 산은, 아니 그냥 까놓고 말하면 전 애인과 한 방에 있는 게 싫은 거다.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야, 저가 찬 것도 아니야 차이고 나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가지 말라고 했으니 산에게는 그날이 좋은 기억일 수가 없다. 내가 왜? 달라진 건 없다. 그냥 송민기는 송민기다. 알겠다고 순순히 나갈 리가 없었다.
“ 일하러 온 거야. ”
그치, 그럴 리가 없지. 산은 보고 싶었어, 따위의 말을 또 기대했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건 산이었다. 이 공기를 감당하기 힘들어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최산한테 송민기는 트라우마였다. 민기는 산에게 있어서 모든 게 첫 번째였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이런 것들이 다 산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받은 상처도 더 컸고 사람을 조금씩 멀리하는 이유가 되었다.
산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민기는 그대로 산을 섬겨야 했고 산은 민기의 도련님이 되어 둘은 언제 어디를 가든 같이 다녀야 했다. 그게 이 세상의 법칙이었다, 부모님의 강요도 조금은 포함이지만. 사람들은 항상 보고 싶은 대로만 본다. 민기가 산을 도련님이라 칭하지 않으면 남들은 둘을 연인 사이로 볼 것이 뻔했다. 산이 자리를 떴을 때면 민기는 붙어 있어. 라고 한마디 했다. 산이 또 그때처럼 기대를 품고 왜? 묻는다면 민기는 오해하잖아, 역시나였다.
산은 민기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너무 싫었다. 그냥 차라리 무시하고 살아줬으면 했다. 적응되려고 할 때쯤 옆에서 민기가 말을 걸어왔고 예전 같은 다정한 말투로 ㅡ보는 눈이 있었기에ㅡ 산을 불렀다.
“ 최산. ”
“ 존칭 똑바로 해. ”
산이 선을 그으려 했다. 헷갈리기 싫은 것도 있었고 마음을 정리하자 했다. 그냥 밖에선 네 이름 부르게 해 줘라. 민기의 말투가 평소 같지 않았다. 조금은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산은 바보처럼, 또 흔들렸다. 하마터면 산은 네 맘대로 하라는 둥 넘어갈 뻔했다. 산이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조용한 방에 혼자 남겨진 민기의 눈이 살짝 일렁였다.
산에게 이제 의지할 사람은 정영인뿐이다. 의지라기보다는 이용이 더 정확하겠다. 일부러 영인이 보일 때면 달려가서 한쪽 팔을 두 손으로 안고 다른 팔로는 안기곤 했다. 오늘도 당신은 잘생겼네요, 산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해댔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산이 말하기를 송민기 질투 작전이라나 뭐라나. 결과가 어떻든 산이 얻는 건 송민기와의 관계 단절이다. 반대로 영인과의 관계 발전은 조금 마이너스겠지만.
“ 누구야? ”
산의 생각이 틀렸다. 관계 절단이고 자시고 되려 민기가 산에게 말을 걸어왔다. 약혼했어. 산은 잠시 머뭇거리듯 싶더니 답했다. 숨겨야 좋을 것도 없으니까, 솔직하게 터놓자는 게 산의 두 번째 생각이었다. 그리고 산의 두 번째 생각도 역시 틀렸다.
“ 너 미쳤냐? ”
민기는 놀란 척 하나 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말투 하나하나에 짜증이 섞여 퍽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이번엔 절대 지지 않겠다고 한 산이 또 고개를 숙였다. 신경 쓰이게 해. 겨우 들릴 듯한 목소리로 민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뜨려 했다. 신경, 쓰지 마.
이번에도 이런 말밖에 못 하는 산은 저 자신이 너무 싫었다. 비참했고 우스웠다. 아마 민기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게 산의 세 번째 생각이었다. 답답한지 민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넌 진짜…. 산의 세 번째 생각도 틀려먹었다.
