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된 거야.
복개
이복형제, 정우영 최 산.
* 욕설이 섞여있습니다.
오후 한 시가 지나갈 무렵이었다.
친숙하지만은 않은 비료 냄새가 맡아진다. 우영은 차가운 바람에 코가 빨개졌다. 따뜻한 옷보다는 자신의 가오를 살릴 수 있는 옷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언제와도 후진 곳은 후져. 그지? 있는 건 논밖에 없는 시골에 우영의 아버지가 산다. 그리고 그의 이복형제 산도, 그곳에 산다. 행복했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갉아먹었던 기억이 공존하는 이 모순의 공간에 우영은 제 발로 걸어왔다. 아버지가 부고를 앞두고 있다는 메시지가 사, 오 년 동안 외면했던 우영의 마음을 한방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우영의 눈에 자신이 열여덟까지 살았던 커다란 저택이 비친다. 온통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저택. 그 앞에 커다란 공원. 그곳은 부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돈이 새빠지게 많은 곳이었다.
- 시발, 진짜.
우영은 손톱을 잘게 물어뜯으며 옛날 옛적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산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메모지에 또박또박 내 생각을 적어나갔던 그때까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매번 피할 수 있는 건 아닌가봐, 종호야. 우영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우영의 옆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종호는 우영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고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는 듯 얘기를 꺼냈다. 형 똥 밟았어요. 또, 또. 알겠어. 말 안 할게 됐냐? 우영은 종호가 자신의 말을 그만 듣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그래, 남의 과거회상을 누가 즐거워하겠어. 그 과거회상을 듣고 있을 바에 책 한 장을 더 읽겠다. 우영은 종호에게 꼰대 같았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던 참에 종호는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 다가오지 마요. 진짜 묻었다니까?
- 뭐래, 진짜.
종호의 행동에 눈썹을 찌푸린 우영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시선을 꺾어 확인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번들번들 반짝였던 자신의 구두에 언제부터인지 똥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영이 굉장히 아끼는 고가의 검은색 구두에 강아지 똥이 묻은 것이었다. 존나 비싼 건데 개빡치게. 우영은 한숨을 푹 쉬며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놓은 채 짝다리를 짚었다. 그리고 자신 앞에 멀어져가는 강아지를 째려본다.
- 그러니까 여기 오지 말자고 제가 누누이 말했잖아요.
왜 오고 나서 지랄이에요, 예? 우영에게 핀잔을 주는 종호가 인상을 구긴 채 지랄 맞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우영도 그런 자신이 싫은지 되도 않는 화를 버럭 내더니 우두커니 세워져있는 정문 기둥에 다가가서 자신의 신발을 신경질적이게 박박 비빈다. 와, 야. 대리석이라 그런지 존나 잘 지워져. 대박이지. 자신의 룸메이트이자 하늘같은 대학교 학과 대표가 반쯤 미쳐서는 뭔 이상한 논리나 읊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장인의 정신으로 쌓은 성이 한숨에 무너지는 것처럼 암담했다. 아니, 밥 먹으러 가쟀잖아. 여기가 그 밥 먹는 곳이야? 나 이 형이 이렇게 욕 잘 하는지 오늘 처음 알았어. 그동안 어떻게 참았대. 완벽함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대선배님 우영이 사실은 개눈깔이나 뜨면서 기둥에 욕바가지 실컷 내뱉는 양아치인 사실을 종호는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 우영에게 깍듯이 대했던 전의 종호와는 달리 지금의 종호는 잔소리나 해대며 텃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종호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자신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서 빈둥거리기나 하는 우영에게 핀잔을 준다.
- 형, 지금 1시에요. 1시까지 가는 거라며.
짜증 반, 울음 반인 우영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그 어떤 미동조차 없다. 머릿골에 누가 못을 박아 넣고 있는지 슬슬 두가 아파져 온다. 아, 신경성 두통인가. 예전 자신이 살았던 동네 유명한 백수처럼 꼼지락대기만 하는 우영을 보던 종호는 그 모습에 속이 터졌다. 싫증이 난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우영을 강제로 끌고 간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된 거야.
