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번째인가의 크리스마스
뻔
* 우울증, 자살 관련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관련 요소에 트라우마가 있으신 분들께는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야, 너도 솔직히 말해 봐, 최산. 게이 연애라고 뭐 다를 게 있냐?”
올라붙는 말꼬리에서 술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지는 임이 여느 때처럼 주사를 부리기 시작했다.
“왜 인간들은 우리가 존나 세상을 비관하지 않으면 진정성이 없다 그러냐? 우리가 다 목매고 뛰어내려서 뒈져야 속이 시원한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임이 술잔에 남아 있는 액체를 쭉 비웠다. 임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이는 광경을 가만히 노려보며, 나는 세상과, 혹은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다 결국 패배하고 만 수많은 이름 있는, 그리고 그보다 많을 이름 없는 예술가들에 대해 생각한다.
“어? 그렇다고 입맛에 맞춰 주자니 자존심이 존나 상하잖아, 안 그래? 씨발,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사는 꼴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게 안 되네.”
최근에 사비는 물론 나를 포함한 주변 지인들의 돈까지 꾸어 가며 제작한 영화가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은 뒤 임은 술이 부쩍 늘었다. 소규모의 시사회에 초대받아서 본 영화는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첫사랑이었던 남자를 다시 만나 또 한 번 사랑에 빠지는 남자 이야기. 임과 술자리를 종종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그 자신의 이야기였다.
“아, 그러고 보니 입맛에 맞춰 준다니까 생각났다.”
내 빈 술잔을 채워주며 임이 아이처럼 키득거리고 웃었다.
“최근에 무슨 씨팔 놈의 산타클로스인지 나발인지 베스트셀러 나온 거 있던데, 읽어 봤냐?”
“아, 그거. 읽어 봤지.”
임이 말하는 책은 ‘열여덟 번째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의, 발표된 지 이 년도 더 넘은 뒤에 재조명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이었다. 남고생 둘이서 몰래 연애하다가 부모님이며 학교에 들켜 상대가 먼저 자살하고 주인공도 그 뒤를 따르는, 뻔하다면 뻔한 그런 내용의. 그러나 나는 그 책을 읽다가는 조금 울었다. 제목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임도 그러했으리라 믿는다. 아니, 조금이라도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던, 격정적이고도 고통스러웠던 십 대를 거쳐온 퀴어라면 누구나 그러했으리라.
“야, 세상 존나 좋아지지 않았냐, 게이 소설이 베스트셀러도 되고?”
내가 마지못해 들어 올린 잔에 요란하게 부딪혀온 임의 술잔에서 넘쳐흐른 술이 손등을 적셔온다.
“근데 말야, 존나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면서까지 베스트셀러 작가를 꼭 해야 되냐? 어?”
양심이 있지, 씨발, 배신자 새끼. 술과 함께 욕지거리를 씹어 삼키던 임이 이내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빈 잔을 허공에 휘둘러댔다.
“넌 그러지 마라, 진짜, 어? 우린 그러지 말자고.”
진심보다 술기운이 더 독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대꾸 대신 미약하게 웃어 보였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들과 생각이 들어도 하지 못 하는 일의 경계가 점점 불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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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오랜 시간 책상 위에 펜을 반복적으로 두드리며 원고를 읽던 담당자가 펜을 내려놓으며 하는 말이었다.
“주인공이랑 남자친구가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게 다예요?”
“네, 그런데요…….”
내 입밖으로 나온 대답은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주눅 들어 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가 미간을 얽은 채 담담히 말한다.
“최 작가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대중은 좀 더 자극적인 걸 원해요. 특히 동성연애를 다룬 내용을 찾는 사람들은 더 그래요. 이성애 소설과의 차별점이 있어야 한다니까요? 상대가 남자여도 그만 여자여도 그만인 내용은 싸구려 로맨스 소설에도 널리고 널렸어요. 아시잖아요.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들어왔던 말을 다시 하는 담당자의 심각한 얼굴에 대고 나는 고개를 끄덕일밖에 도리가 없다.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아요. 자극적인 내용이 오히려 차별과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는 거.”