“ …그렇게 만들지를 말던가. ”
숨이 막혔다. 산은 차라리 민기와 있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어색해죽으려 하는데 정작 영인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고 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주님. 따라 웃던 산의 입꼬리가 빠르게 내려왔다. 언제부터인지 영인은 산을 공주님이라 부르곤 했다. ㅡ모셨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ㅡ 산이 예전에 한번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일까 산이 깨어나고 공주님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둥 이따위의 저급 멘트를 날렸다. 산이 정영인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다.
영인은 최산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안 맞는다는 게 더 가깝지만 산에게 뭐 좋아하냐고 물어보는 족족 반응이 시원찮았다. 그러다 하나 얻어걸린 꽃은요? 는 산의 호응을 이끌었다. 엄청 좋아해요! 하루종일 꿍했던 산이 오늘 영인 앞에서 처음으로 웃어보였다. 진짜 좋아하나 보네. 산은 꽃 얘기를 사실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직도 못 잊어서 마음이 기억하는 거랄까. 해맑던 웃음이 생각에 잠길수록 쓰게 되어 갔다.
산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쟤가 저럴 애가 아닌데, 자꾸만 하지 않던 행동들을 했다. 일부러 다 보는 앞에서 산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했고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심되리만큼 산이 말을 끝마칠 때마다 반응해주었다. 최산에게는 기회였다. 모든지 할 수 있을.
“ 손 잡아줘. ”
산이 민기에게 손을 뒤집어 내밀었다. 언제나 그랬듯 산은 조금의, 아주 조금의 기대를 품고 민기의 반응을 기다렸다. 역시 산의 예상대로 민기는 손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며 고민하는 듯 싶었다. 산은 그런 민기에게 말을 덧붙였다. 쓸쓸하단 말야.
민기는 저의 손을 산의 손 위에 살짝 올려놓더니 이어 깍지까지 껴버렸다. 당황한 건 산이었다. 싫다는 소리 한번 안 하고 바로 잡는다는 게 어딘가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손을 잡고 걸을수록 얼굴이 빨개지는 기분이 들어 산은 손을 민기에게서 빼냈다. 도련님, 왜… 산의 얼굴은 터질 듯이 빨개졌다. 자기에게 맞추려는 민기의 발걸음을 무시하고 산은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민기가 혼자 남았다. 뒤에 다른 경호원들이 있어 혼자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민기의 눈에는 영인이 들어왔다. 당연히 그냥 지나갈 것이라 생각했던 민기는 영인이 자기를 불러도 무시했다. 정영인은 굳이 민기의 옆에까지 와서는 인사를 건넸다.
민기씨? 못 들었나봐요. 웃으며 말하는데 침을 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민기가 대답했다. 아… 네. 잠시 정적이 흐르다 먼저 민기가 말을 뗐다. 무슨 사이에요? 최산이랑 그쪽. 영인은 ㅡ민기 입장에서 봤을 때ㅡ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아, 저희 곧 결혼해요. 설마 진짜겠어, 했던 민기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진짜네. 영인은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네? 하고 다시 되물었다.
“ 그쪽들 연애사에 관심은 없는데 산이가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거 싫어하는 것 같아서. ”
“ 음, 아닌데. 좋아하던데. ”
민기는 영인의 표정이 너무 싫었다. 저 여유로운 표정.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것 같은 저 표정이 너무 짜증났다. 어제 산이 표정 못 봤나봐요? 내내 웃고 있던 영인의 입꼬리가 이제야 좀 눈치를 챈 듯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호칭 바꿔요. 결혼할 사이라면서 그런 것도 모르면 쓰나. 산이 거의 집에 다다랐을 때쯤 민기도 뛰어갔다. 혼자 남겨진 영인이 헛웃음을 쳤다. 웃기네.
