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울어진 태양 2편: ENVY
Regel
tw: 아동학대 암시, 약한 수준의 폭력성. + 웡낫이 조금 나옵니다.
종호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 지옥을 나갈 수 있을까.
“52번 실험체, 17번 실험체. 나와.”
언제나 똑같은 회색 감옥. 바깥에 있다고 들은, 있어야만 하는 불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회색빛의 가짜 세상. 종호는 이곳이 미치도록 싫었다.
“52번!”
절대로 그를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는, 흰옷과 회색 안경의 남자가 종호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그를 저지한 것은 검은색 수트를 입은 남자. 종호를 포함한 99명의 실험체 위에 선 절대적인 존재이자, 이 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했다.
“때려봤자 자네 손만 아프다네.”
그래서 그는 종호를 때리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안 나오면 13번부터 17번까지. 전부 다 처리할 거다, 52번.”
###
그는 100명의 실험체 중 52번째로 태어났다. 유전자 배합으로 만들어낸 인조인간.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것들. 거대한 기계가 어머니인 존재들. 종호는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태어나자마자 실험체 52번이라고 불리게 된 그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연구원들에게 맡겨졌다. 두 명의 실험체를, 두 명의 연구원이 담당한다. 그게 규칙이었고, 종호 역시 두 살 정도 될 때까지는 그렇게 컸다.
그러나, 어느 날 연구원 중 한명이 죽어버렸다. 손길이 억세고 아이를 인형 보듯이 하는 남자였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한명의 연구원이 홀로 종호와 다른 실험체를 돌보게 되었다. 강유화라는 이름의 연구원, 그리고 실험체 52번과 51번.
종호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걸 가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화는 마음이 여렸다. 아무리 정부에서 실험체일 뿐이라고 교육을 하고, 세뇌를 시켜도 그녀는 그 두 아이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52번에게는 종호라는 이름을, 51번에게는 여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기시되는 법칙 중 하나를 깨버린 거였다. 들키면 그날로 직장은 물론, 제 목숨까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랬다.
그리고 그녀는 여상이와 종호를 자기가 낳은 아들들처럼 길렀다. 여상이는 조종능력계였고, 종호는 신체 강화계였지만 유화의 앞에서는 그저 똑같은 아이들이었다. 안 그래도 100명의 실험체 중에서 가장 강력한 아이들이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부던히도 애썼다. 왜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분명 강하면 강할수록 정부에서 주시하기 때문이었겠지. 몰래 들여온 책을 읽어주고, 사탕을 쥐어주며, 바깥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른 연구원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안아주기도 하고, 둘을 재울 때는 자장가도 불러줬다. 종호와 여상이는 둘다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유화는 팔에 주사를 꽂아넣고 폐를 갈라내고 팔다리를 일부러 부러트리는 연구원들과는 다른 분류의 인간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였다. 지하 10층에서 윙윙대며 돌아가는 거대한 '모체'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어머니.
어느날, 그녀는 평소와 다른 얼굴을 하고 여상이와 종호를 깨웠다.
“얘들아, 어서 나를 따라와. 절대로 소리를 내면 안 돼, 알았지?”
그렇게 말하는 유화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퉁퉁 부은 눈가는 생소했다.
“아가, 여기서 나가면 바다를 보러 가자.”
두려운 것이 많이 없는 둘이었음에도 유화의 그런 모습은 그들을 겁먹게 했다. 그녀의 양손을 잡고 조용히 철창을 나섰다. 복도에는 붉은빛이 돌고 있었고, 사이렌이 귀 찢어질 듯이 울리고 있었으나 유화는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여상이와 종호를 잡고 뛰었다.
그 불안감의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제발, 제발...!”
“잡아! 저년이 실험체 둘을 데리고 도망친다!”
낯선 목소리가, 뒤에서 고함을 질렀다. 종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 어머니께서 우리를 구해주려고 하신 거구나. 저들에게 잡히면, 그녀는 죽겠구나.
그래서 뛰었다. 작은 다리가 나가떨어질 것 같이 아파와도, 어제 연구원들이 잘라낸 옆구리가 터져서 피가 흘러내릴 것 같아도 뛰었다. 종호는 잡혀도 아까운 실험체라서 죽지 않겠지만 유화는 아니었다.
그렇게 뛰고, 여상이가 뒤로 이것저것 집어 던진 덕분에 세 사람은 출구처럼 보이는 부서진 창문에 도달했다.
“종호야, 엄마가 먼저 나갈께. 여상이를 밖으로 던져주고 너도 바로 나와, 알았지?”