한층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그녀가 한 자 한 자 눌러 이어 말했다.
“근데 지금 작가님이 사회운동 하시는 거 아니잖아요. 작가님이 하시는 일은 팔리는 책을 쓰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몇 달 전에 내 담당을 처음 맡게 되었을 때부터 그녀는 줄곧 비슷한 말을 해왔다. 작가님이 제일 잘 아시지 않아요, 왜 작가님 책이 안 팔리는지? 작가님 글 쓰시는 거, 더는 대학 동인도 아니고, 취미도 아니고, 직업이잖아요, 생계수단.
“요번에 베스트셀러 된 ‘열여덟 번째 크리스마스’ 아시죠?”
“아, 네…….”
“그거 제가 전 출판사 있을 때 정 작가님이랑 함께 작업한 거거든요.”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같은 책을 다른 두 사람의 입에서, 그것도 전혀 다른 의도로 듣는 일은 생경하다. 문득 서점에서 그 책을 집어 들자마자 책날개를 펴 유심히 살펴보았던 작가의 사진이 떠오른다.
검은 눈동자가 깊게 맺혀 있던 그 옆모습도 이렇듯 상충하는 말을 들어오며 지금까지 살아왔을까. 그랬다면 그건 언제부터였을까.
“제가 봤을 땐 최 작가님도 베스트셀러 한 권 내실 때 됐어요. 한 번 나오면 전작들도 판매 부수 올라가는 거 아시죠? 잘 되면 묶어서 나올 수도 있고요.”
지독히 현실적이라 도리어 현실감이 없는 말을 들으며, 나는 어떠한 그리운 감정을 느낀다. 나의 열여덟 겨울, 그때 느꼈던 무력감.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그게 현실로 이루어지는 게 너무도 싫었던,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던. 꼭 십 년 전의 그 서툴고 어린 감정을 이제 와 다시 느낄 거라고,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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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2쇄째 찍혀나온 ‘열여덟 번째 크리스마스’를 테이블에 올려둔 채, 나는 그 책등에 찍혀 있는 ㅁ 출판사 앞 카페에서 며칠이나 시간을 죽였다. 그를 정말로 만나고 싶었더라면 내 담당자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짓을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그 깨달음 이후에도 나는 카페에 나가 종일 앉아 있기를 계속했다.
마치 우연히 같은 학교에, 그리고 같은 반에 배정된 한 남자애의 미소가 가슴께 후텁지근해지도록 예뻤던 것처럼, 나는 그런 우연을 가장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만날 수만 있다면 내 안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이 불안감이 다시 잦아들 것만 같았다. 오직 시간만이 해결해 주었던 이 불치병을 다스려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정우영이라는 이름의 그 옆모습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기약 없는 기다림을 포기한 것은 약 이 주 뒤였다. 만나서 무얼 얘기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였다. 그때까지도 눈앞에 띄워둔 워드프로세서의 창은 글자 한 점 없이 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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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새끼들, 다 조져버릴 거야, 내가아!”
“알았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타, 어?”
여느 때보다도 술이 더 들어간 임은 덩치만 큰 어린애처럼 굴었다. 한국 영화계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주워섬기며 저주하는 그를 간신히 택시에 태워 보냈다.
차 문을 닫고 허리를 펴는데 머리가 핑글 돌았다.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는 시야가 어질어질했다. 내 이름을 들은 것은 실눈을 뜬 채 카운터에 기대어 액정에 낙서에 가까운 사인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혹시, 최산 작가님 아니세요?”
목울대를 가볍게 긁으며 밀려 나오는 다소 높지만 부드러운 목소리. 제어되지 않는 큰 몸짓으로 반 바퀴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내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 주 동안 기다려 왔던 얼굴이 있다. 앞에서 보아도 까맣고 깊은 눈동자와 높은 콧마루는 그대로다. 다만 사진에서 보았던 입술이 고집스럽게 앙다물려 있던 것과는 달리, 눈앞의 입술은 호기심으로 반쯤 벌어져 있었다.