종호는 우영이와 함께 저택 마당에 위치한 공원으로 향한다. 공원을 쓱- 훑어보기만 해도 억 소리 나는 장식들과 조각들이 그들을 반겨준다. 와, 이게 다 얼마야. 우영은 종호의 말을 가볍게 씹고 저택으로 향한다. 시골에 대리석이 웬 말이야. 우리 아빠 취향 진짜 개구리지 종호야. 조각들도, 볼품없어. 종호는 구린내 나는 신발과 함께 걷는 우영의 폼이 안쓰럽다고 생각한다. 이젠 정신도 나갔는지 동공에 초점이 맞지도 않아요. 정신 차려요, 이 사람아. 너 지금 니네 아빠 유언 들으러 왔어요. 라고 혀 밑에서부터 튀어나오기 일보직전이다.
- 너! 너, 이 새끼. 나 지금 깔보는 거지! 맞지!
종호는 웬만한 웨이트 트레이닝보다 버둥거리는 우영을 들쳐 업고 저택으로 가는 것이 더욱 더 고되었다. 종호는 자신의 손과 팔이 얼얼하다는 것을 느꼈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우영을 놓고 싶었다. 그때, 우영은 종호의 품을 뿌리치고 조각 앞으로 가서는 보석들에게 소리쳤다. 심술이 한껏 꼬인 그는 진열되어있는 조각들에 박힌 보석들이 자신을 깔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또 정신 나간 소리를 실없이 하고 있다. 옆에서 지켜보던 종호는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무력으로 우영을 다시 끌고 간다.
오후 세 시. 저택에 거주하는 집사가 종호와 우영을 맞이해준 게 바로 전 일인 것 같은데,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종호는 거실에서 우영이가 소개해준 사 억 쇼파에 누워 숨을 고른다. 우영이 그의 아버지를 잠깐 살피고 온다며 거실 쇼파에 앉아있으라 했기에 종호는 순순히 우영의 말을 따랐다. 그냥 따라갈 걸. 종호는 가만히 앉아있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벽에 있는 무늬 수를 세어보기도 하고, 장식들이 얼마 정도 될까 어림 잡아보기도 한다.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것들 천지인 이 저택을 종호는 이렇게 생각했다. 조온나 갑부네. 중소기업 회장인 어머니와 벤처 기업 CEO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종호 집에도 있을 법한 것들이 몇몇 있었지만 이만큼 값이 나가 보이는 것들은 처음이었다. 아니, 쇼파 하나에 사 억 이래 미친 거 아냐?
종호는 이번 기회에 사 억 쇼파의 질감을 잔뜩 느끼고 가자며 면 감을 잔뜩 쓰다듬는다. 점점 종호의 눈이 풀린다. 종호는 아린 바깥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우영을 챙겼기 때문에 지금은 무척 피로했다. 폭신한 쇼파에 누운 채 그의 시야에 비치는 난로를 바라본다. 난로 안,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속삭임이 종호에겐 자장가나 다름없었다. 노곤한 종호에게 피로가 몰려온다. 종호는 눈을 스르륵 감았다.
- 누구세요?
우영이는 아닌데, 친군가. 혹시 애인? 포근한 꿈을 꾸는 것도 잠시 종호는 인기척에 눈을 뜬다. 목소리가 형은 아닌데. 종호는 손으로 눈을 비비다 앞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본다. 하얀 피부에 대비되는 새카만 머리, 예쁜 보조개.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홀릴 것 같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우영이 형, 대학 후배요. 그쪽은요?
- 좋게 말하면 가족? 나쁘게 말하면 그 새끼 때문에 인생 조진 놈?
종호는 미간을 구긴다.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해. 잠에서 깬 직후라서 그런지 종호는 모든 것이 짜증났다. 그 남자는 히죽 웃는다. 쏙- 들어가는 보조개에 넋이 나간 종호는 마음 한 편으로 빨리 우영이 왔으면 하고 바랐다. 내가 졸던 동안 저 뱀이 날 꽉 조여 놨나봐. 그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종호에게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 최 산, 뭐 하는 거야.
종호는 제 3자의 인기척에 매우 기뻤다. 우영인 것 같았다. 산이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종호는 그것보단 우영이 너무 보고 싶었다. 산의 눈빛이 자신을 조인다고 느꼈기에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우영도 이를 눈치 챘는지 다음에 보자며 종호를 얼른 보내준다. 종호는 대충 인사를 하곤 그 저택을 빠져나간다. 저택 입구를 빠져나온 직후 종호는 저택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뱀 구렁이 소굴. 종호는 저 저택엔 역겨운 내가 진동한다고 생각한다. 저택을 응시하던 종호는 우영에게 한 개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 산이라는 사람, 좀 이상한 것 같아. 조심해.