그녀는 종호의 답을 듣기도 전에, 창문틀을 뛰어넘었다.
쿵, 쿵. 심장소리가 뛰는 소리가 선명했다. 종호는 유화가 이야기한 대로, 여상의 허리를 들어올려 창문 밖으로 밀어냈다.
“빨리 잡아!”
... 벌써?
뒤를 돌아보자,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서 사람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종호가 이대로 나간다면, 분명 얼마 가지 못해 잡혀버릴 게 분명했다.
“먼저 가고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창문 밖의 초원을 눈에 담고, 여태껏 본 모든 것들보다 넓고 광활한 하늘을 쳐다봤다. 그 아래에 선 여상이와 유화는, 그를 부르고 손을 뻗었지만, 종호는 이미 알았다. 여상의 힘은 그를 당길 정도로 강하지 못했고, 세 명을 띄워서 도망칠 정도로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걸.
세 명이 잡히는 것보다, 혼자 잡히는 게 나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훈련받은 시간을 떠올렸다. 할 수 있었다. 저 사람들을 몇 초만 막을 수 있으면...
종호의 첫 번째 탈출 시도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
“망, 할, 더럽게 아프네.”
이상한 독소를 꽂아 넣은 어깻죽지가 아려왔다. 이제 웬만한 물질이 아니면 아프지 않았지만, 주사를 맞을 때만큼은 지독했다. 종호는 십 년 전의 그 날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때, 왜 어머니는 여상이를 먼저 데려간 걸까. 그 애가 막았더라면 쫓아오는 사람들을 밀어버리고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가끔 드는 이런 생각들은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형제를 시기하는 것은 못된 일이었지만, 평생을 이곳에 갇혀 실험당하다 보니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딱딱한 침대 위로 쓰러지듯이 누웠다. 오늘도 탈출할 구멍은 안 보였다. 나갈 수는 있는 걸까.
그날 이후로, 백 명의 실험체는 99개가 되었다. 그리고 연구소는 더 깊은 지하로 파고들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구조의, 전혀 다른 위치. 이제는 어머니가 종호를 구하러 와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잠이 들려는 찰나, 종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이명 소리. 처음에는 실험의 여파인 줄 알았는데...
삐이-! 삐이!
사이렌 소리였다.
###
어떻게 도망친 건지, 기억도 안 났다. 사이렌 소리, 십 년 전에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걸 알아채자마자 종호는 제 방의 철문을 부수고 나왔다.
연구소는 혼돈 그 자체였다. 풀려난 실험체들은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부 연구소에서 심어넣은 능력들을 갖추고 있었고, 제어장치가 풀린 이상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 보인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
강여상?
###
패배자. 비겁한 새끼. 형제의 피를 흘리고 살아남은 악마 자식.
연구소에서 실험체 51번, 이제는 강여상이라고 불리는 소년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전부 이런 식이었다.
그는 소심했다. 소심하고, 몸이 약했으며, 선천적인 능력조차 연구원들이 바랬던 것처럼 발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진짜' 51번이 아니었으니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어느 연구원의 실수였으니까.
51번은 원래, 52번과 마찬가지인 신체 강화 능력계의 실험체였다. 그렇게 유전자 배합이 되었었고, 그 자료를 얻고 조합에 성공할때 까지 연구소는 많은 난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완벽한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과정에서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그게 강여상이라는 변수였다.
한 명의 아이가 자라났어야 할 '모체'의 관 속에는 쌍둥이가 자라게 되었다. 그건 그 소중한 실험체와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떼어내기 어려워졌을 때쯤에야 발견됐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르지만, 아마 처음에 실수했던 연구원이 두려움에 숨겼던 것일지라. 결국 연구소는 사실을 알고서도 쌍둥이 아이를 제거할 수 없었다.
태어날 때 둘 중 하나가 죽겠지. 그럼 살아남은 아이를 실험체 51번에 배정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결론 지었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강여상은 생각보다 생명줄이 질겼다.
결국 태어난 건 원래의 완벽했던 실험체가 아니라, 유전적 결함이 있는 여상이였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생명체의 삶은 고단했다. 죽이기에는 아깝고, 살리기에는 가치가 없다. 새로운 51번 실험체는 딱 그 정도의 삶을 살았다.
어렸을 때 그는 같이 자라는 종호를 보고 힘들어했다. 종호는 연구원들이 바랬던 모든 것들을 이뤄낸 기적이었다. '실수'와 '기적'. 같이 커가면서도 그 차이가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지옥 같은 곳에 갇혀살기 바랬던 건 아니었다.