얼마나 급히 걸었을까. 산이 복잡한 생각들로 머리가 아파올 때쯤 문에 쾅 부딪혔다. 아, 씨…. 습관적으로 문을 째려보며 먼저 화부터 냈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혼자 민망해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막 닫으려고 하는 순간 문이 다시 열렸…다? 당황한 산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뭐야, 너…! 민기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엄청 빨리 가네. 송민기 그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작게 방에 퍼졌다. 앞에 약혼잔가 뭔가 하는 사람 있던데. 정영인이다.
“ 왜요? ”
“ 산씨, 꽃 좋아하신다 그랬죠? ”
“ 에 ? 아, 네. 근데 언제부터 산씨라고 ”
우리 눈꽃축제 갈래요? 정영인은 산이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며 얘기하는 듯했다. 조금 이상하게 느낀 산이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송민기가 산의 어깨를 한쪽 팔로 끌어당기더니 좋아요. 하고 대신 답했다. 당황한 건 산도, 영인도 마찬가지였다. 민기의 팔에 먹혀들어간 산의 어깨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영인이 자리를 떠나자 그제서야 민기는 산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안 그래도 어색했던 공기가 더 어색해져 답답했다. 산의 표정은 누가 봐도 딱 불편해보였고 반면에 민기의 표정은 그닥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넌 왜 가? 물어볼까 말까 산이 망설이다 민기가 공간을 벗어나려 할 때에 소심하다면 소심하게, 까칠하다면 까칠하게 물었다. 나도 가고 싶어서. 간단한 대답이었다. 아…. 산은 괜히 더 민망해졌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 눈알만 데굴거리는 사이에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민기 씨는 왜 가요? 마치 민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영인이 딱 맞춰 나타났다. 일은 해야죠.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제 우리 사이 알았으면 눈치껏 빠져줬으면 하는데. 영인이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삐딱하게 섰다.
말하는 데 주머니 손은 빼죠, 무슨 예의야. 민기가 웃으며 주머니 안에 처박혀있는 영인의 손을 잡아 뺐다. 영인의 기분이 상했는지 손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뒤로 빼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 산이 제가 먼저 좋아했어요. 민기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 유치하네. 글쎄요, 누가 먼저 좋아했을까? ”
12월 17일.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기 일주일 전이었다. 최산의 왼쪽에는 정영인이, 반대쪽에는 송민기가 있었다. 산은 평소와는 다른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눈꽃축제를 억지로 누리기 바빴다. 아니, 처음엔 억지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그랬다. 더 이상 불편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막 기쁘지도 않았지만 산은 나름 오늘 하루에 만족했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공주… 아니, 산 씨? ㅡ영인은 쓸데없이 말을 참 잘 듣는다.ㅡ 산은 요정 같은 얼굴을 하고 응! 하고 답했다. 축제 전체를 배경으로 하여 브이를 치켜들고 있는 산은 누가 봐도 예뻤다. 영인이 카메라를 들어 산을 찍어줄 때쯤, 민기도 저 멀리서 조용히 저의 폰을 꺼내 산을 향해 카메라를 켰다.
“ 뭐해요? ”
영인이 다가왔다. 민기는 급히 보고 있던 폰을 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날씨가 춥네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민기는 얼굴이 뚫릴 듯이 영인을 쳐다보았다. 갑자기요? 이어질 것 같던 대화가 예상을 깨고 중간에 뚝 끊겼다. 뭐에요? 사진. 영인은 그 짧은 순간에 그걸 또 봤다. 민기가 뭘 하고 있었는지. 못 보던 사진이에요? 누가 들어도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민기가 되물었다. 영인은 말없이 민기를 바라봤다. 드릴까요? 민기가 여유 있게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영인이 작게 비웃고 다시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묘한 정적을 깬 건 민기였다.