종호가 나간 뒤 우영은 산을 쳐다본다. 산도 우영을 쳐다본다. 침묵이 흐른다. 길고도 긴 침묵. 우영과 산은 그런 침묵에 동요되지 않는다. 계속,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뿐이다. 사 년, 오 년인가. 우영과 산은 길면 긴 그 공백이 있었냐는 듯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았고, 그 공백 동안 자신들의 기억엔 서로의 향으로 가득차있었다.
- 안녕, 개새끼야.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냈어? 영아, 넌 나 버리고 떠나놓고서 잘 살았나봐. 난 죽고 싶었는데. 노을이 지고 있다. 유리창이 매혹적인 적색들을 머금고 천장에 달려있는 샹들리에는 역동적인 빛의 움직임을 탐하는지 자신의 것이라고 우긴다. 나와 최 산. 우리가 함께 있는 공간은 유리창 덕분에 주황빛으로 물들여진다. 최 산은 날 가만히 보고 있다. 굶주린 괴물이 먹이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눈이었다. 같잖은 겁 때문에 상기된 어깨, 아득바득 씹은 어금니가 아리다.
- 어, 존나 잘 지냈어.
왜, 내가 너 버렸다고 힘들어했을 거 같아? 아니? 조올라 잘 지냈어. 산이의 얼굴이 참 낯설다. 십몇 년을 항상 같이 붙어 지냈는데 몇 년이 지나니 얼굴이 매우 달라 보인다. 산이의 눈엔 그동안의 나에 대한 역함이 서려있다. 그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날 바라본다. 그렇게 노려봐서 뭐 할 건데. 뒤틀린 속을 잡아 뜯고 싶다. 뭔지 모를 이 감정은 내 심장을 옭아맸고 내 목을 조여 온다.
- 니 새끼는, 사람도 아냐.
최 산의 눈물이 눈에서 뚝뚝 떨어진다. 아, 그래. 내가 네 우는 그 표정에 유독 약했지. 아무렴, 너의 그 망할 보석 같은 눈물이 날 매마르게 한다. 어서 가서 그 예쁜 최 산의 눈물을 닦아줘야지. 귀에서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은 행동들이 나도 모르게 나가진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차려 정우영, 저 새끼 일부러 저러는 거야. 아까와는 사뭇 다른 속삭임에 넘어간 나는 최 산을 더욱 더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 시발, 나보고 어쩌라고.
매번 죽일 듯이 때리는 새끼, 돈에 눈이 먼 니 엄마 그리고 항상 날 집어삼킬 듯 바라봤던 너. 내가 뭘 더했어야 돼? 내가 더 맞았어야 되는 거야? 반 죽더라도 너희 엄마한테 그 돈 쪼가리라도 바쳤어야 되는 거냐고. 난 너랑 있는 시간과 너를 사랑했지만 널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날 죽였어. 매번 삼켰던 감정이 북받쳐 올라온다. 안 그래도 집으로 다시 들어오라는 아빠 새끼 때문에 미치겠는데 진심으로 돌게 한다, 최 산.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밖에 생각을 못하는 건지 생각이 짧은 건지. 어느 방향이라도 난 산이가 밉다. 난 네가 좋아서 내 몸까지 희생했는데 알아봐주지 않는 네가 미웠고 지금도 미워. 죽을 때까지 이 비밀을 지키자는 내 스스로의 약속이, 오늘 밤 깨졌다.
- 최 산, 너도 날 죽였고.
최 산의 커진 눈이 흔들린다. 이제 내가 왜 이 망할 곳을 싫어하는지 알겠어? 내가 왜 이 망할 곳을 탈출했는지 아냐고. 내 말을 끝으로 우리에겐 커다란 재앙이 찾아왔다. 말하지 못 했고 꺼내지 못 했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얼음장같이 얼어버린 이곳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내일 아침이 되어야 말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지쳤다. 빨리 잠이나 자고 싶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다. 우리의 관계도 이렇게 끝맺음이 나는 걸까. 복잡해지는 머리를 싸매고 나는 침대에 눕기로 했다. 주황빛의 하늘이 날 내려다본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던 나만의 비밀을 보고 비웃는 듯 했다.