“……절 어떻게 아세요?”
말꼬리를 간신히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내 질문은 사납게 들린다. 나는 그제야 내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와, 진짜다, 어떡해! 저 완전 팬이에요. 평소에도 작가님 작품, 자주 읽거든요. 제가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도 작가님 대학 때 처음으로 내신 단편이었고요. 그때부터 줄곧 존경했어요. 작가님께서 담담하게 쓰신 글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갑자기 쏟아지는 단어들에 가뜩이나 희뿌연 정신이 마구 흐트러진다. 그 글은 학부 새내기 시절 소속되어 있던 문학 동아리의 동인지에 실린 초단편이었다. 그걸 어떻게 찾아 읽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 자신조차도 뚜렷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붉게 파헤쳐지는 감각, 그것은 그가 쓴 글을 읽었을 때도 느꼈던 통증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사인이라도 해드려요?”
그렇게 시비조로 되물으며 느닷없이 웃음이 터진다. 사인은 무슨 얼어 죽을, 베스트셀러 작가는 눈앞의 그였고 나는 그냥 주정뱅이인데.
“……진짜요?”
나는 그가, 정우영이, 함께 웃어주었으면 했다. 에이, 그냥 알아보고 좀 입에 발린 말 한 것 가지고, 농담이 너무 멀리 가셨다. 그렇게 웃어넘기고 대충 악수나 하고 헤어지기를 바랐다. 그랬는데.
“저, 그럼 내신 책에다 받고 싶은데, 이담에 연락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면서 허둥지둥 꺼낸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뽑아 내미는 게 아닌가. 웃기네, 진짜. 지도 작가라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제 핸드폰을 내밀지 않은 것이 정우영 나름의 배려였다는 것을 그때는 알아차릴 정신도, 여유도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이 결코 떳떳하지 못한 과거의 어떤 장면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켰을 따름이었다. 세상이 조금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멋모르고 달관하던 때였다. 바에 매일 같이 다니며 다가오는 상대가 크게 싫지 않으면 잤다. 원체 상스러운 부류였으나 개중에는 유난히 저속한 이들도 있었다. 자기야, 오늘 바쁘면 내일도 괜찮으니까 한 번만 뜨자, 응? 나 존나 잘해. 연락해.
“이다음이요?”
나는 앵무새처럼 정우영의 말을 반복한다. 현실에서는 처음 만나는 그 얼굴이 원망스럽고 밉다. 그는 제 책 한 권만으로 나를 이토록 모든 기억에 취약하게 만드는데, 나는 그 단단한 얼굴에 흠집 하나조차 낼 수 없다. 스무 살의 그 시절에는 해방감인 줄로만 알았던 무모함이 내 뇌수를 휘어잡고 흔든다. 내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너도 끼어.
“저 오늘 아니면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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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기보다는 방에 가까운 정우영의 공간에서 그와 몸을 섞었다. 섬세한 그의 문체와는 사뭇 다른, 정제되지 않은 거친 몸짓이 나를 조금씩 먹어 들어왔다. 술로 뭉툭해질 대로 뭉툭해진 신경이었음에도 뒤에서 그가 몰아붙이는 내내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 그를 책으로 만났을 때부터 물러지기 시작했던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감각이 아찔했다.
“아, 읽어보셨어요? 진짜 영광이다, 어떡해.”
내 솔직한 감상평에 정우영이 코끝을 찡그리며 멋쩍게 웃는다. 영광은 또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돌아 누워버린 내 귓가에 작은 새의 솜털 같은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작가님도 글에서 보기랑은 다르네요.”
엄청 순정파일 줄 알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감히 붙어오는 그의 몸을, 나는 떼어낼 생각을 하지 못한다.
“사귀고, 손잡고, 키스하고, 서로가 아니면 죽을 것처럼 사랑하고, 그러고 나야 섹스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연애만 할 거 같았는데.”
정우영의 설명에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뒤틀어가며 소리 내 웃는다.
“그러는 그쪽은? 그렇게 따지면 우영 씬 진작에 죽었어야 하는 거 아녜요?”