'패배자. 비겁한 새끼. 형제의 피를 흘리고 살아남은 악마 자식.'
'그리고, 도망자.'
###
“여상아... 괜찮은 거지?”
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다. 홍중이 형, 그 역시도 생각할 게 많을 텐데. 종호가 있는 의료실 옆에서 떠나지 못하는 여상이가 꽤 걱정되는 눈치였다.
“괜찮아요, 형. 그냥 너무 오랜만이라.”
사실 괜찮지 않았다.
여상은 그 어린 날, 제 등을 밀어낸 손길을 마지막으로 종호를 잊어야만 했다. 겨우 그를 데리고 도망친 어머니는 숨기에 급급했으며 그때는 힘도 강하지 않았던 여상이가 시설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괴로워하던 엄마는 여상이라 열일곱이 되는 해에 돌아가셨고, 여상은 혼자 그 죄를 짊어져야 했다.
버리고 떠난 동생과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98명의 형제. 그들을 구하기 위해 여상은 어머니가 남겨준 안식처를 떠났었고, 홍중이를 만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연구소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종호는 그곳에 살아 있었다.
홍중이가 떠나고, 여상은 혼자서 종호의 곁을 맴돌았다. 곧 깨어날 것 같다는 성화 형의 위로에 안심하면서도 불안해했다. 종호가 여상이에게 분노를 내뱉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종호를 놓친 건 여상이였으니까.
“...형.”
“...”
“여상이 형?”
봐라. 지금도, 그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하지 못한다.
“돌아왔네요.”
죄인은 말이 없다.
“엄마는?”
“...”
“돌아가셨어? 형도 참, 그 정도는 나도 예상했다고. 그래서 내가 없는 동안은 잘 살았어?”
“... 아니.”
여상은 저를 쳐다보는 종호의 눈을 겨우 마주 봤다. 그 눈에는 미움이 담겨있지는 않았지만, 공허함과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더 미안했다. 차라리 미워하는 거였다면.
“미워하지는 마.”
“누구를요? 형을?”
픽, 하고 웃은 종호가 고개를 저었다.
“미워하지는 않았는데, 엄마도 형도. 부럽긴 하더라.”
“이제는...”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렸을 때처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귀신같이 알아듣는 종호였다. 고개를 숙인 여상의 손목을 쥔 종호가 잠시, 조용히 그 맥박을 쟀다.
“살아있다니, 픽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형, 부러워했던 거... 아니 솔직히는 시기했던 거... 한 번에 없어지진 않아. 나는 매일을 그곳에서 그 생각만 했다고.”
그러니까 형.
악마로 자라난 인간은 거침없었다. 친형처럼 컸었어도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건, 그래.
“다음부턴 버리면 죽여버릴 거야, 알았지?”
- 기울어진 태양 2편, 막 -
“야, 여상이는 어때 보였어?”
산이 방문을 나서자마자 다가온 우영이가 물었다. 방금 전 종호랑 딱 붙어서 잠들어 있는 여상이를 보고 나온 길인데, 여상을 거의 지 남편 챙기듯 챙기는 우영을 보자니 속이 더부룩했다. 이 남자는 왜 그렇게 그에게 집착할까. 어렵다.
“피곤하대. 그럴 만도 하지 않냐, 방금 동생 되찾았는데.”
“동생 맞아?”
인상을 찡그리트린 우영은 어딘가 심통이 나 있었다. 참 깨물고 싶게 생긴 남자다.
“동생 아니어도 넌 상관없잖아. 종호 이제 호적상 내 동생인데, 여상이랑 붙어 다니든 말든.”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말한 산은 마른세수를 벅벅 했다.
“... 미안, 짜증 내려던 건 아닌데. 어쨌든 여상이나 종호 괴롭히지 말고 일로 와, 영아. 방 가자.”
“걔가 왜 네 동생인데?”
“신분증은 만들어야 하니깐 그런 거야. 이상한 생각 하면 혼난다.”
슬금슬금 허리를 감아오는 우영의 팔 때문에 답답했지만, 산은 그대로 냅뒀다. 피곤한 하루라 그런가.
“... 그래, 들어가자.”
바로 어제 고쳤는데도 연구소 하나 폭파했다고 위태위태한 비행선이 조금씩 흔들렸다. 두 사람은 잠시 바깥의 바람 소리를 듣더니, 아무 말 없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오늘도, 일루젼 호 식구들의 평온한 밤이 되기를.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