-
- 엄마가 많이 미안해.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엄마는 말도 안 되는 변명과 함께 이 저택에서 도망쳤다. 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말이다. 그때 내 나이는 열여덟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에야 말하는 거지만 엄마, 엄마도 잘 뒤지시길 바랄게요. 하늘나라에서 가족 데이트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우영도 마찬가지. 난 그 새끼가 이 세상에서 제일로 싫다. 한 때는 우리 둘만이라도 친했던 때가. 아니, 서로밖에 없던 때가 있었지만 말이다.
- 산아, 난 크면 너랑 살 거야.
이 집에서 나가서 너랑 재밌게 살 거야. 어렸을 땐 옷장에 들어가서 저택이 아닌 다른 곳의 삶을 상상해본 적이 많았다. 옷장은 우리의 꿈이었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우리만의 매개체였으니까. 타의적으로 엄마를 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밖에 없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두고서 가출을 할 생각? 할 수 없었다.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을 구해 우리를 끌고 집안에 들이려고 했을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는 지독히도 강압적인 폭군이었다. 난 그런 폭군과 있는 모든 시간을 증오와 맞바꿨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는 듯 내비쳐지는 언행이 나를 옭아맸고 날 버리고 떠난 정우영을 증오했다.
정우영에 대한 증오가 점차 커졌다. 달콤한 말로 내 생각을 훔쳤고 자기 의지대로가지고 놀다가 날 버렸다.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쓰레기 버리듯 내던져졌다는 말이다. 열여덟을 먹은 해까지만 해도 우영이, 정우영은 나와 함께 하는 미래를 펼치곤 했는데. 지금의 정우영과는 전혀 하고 싶지 않다. 역겹고 더러우니까. 지금 생각하면 같잖지만 그땐 정말 정우영 그 새끼가 날 구원하리라 믿었다. 나의 구원자라고 믿었다.
- 언제까지 반복할건데.
그냥 나랑 같이 살면 안 돼? 재혼을 수백 번 반복하는 엄마, 남에게 의지하기만을 기다리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기다렸던 쓰레기들. 난 정말 지쳤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한 번만 믿어달라고 빌기까지 했던 엄마와 결혼이라는 족쇄에 대해 관심도 없었던 나는 예쁘장하게 생긴 내 또래 남자아이와 함께 사는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아저씨였으니까. 우리 엄마랑 띠동갑보다 더 나이가 많았다. 엄마가 정말 남자 고르는 능력이 없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난 첫 자리에서 아저씨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했다. 반반한 외모로 꽃중년이란 타이틀이 아깝지 않았다. 깔끔한 옷매무새, 정돈된 눈썹과 머리, 이상한 버릇은 보이지 않았으며 매너 또한 완벽했다. 오히려 거슬리는 것은 나랑 비슷한 또래인 아이였다.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건지, 아까부터 계속 날 보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꼴 보기 싫다, 정말.
그런 이상한 아이를 엄마는 어이없게도 자그마한 동물 대하듯 다뤘다. 아마도 아저씨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거겠지. 정우영이란 아이가 정말 예쁜 탓도 있기야 있다. 옷이며 머리며 다듬고 자르고, 마치 가공되어있는 보석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엄마의 노력조차 싫은 정우영은 버릇없이 엄마를 대했다. 반말도 찍찍 쓰고 툭하면 울고불고 화내고 짜증내고. 개또라이가 아닌가 생각도 해봤다. 어떻게 키우면 저런 성격이 나오는 걸까 분석도 해봤지만 아쉽게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아이와 가족처럼 같이 지내야 된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 격에 맞는 애를 데리고 오던가. 누가 보면 주워온 줄 알겠어.
- 그래서 우영이는 취미가 뭐야?
-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엄마는 정우영과 친해지고 싶었는지 정우영을 만났을 때부터 걔에 대한 칭찬과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반달이 되도록 웃어 보이며 나한테는 하지도 않던 코웃음을 쳐댔다. 친엄마도 아니면서 챙겨주는 척은. 눈꼴 시리게. 정우영은 의자에 한껏 기대앉으며 엄마를 역겹게 쏘아봤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싫어도 그건 아니지 않나? 도가 지나친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든가 안 어울리게 비꼬는 행위가 내 심기를 건드렸다.
- 니 뭐라고 씨부렸냐, 지금?