아, 근데 이건 그쪽 연인한테 먼저 물어봐야겠다. 우리 진짜 각별한 사이였거든요. 그쪽들처럼. 결국에는 참지 못한 영인이 주먹질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주인공이 멋있는 법이었다. 송민기는 그걸 또 살짝 피했다. 덕분에 정영인은 모양 빠지게 넘어졌… 아니, 정정해서는 넘어질 뻔했다. ㅡ손으로 바닥을 짚었으니 거의 넘어진 거와 다름 없지만.ㅡ
“ 제가 그쪽들 연애사에 진짜 관심 없는데. 최산은 아직 관심이 있어서. ”
여전하네 넌. 예쁘게 장식되어 있는 얼음들을 보며 아이처럼 뛰어다니는 산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정말 작았는데 그건 또 어떻게 들었는지 산은 뭐가? 하고 물었다. 처음으로 당황한 민기가 대충 얼버무렸다. 꽃 좋아한다며, 눈꽃이 꽃이냐.
민기는 평소보다 더 틱틱댔다. 지금 산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의 감정이 전과는 다르다는 걸 송민기도 느꼈다. 눈꽃도 꽃이거든. 그에 산은 오히려 더 기분이 상했다. 금방 또 풀렸지만.
“ 나 꽃 안 좋아해. 너 때문에 좋아한 거지. 너가 좋아하는 건 뭐든지 다 좋아하고 싶었어. 너가 내 마지막이라고 믿었어서. ”
“ …. ”
기억나?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그게 뭐든…, 별로 기억하고 싶지가 않네. 산에게 그때의 민기는 지옥 그 자체였으니까. 그럼에도 사랑했다. 그래서 산은 그런 자신이 너무, 너무나도 미웠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왜 너를 사랑했을까. 아직도 산에게는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비슷한 곳이었는데, 고백했던 날.
“ 미안. ”
뭐, 뭐라고? 산은 제 귀를 의심했다. 평소에도 미안하다는 얘길 하지 않던 송민기가 이 좋은 날에 그 좋은 목소리로 미안하단 말을 했다. 미안하다고. 너한테 했던 거 전부 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인데도 산은 울컥하거나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야? 울고 싶다기보다는 뭐랄까, 짜증났다.
“ 난 진짜 내가 너무 싫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런 거 하나에 또 풀린다는 게. 진짜 우스운 것 같아. ”
“ 산아. ”
“ …그냥 나 좀 잊고 살아주면 안 돼? ”
산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고개를 떨구자 따라 툭 떨어지는 눈물이 눈밭을 적셔 녹였다. 산은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는 발을 떼려 했다. 가지 마. 이런 적은 정말이지 너무 드물어서 산의 걸음을 멈추기에 딱 적당했다.
산이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발을 옮기려 하자 민기가 저 멀리서 달려와 안겼, 아니 산을 안았다. 산의 눈물이 아까처럼 다시 고였다. 좋아해. 이내 산은 눈물을 툭, 툭 떨구었다. 그냥 가, 제발… 산은 그런 민기를 밀쳐내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렇게 또 안기면 산은 뭔가 지는 기분이었다. 산아. 민기도 울먹였다. 가야 하는데. 좋아하면 안 되는데. 잊어야 하는데. 나 한번만 다시 좋아해줘. 산이 민기의 손을 쳐내어 이제 더 이상 예쁜 그림은 볼 수 없었다. …안돼.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산은 또 그렇게 먼저 가 버렸다. 천천히 생각해도 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도 민기는 침대에 앉아 며칠 전부터 하고 있다는 추억팔이, 뭐 그런 비슷한 걸 하고 있었다. 민기가 본 사진은 딱 3년 전 이맘때쯤, 산이 사진을 찍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민기를 트리 앞에서 꼭 안고 찍은 거였다.
그리고 며칠 후 헤어졌지만. 민기의 마음이 복잡했던 시기였다.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굳이 만나야 할까, 그래도 사람 마음은 모르니까. 이러면서 며칠을 더 만났지만 민기는 산에게 쏟아붓는 시간이 낭비라 생각이 들었다. 백 번 후회해봐도 소용은 없었다. 이미 그 시간들은 지났고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래? ”
“ 어… 뭐가? ”
몇 년 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분명 이 둘의 연애에는 갑과 을이 여전히 존재는 했으나 뭔가 바뀐 기분이랄까. 나 좋아한다는 거 다 개뻥이지. …그리고 산의 성격도 많이 바뀐 느낌이다. 누가 그래? 정영인이? 다정하게 물어오는 민기에 대답 대신 눈물이 먼저 마중 나왔다. 또 이래…. 너 진짜 싫어. 산은 귀엽게 째려보고는 또 가 버렸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제멋대로가 됐네.