내 다소 난폭한 질문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는 웅얼거렸다.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그 가벼운 진동에서는 일말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조금 미안해지려다가도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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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고 어느덧 겨울이 찾아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그 술집에 가서 정우영을 만났다. 작품이나 연애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 둘을 빼면 시체인 것은 그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진작에 죽지 않은 정우영이 그저 아주 천천히 죽어가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시기였다. 웬만해서는 술에 잘 취하지 않는 그는 마음만 먹으면 한 손으로는 셀 수 없는 개수의 병을 비웠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 담배를 샀으며, 매일 같이 프로작과 졸피뎀을 함께 먹고 잠에 빠졌다. 내가 그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뒤에도 정우영은 내 앞에선 여전히 갓 피어난 해바라기처럼 웃었는데, 나는 그게 좋아서 그를 계속 만났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의 방 같은 집에 가 내 단편이 실렸던 동인지며 문학지가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장 앞에서 섹스를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내 책에 사인을 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이담에 해 주세요.”
매번 그런 식으로 나를 보내는 정우영 때문이었다. 이다음에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렇게 마시고 피우고 먹고 기절하듯 잠드는 주제에, 이 다음이, 내일이 있으리라는 건 어떻게 알아요? 그렇게 물으려다가도 어김없이 그 술집에 나타나는 그 말간 얼굴에 잊어버리고, 또 속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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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구질구질한 새끼다, 너도.”
내 설명에 임이 그렇게 명쾌하게 해답을 내어버리곤 컵라면 용기에 남은 면발을 후루룩 들이킨다. 밖에 앉아 있기는 아무래도 추운 12월의 초입이었지만, 임은 술도 밥도 살 돈이 없다며 편의점 앞에서 만나기를 고집했다.
“뭐 하는 건데, 그게? 연애도, 섹파도 아닌 게.”
“……모르겠어, 나도.”
명칭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글을 쓰지 않아도 될 때의 이야기였다. 나는 내 경험에다가 보기에만 화려한 조화를 덕지덕지 붙여서 파는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내 삶에 어떻게든 문자를 갖다 붙이고 정의해야 살아갈 수 있었다. 표현의 형태만 다르다 뿐이라, 임 역시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왜, 너도 뭐 그런 거 쓰게?”
“무슨?”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눈살을 찌푸리는 내게, 플라스틱 의자에 미끄러지듯 기댄 임이 이죽거린다.
“우울증에 불면증 달고 살던 애인이 자살한 비련의 게이 같은 거.”
너 씨발, 너까지 그러면 진짜로 절교다, 아냐? 그렇게 씹어뱉는 임의 말이 멀게 들렸다. 출판 담당자의, 이제는 숫제 그녀의 입버릇이 된 질문이 도리어 귓가에 맴돈다. 작가님이 하시는 일은 팔리는 책을 쓰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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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 꺼낸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구체적으로 변해 내 뇌 주름 사이로 스며들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막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미처 빛을 다 보지 못한 재능있는 작가의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 어딘가의 교양서적에 19세기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화로 나올 법한, 사람들이 꼭 좋아할 만한 구도였다.
나는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단편 몇 개를 쓸 것이고, 그 글을 가지고 대학에서, 그리고 인권 단체에서 강연을 몇 번인가 할 것이며, 그리고 짧은 다큐멘터리에 출연할 테다. 음, 그렇게 된다면 감독으로는 임이 좋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쳐 절로 몸서리가 났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약과 잠에 잔뜩 취한 정우영의 목소리에 이어 팔이 감겨온다. 잠에 막 빠지려는 사람의 그것답지 않게, 내 맨허리에 감기는 정우영의 팔은 비단뱀처럼 차갑다.
있잖아요, 내가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요? 목구멍까지 기어오른 질문은 그가 맞추어 오는 축축한 눈빛에 다시 뱃속으로 가라앉는다. 이 이름 없는 일시적 균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고, 또 그에 버금가도록 간절하게 깨뜨리고 싶었다.