고급 진 레스토랑, 포근한 조명들과 보기만 해도 군침 나는 스테이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엄마를 비꼬는데 어떻게 눈뜨고 편히 볼 수 있겠는가. 나도 한 마디 하고 싶었다. 니가 뭔데 울 엄마한테 지랄이야. 멱살을 잡고 반쯤 죽여 놓고 싶기도 했다.. 그 전에도 죽을 만큼 억울한 순간이 있었고, 한이 서릴 만큼 짜증날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사람을 죽이고 싶은 욕구는 처음이었다. 주먹을 불끈 쥔 채 정우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재수 없는 새끼.
가오도 적당히 부리는 거야, 예의 없는 새끼야. 정우영은 표정 변화도 없고, 시큰둥한 얼굴에 오히려 내가 낸 짜증을 반겼다. 마치 갓난 애기의 첫울음소리를 들은 것처럼 정우영은 내 목소리에 행복해했다. 내가 내지른 큰 소리로 깜짝 놀라거나 미동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정우영은 자신이 피해자인 듯 날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마치 새하얀 장미에 구정물이 엉겨 붙은 것과 같았다.
예쁜데, 싫다.
그게 정우영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고 다시 만난 그때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정우영이 나보고 내가 마음에 든다며 날 달래주기 전까지 말이다.
엄마와 아저씨는 만난지 한 달 만에 식을 올렸다. 내가 아무리 더 만나보라고 해도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고, 답답한 마음에 탈선을 해도 엄마는 날 보지 않았다. 아저씨와 활활 불타는 사랑을 하고 있었는지 난 안중에도 없던 게 확실했다. 그럴수록 난 엄마가 미워졌고, 아저씨도 꼴 보기 싫었다. 어느새 내 옆자리에서 핸드폰이나 만지고 있던 싹바가지 정우영에게 문득 묻고 싶었다. 내가 비정상인 걸까? 행복과 웃음이 넘쳐야할 식장에도 가식적인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꽉꽉 채워진 것 같아 내 속이 비틀어졌다. 메스꺼워. 열여섯의 나이, 이 모든 상황을 버티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았다. 시끄러운 목소리,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한스럽게 우는 아기 그리고 이상하게 역겨웠던 그 좁은 공간의 공기들. 고름이 부풀어 오르다가 터지듯 난 결혼식장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나는 곧바로 식장 뒤편에 있는 쓰레기 소각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내가 느꼈던 역겨움과 속에 있는 찌꺼기들을 토해냈다. 내장이 고통스럽다며 몸부림쳤다. 심장의 움직임은 빨라졌고 탓할 사람 없는 억울함을 풀고 싶었다. 자꾸만 고이는 눈물이 내 시야를 가렸다.
- 야.
왜 울어, 바보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영, 정우영이었다. 핸드폰을 하는가 싶더니 내 눈칠 봤던 걸까. 너 또 나한테 지랄할 거면 저리 가. 나 지금 상태 안 좋으니까. 정우영은 가지고 온 휴지로 내 입가를 닦아주었고 그제야 난 후드득 눈물을 떨어뜨렸다. 소리 내어 엉엉 울 기력도 없었다. 그냥, 순식간에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정우영은 한숨을 쉬며 날 가엽게 바라보았고, 내게 손을 뻗어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난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그를 잡아끌었다.
- 나, 네가 생각할 정도로 그런 개쓰레기 새끼는 아니야.
정우영은 입을 열려는지 다물려는지, 입술을 계속 뻐끔거렸다. 기는 목소리 때문에 잘 들리진 않지만 대충 내용은 이랬다. 아줌마랑 아빠 일은 생각하지 말고 나만 생각해. 나도 너만 생각할 테니까. 난 너 마음에 들어. 정우영은 내 등을 따뜻하게 두들겨주며 나를 위로했다. 뭐 하나 같은 점은 없고 모난 것만 닮은 둘, 똑같은 연례복을 입은 둘이 이젠 서로에게 서로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우린 결혼식 이후, 거대한 저택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엔 싱숭생숭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가족이 하나 더 생기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우리 집과 하인들, 그리고 날라 다니는 지폐까지. 멋진 것들이 아주 많았다. 나는 아저씨의 재력이 마음에 들었으며 처음으로 행복했고 완벽했다. 정우영이란 흠만 빼면 말이다. 결혼식 때 날 위로해준 아이여도 한 번 또라이는 영원한 개또라이다.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이 안 갔고, 그렇기에 난 정우영과의 겸상에 치를 떨었다. 정우영과 함께 식탁에 앉는 상황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배정되었던 중학교 3학년, 새학기 때도 우린 서로를 피해 다녔다. 정우영이 싫은 이유는 셀 수 없었다. 특히, 정우영이 오묘한 눈빛으로 손톱을 뜯으며 나를 볼 때. 알 수 없는 기분이 날 잠식하는 그때, 그 느낌은 소름 돋을 정도로 별로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이었다. 시험기간. 심하게 잠이 쏟아져왔던 나는, 밖에서 사온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내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내 방 맞은편인 정우영 방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분명 정우영 목소린데. 가기 싫어. 시험도 며칠 안 남았고 수행도 많은데.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점점 가야하는 이유를 집어삼켰다. 뭐 예쁘다고 내 시간을 걔한테 낭비해.