“ 좋아해! ”
산의 방을 마침 지나가다 들리는 때아닌 고백에 민기는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잘못 들었나, 하고 다시 가던 길을 가려는데 다시금 좋아한다는 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니까. 민기는 뭘 하는지만 보기로 했다. 이미 아주 조금 열려져 있어 새어나오는 빛을 따라가면 문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산의 방이다. 매번 들락날락하던 곳인데 오늘은 왜 이렇게 낯선지 민기는 알 수 없었다. 산은 거울을 앞에 하나 두고 꽃을 들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고백 연습.
좋아해! 라고 꽃을 들이밀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아… 이게 아니야. 하면서 고개를 젓는 모습이 정말, 너무, 귀여웠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흘렀을까 산의 입에서는 이제 민기야! 가 먼저 나왔다. 산의 목소리가 너무 커 산도 깜짝 놀라고, 몰래 듣던 진짜 민기도 깜짝 놀라 작게 깜짝이야, 중얼거렸는데 산은 그걸 또 들었다. ㅡ산은 귀가 밝은 편인 것 같다ㅡ 산이 민기가 있는 쪽을 쳐다봤고 민기는 꼼짝없이 걸렸다.
산이한테 무슨 말했어요? 이 정도면 영인의 방이 마치 자기 방인 것처럼 자연스레 민기가 들어왔다. 글쎄요? 민기의 기분이 급격하게 상했다.
“ 영인 씨 근데, 그 말투 좀 바꿔요. ”
“ 네? ”
“ 그러니까 산이가 싫어하지. ”
여기서 또 뭐 하는데… 팔을 잡고 민기를 방 밖으로 끌어내려는 산이다. 놓고, 놓고 말해. 영문도 몰고 무작정 끌려나온 민기가 온갖 아픈 척은 다 하면서 말했다. 왜 또 거기 가서 그러고 있는데. 씩씩거리며 말하는 산이 마냥 민기에게는 귀여워 보였는지 민기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이번에는 웃어서 기분이 상한 산이 또 먼저 뒤돌자 어서 쫓아가 미안하다고 쩔쩔매는 민기다.
몇 분을 말없이 걷다 언제 벌써 잡아진 손에 산이 놀라면서 손을 확 빼고 저만치 물러섰다. 옆으로 멀어지려고 할수록 민기는 더 바짝 붙어왔다. 아까처럼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이 잡아졌다. 산이 은근슬쩍 뒤로 빼려 하자 민기가 못 빼게끔 큰 손으로 깍지를 잡아버린다. 그냥 있어도 돼. 그제서야 산이 아무 말 않고 조용히 걷는다.
“ 우린 무슨 사이야? ”
“ …친구 사이지. ”
“ 손 잡았는데? ”
다정하게 낀 깍지를 굳이 들어 확인시켜주는 민기에 산의 얼굴만 빨개진다. 너무 애매한 사이 아닌가. 산은 저절로 그날이 떠올려졌다, 민기한테 걸렸던 그 날. 차라리 송민기가 봤다는 걸 몰랐다면 적어도 이 정도로 창피하진 않았을 것이다. 산이 이렇게까지 후회하는 이유는 지금 민기가 자길 놀리고 있는 게 뻔하니까.
산이 고개를 숙이면 민기는 그런 산의 얼굴을 보려 따라 숙였고 얼굴을 가리면 예쁜 얼굴 왜 가려? 하며 일부러 더 놀렸다. 그만 좀 놀려… 안 그래도 부끄럽거든. 산의 하얗던 얼굴이 어느새 볼이 발그레해지고 터질 듯이 뜨거웠다. 산아, 너 열나는 것 같은데? 잔뜩 빨개진 얼굴을 보고 민기가 제 이마와 산의 이마에 손을 댔다. 이, 이만 가야겠다. 이따 봐.