영문도 모른 채 느릿하게 내리감기는 그의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세며, 나는 분노를 닮은 무력감을 곱씹는다. 우리가 설령 연인 관계라 하더라도, 그리고 실제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은 오로지 그, 정우영뿐일 것이기에. 연인은커녕 나 스스로의 죽음조차 내 이름을 뒤에 남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의 한계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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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의 집요한 연락을 모두 무시한 채 12월을, 한 해를 거의 떠나보냈다. 나는 그때까지도 한 자도 글을 쓰지 못했고, 연말이 다가올수록 초조하고 불안했다. ‘열여덟 번째 크리스마스’에서 주인공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날 죽었다. 생에 열여덟 번째 맞는 크리스마스였지만, 그토록 철저히 혼자서 맞는 크리스마스는 처음이라서.
“괜찮대두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함없는 웃음으로 술잔을 비우는 모습이 더 위태로워 보여서, 나는 정우영의 곁을 떠날 수가 없다. 떠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가 내게 자신의 옆자리를 허락한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작가님도 처음에 그러셨잖아요, 진작에 죽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근데 지금까지 살았잖아요.”
조금 취한 듯 불그스름하게 젖은 가느다란 눈빛으로 정우영이 미소짓는다. 그의 뒤로 형형색색의 전구와 촌스러운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플라스틱 크리스마스트리가 번쩍번쩍 빛난다.
모든 것에 무감해지고 싶어서 그의 속도에 맞추어 술을 마셨음에도 뱃속이 서늘해지는 두려움은 여전했다. 어느 쪽이 더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잃는다는 사실 자체인지, 실은 내가 바라고 있었던 불온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 버렸을 때의 죄책감인지, 그도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거라는 냉혹한 확신인지. 그의 시선과 얽은 내 시선이 따라 눅눅해진다.
“우영 씨도 처음에 저보고 그러지 않았어요?”
사귀고, 손잡고, 키스하고, 서로가 아니면 죽을 것처럼 사랑하고, 그런 연애만 할 것 같다고. 순서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그의 단어들이 내 목소리로 재생된다. 때마침 스피커에서는 머라이어 캐리의 유명한 크리스마스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내가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건 오직 너야.
우리가 그런 연애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을까요? 문득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이 인다. 시작부터 시기와 좌절로 어긋나버린 이 사전에는 없는 관계도, 언젠가는 모서리가 닳고 닳아 인류가 정의해 놓은 사랑이라는 틀 안에 맞아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마치, 상대가 남자여도 그만, 여자여도 그만인 싸구려 로맨스 소설처럼.
“……메리 크리스마스, 작가님.”
시계를 확인한 정우영이 대답 대신 그렇게 웃으며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 핸드폰 안에서도 날짜는 이미 12월 25일이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생에 스물여덟 번째로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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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술집을 나오면 으레 그러듯 택시를 잡아 제집 주소를 부르는 대신, 정우영은 반짝반짝한 야경이 펼쳐진 번화가 쪽을 손짓해 보인다. 내 가벼운 고갯짓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우리는 함께 걸음을 뗀다.
몇 골목 앞, 화려한 거리의 중심부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다. 어느 나무 농장에서 오로지 이날, 이 번화가의 중심에 밑동이 잘린 채 서 있기 위해 몇십 년을 자라온 전나무일 테다. 여느 때라면 그 사실에 씁쓸한 감상이 들었으련만, 이 순간만큼은 다르다.
아프기만 했던 열여덟에서 열 해나 멀어진 우리가 완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 미약하나마 스물아홉 번째를, 다음을, 몇 번째인가를 꿈꿀 수 있다는 것. 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과 그 추억으로부터 멀어져도, 어린아이처럼 불안하고 이기적이더라 하더라도, 원하는 글 한 자 쓸 수 없고 진심 어린 말 한 마디 할 수 없대도, 그저 이 순간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어느덧 우뚝 멈춰선 내 손끝에 정우영의 손끝이 닿는다. 내 시선 끝에서 그가 몇 번째인지 모를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해바라기 같은 얼굴을 언제까지고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