그래도 자꾸만 드는 생각은 작아질 줄 몰랐다. 인생은 기브 엔 테이크, 주고받기잖아. 이제 나도 줄 차례 아닌가. 뒤죽박죽 섞이는 생각들이 내 짜증을 돋운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넘기며 하얀색으로 페인트 칠 된 정우영의 방문을 바라보다가 그 방 문고리를 열어젖혔다. 그래, 정우영이니까, 가는 거야.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광경은 매우 처참했다. 내 짐작대로 울고 있는 우영이가 있었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잔뜩 엎어져있는 책과 책상 위에 있어야 할 소품들, 특히 정우영 취향인 피규어들이 책상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나있던 것이다. 차가운 달빛은 이불 속에 파묻힌 정우영을 비추었다. 달빛 덕분에 소리없이 떨어지는 그의 눈물은 조그만 크리스탈 보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정우영이 오늘따라 애처로워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그의 곁으로 가서 내 품을 내주었다. 울음 때문인지 뜨겁게 달아오른 정우영은 이번에도 나에게 돌을 던진다. 꺼져. 이딴 동정 필요 없어. 그럴 줄 알았지. 쓸데없이 나에게 가시를 돋우는 정우영한테 한마디 했다.
- 닥쳐 새끼야, 받으라고 할 때 받아.
그리고는 정우영을 토닥였다. 들썩이는 그의 어깨는 점점 가라앉았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서글프게 울었을까. 내 어깨가 젖어 들어갔고 정우영은 날 꼭 안았다.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정우영은 말했다.
- 아빠, 그 새끼가, 나 팔아버린대.
친아들이 나보다 네가 더 좋아서 씨발, 보육원에 처넣겠대. 정우영은 울분을 토했고 그때 정우영에게 향했던 나의 모난 울타리가 부모님한테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다독여주고 싶었다. 훌쩍이는 정우영은 말을 이었다. 자기가 태어나고부터 방치했다고. 쓰레기 새끼 죽여 버려야한다고. 그제서야 알았다. 원래부터 모든 게 서투른 아이였구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놈이었다. 아, 씨. 자장가라도 불러줘야 하나.
- 괜찮을 거야. 울지 마.
나 있잖아, 너 나만 볼 거라며. 조금 느리게 정우영을 토닥였다. 심하게 들썩거리던 정우영의 어깨는 점차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우영은 자신이 내게 안겨 울었다는 사실이 쪽팔리다며 놀리면 죽여 버릴 거랬다. 웃겨, 정작 지는 엉엉 울면서.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다. 밝게 비치는 달빛은 서로의 얼굴을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정우영의 젖은 속눈썹이 참 예뻤다. 정우영의 눈동자에 달이 비췄다, 예뻤다.
쪽팔렸다. 최 산, 너한테 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다독이는 손과 품이 날 간지럽혔다. 이런 건 너한테 내가 해주는 거야, 등신아. 네가 뭔데 날 다독여. 혼자 머릿속으로 이런 말들을 곱씹었다. 난 최 산에게 안기면서도 그 말들을 그의 귓구멍에 때려 넣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짜증나지만 나는 그에게 처음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날 진심으로 대해줬으니까. 나는 내가 아는 제일 좋은 표현으로 산에게 내 감정을 표현했다. 그 뽀얀 입술에, 퍽이나 어울리는 붉은 입술에 내 입을 맞췄다.
- 최 산, 뭐 해.