오늘은 그걸로 끝일 줄 알았는데, 끝나지 않는 네버엔딩이었다. 민기는 자꾸만 산을 쫓아다녔고 깜빡이 없이 들어오는 횟수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오늘만 해도 장장 3번은 넘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따라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따라하는 정도에 다다랐다. 그래서 둘은 의도치 않게 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마주 보며 앉았다.
하루종일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탓에 부담스러움을 느낀 산이 테이블에 있던 찻잔을 들어 들여다보고는 마셨다. 너 나 좋아해? 다 삼키지는 못했지만. 하마터면 입안에 머금은 물이 밖으로 나올 뻔했다. 재빨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당황스러움은 감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뭔 소리야. 켁켁거리며 민기를 살짝 째려봤다.
“ 아니었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
“ 내가? 널? 왜? ”
“ 저번에. 너 나랑 눈 마주쳤잖아. ”
그건 어떻게 설명할래? 산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날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아, 그건… 네가 내 방에 들어와서 근데 내가 지금 이걸 왜 말하고 있는 거야? 나 갈래. 산은 그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을 놀리려는 의도밖에 없었던 민기가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뒤늦게 붙잡았다.
“ …미안.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
“ 이해해. ”
“ …. ”
“ 넌 항상 이런 식이었잖아. 내가 왜… 너 같은 애를. ”
잘렸다.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고, 산과 그렇게 되고 난 후 민기에게 일어난 일이다. 몇 번이고 그냥 출근하겠다 했지만 산의 어머니는 단호하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산이 홧김에 그런 걸까. 그게 아니라면 어머니가 그 둘의 연애를 반대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이유는 충분했다. 이미 산과 혼약한 사람이 있었고 산이 비밀연애를 고집했던 이유가 있었을 테니. 그렇다고 이렇게 물러설 송민기가 아니었다. 눈 한번 딱 감으면 뭐든 될 거라는 생각으로 민기는 어느 막장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그러니까 무릎을 꿇었다. 산의 어머니는 예상도 못 했는지 벌떡 일어났다.
“ 산이 눈에 안 띌 테니까 그냥… 그냥 산이만 보게 해 주시면, ”
“ 송민기. ”
최산이었다. 일어나. 어제처럼 잔뜩 화난 목소리였지만 나긋이 말했다. 아 일어나라고. 결국은 산이 민기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손 놔, 최산. 안 놔? 산의 어머니와 산의 분위기는 꽤나 살벌했다. 민기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러니까 이거 지금 내가 최산을 좋아해서 싸우는 건가 최산이 날 좋아해서 싸우는 건가. 솔직히 민기는 산이 당황할 줄 알았다. 아무 말도 못 할 줄 알았는데, 산은 놓으라는 손목은 안 놓고 손목을 타고 내려가 손을 잡았다. …손 잡은 건 이게 손 잡은 거고. 그때 민기가 했던 것처럼 산이 깍지를 껴 들어 보였다.
“ 내가 얘 좋아해. 그니까 절대 못 자를 줄 알아. ”
산이 손을 잡고 제 방으로 민기를 끌고 갔다. 진짜야? 민기는 입이 귀에 걸렸는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런 탓에 최산은 일부러 더 툴툴댔다. 너는 그런 말이 나와? 민기가 산을 뒤에서 꼭 안았다. 산이 말라서 그런지 품에 더 쏙 안기는 것 같았다.
“ 나도 좋아해. ”
“ 난 너보다 덜 좋아해. ”
“ …그래, 내가 더 좋아할게. ”
“ 너 진짜, 짜증나. ”
유일하게 켜져 있던 스탠드가 민기에 의해 꺼지고, 너나 할 것 없이 둘은 입부터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