숙제하지. 그의 미간이 구겨진다. 으, 그딴 거 하지 마. 재미도 없는 거. 나랑 놀자, 응? 정우영은 내 손을 끌었다. 어두웠던 그날 밤처럼 달게 날 바라보며 말했다. 정우영은 그 이후로 날 정말 잘 따랐다. 처음에는 그런 정우영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우영은 내게 욕하는 빈도가 줄었고 날 좋아했다. 나도 정우영을 좋아했다. 학교 숙제 때문에 책상에 앉은 날이면 그는 항상 옆에서 턱을 괴고 가만히 날 바라본다. 그 예쁜 속눈썹이 날 향해있다. 참, 예쁘다.
그 다음날 저녁, 난 아버지께 정우영은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며 그를 내쫓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 부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날 밤 나와 정우영, 우린 기쁨의 환호를 함께했다. 정우영을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던 나의 부탁이 의심스러웠는지 아버지는 나와 그의 사이를 관찰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 산아 눈 꼭 감구 있어.
한 번은 정우영이 나에게 멋있는 걸 보여주겠다며 눈을 감아달라고 부탁했다. 정우영은 정말 깜짝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고 싶었는지 그의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나는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정우영의 걸음에 나를 맞췄다. 일 층으로 내려가서, 오른쪽, 직진 그리고 커다란 문. 정우영은 또, 다른 작은 문을 열었고 들어오라며 날 잡아끌었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어두컴컴하고 공기가 잘 순환되지 않는 비좁은 곳에서 우영이는 작은 조명 하나를 켰다. 그리고는 말했다.
- 우리들만의 작은 공간에 온 산이를 환영하며.
정우영은 내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날 바라보며 웃었다. 그의 웃음은 예쁜 벚꽃이 흐트러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아렸다. 여긴 우리들만의 공간이야. 여기선 아무거나 다 해도 돼, 아무도 우릴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아, 정우영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우선, 이 집을 나가서 햄버거를 먹어보고 싶어. 애들이 그러는데 엄청 맛있대. 아, 라면도. 소소한 우리의 바람과 상상이 하나씩 덧입혀져 순수함의 범벅인 소원 덩어리가 그곳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온갖 것들을 정우영과 함께했다.
- 산아, 난 크면 너랑 살 거야.
너랑 함께 있을 거고, 널 꼭 행복하게 해줄 거야. 정우영은 매번 옷장에서 나와 함께 살 거라는 바람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정우영과 같이 부모님의 시야에 벗어나서 살고 싶었다. 난 정우영과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소중히 했으니까. 난 정우영을 좋아했다.
신기하게도 정우영은 나에게만 자신의 달달함을 허용했다. 고양이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웃음과 밝음이 나에게만 닿았다. 언제나 그는 날 특별하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날 것의 정우영은 내 눈에 나타날 틈조차 주지 않았고 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난 그런 정우영이 좋았다. 그것이 사탕발린 독사과였더라도 그 독사과를 먹고 기꺼이 죽었을 정도로 난 정우영을 사랑했다.
- 나, 좀 길고 얇게 살아보려고.
너랑 오랫동안 같이 있게. 정우영과 친해지고 난 후 크게 바뀐 것 하나가 있다면 놀아달라고 고집부리는 것밖에 모르던 정우영이 나랑 함께 있을 거라는 명목 하나로 그동안 훑어보지도 않던 회사 경영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찢어짐의 원인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때만큼은 정우영이 자랑스러웠다. 때문에 아버지와 단둘이 회사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우리만의 시간이 짧아지게 되기도 했으나, 좋은 게 좋은 거지. 정우영에게 좋은 건 나에게도 좋은 거라며 매일 9시 50분 쯤, 드레스 룸에서 커다란 긴 문을 열고 날 구원해줄 구원자가 오길 바랐다.
- 산 속엔 우리만 있는 거야.
작은 오두막에서 단둘이 예쁘게 사는 거지. 우리들만의 상상의 궁전, 거기서는 아무도 우릴 건드리지 못 했다. 정우영과 난 열여덟 살이 되는 해에도 그 옷장을 좋아했다. 보통의 옷장보다는 조금 더 큰 그 옷장에서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옷장 속 구겨진 옷들에 따라 우리의 교복 셔츠도 구겨졌다. 우린 그 구겨짐을 좋아했다. 서로의 숨이 닿는 그 간격이 너무나도 좋았다. 우영이는 나에게 장난으로 뽀뽀를 해주기도 했다. 어쩔 땐, 내가 그의 입술에 뽀뽀를 하기도 했다. 정말 좋았다.
하지만 행복한 천국의 시간은 곧 막을 내려야 했다. 나는 점점 늦게 오는 정우영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고, 정우영은 재미없는 수업시간을 버텨내야했다. 무사히 돌아와 나와 함께 옷장에서 재미나게 노는 일들은 줄었고, 출처가 불분명한 상처들이 정우영을 감쌌다. 걱정되는 마음에 정우영에게 물어보았지만 정우영은 상처들에 대해 묵인했다. 그리고 나에게 눈가리개를 씌우기 시작했다. 정우영은 나에게 상상하기 더 쉬워질 거라고 선물했지만 그의 상처에 대해 그만 얘기해달라는 무언의 메시지인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심술이 난 나는 그때부터 상처에 대해 물어보지 않기로 했고, 그에 대한 불신만 커졌다.
- 최 산.
나 싫어하면 안 돼. 나 미워하지 마. 환상적인 무대가 끝나고 커튼이 닫히기 직전. 밤이 다 되도록 정우영을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끝끝내 옷장에 들어가서 눈가리개를 쓴 채 숫자를 세던 나는 오백 언저리쯤에 숫자 세기를 멈출 수 있었다. 벌컥, 옷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정우영은 아무 말 없이 날 안았다. 눈가리개를 벗을 세도 없이 그는 내게 스킨십을 쏟아냈다. 그리고 깍지를 끼고는 내 손을 그의 입에 가져다대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 날은 정우영이 유난히 우울감에 잠겼던 날이었고 아버지와의 수업에서 늦게 온 날이었다. 우영이가 눈물을 흘리는 것도 같았다. 장롱 안에서의 눈물은 금세 우리를 감싸는 공기들을 젖게 했고 나 또한 먹먹함이 피어올랐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정우영을 위해 숨겨왔던 내 마지막 목소리를 알릴 차례라고 생각했다.
- 영아.
나 너 좋아해. 아, 이게 아닌가. 정우영, 나 네가 좋아.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들었는지 몰랐다. 그냥 너의 모든 것이 좋고 사랑해.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영아. 나름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봐.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우수수 떨어진다. 촉촉이 젖어 들어가던 정우영은 내 말에 조금 놀라는 것 같더니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도 치는 듯 울분을 토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앞에 있는 아리따운 산이가, 너무 불쌍했고 우리의 처지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문드러져있었다. 어느새 눈에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나왔다.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추질 않았다. 그런데도 날 좋아한다는 최산의 고백에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근데 어떡해, 산아. 우린 곧 역겨움에 잠식해 죽어버릴 거야. 너도 나도, 본질을 잃고 쾌락에 빠져 질식할 거야. 창대한 부는 역겨움을 낳고 그 역겨움으로 내가 태어났다. 열여덟 해밖에 살지 않았지만 난 내 삶이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느꼈다. 정확히, 난 내 삶에 회의감이 들었다. 우리에겐 서로가 있었지만 그만큼 서로의 부재는 처참했음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기인했으니까. 역겨운 내가 진동한 이곳에서 나는 간헐적으로 맡아지는 향수가 아닌 지속적인 방출구가 필요했다. 나에겐 방출구가, 필요했다.
- 우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분명히 우는 것 같은데 정우영의 얼굴엔 웃음이 스며들었기도 하다. 광기 어린 울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항상 내가 탐욕 해왔던 너조차 내 손으로 산산조각 내버린 것 같았다. 그러게,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옷장에서만 해야 했던 상상, 아버지 아래에서 목각인형들처럼 움직이는 우리 그리고 결혼하고 한 달 후 우리에게 관심은 무슨 찾지도 않는 엄마.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가족은 정말 난장판이었다. 그래도 난 네가 있어서 버텨. 너만이 내 구원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 했다. 그런 말이라도 했으면 지금의 결과와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조금 사그라든 정우영의 울음에 난 조심스럽게 그의 볼을 쓸었다. 이제 괜찮아졌어? 들어가서 잘까? 주인을 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처럼 정우영에게 물었다. 정우영은 그러자며 내 손을 파고들었다가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을 포개었다. 내 볼을 잡아끌어 진득이 뽀뽀하던 정우영은 옷장의 문을 열고는 평소엔 죽어라 잡지 않던 손을 다시 맞잡았다.
- 잘 있어.
보고 싶을 거야. 우리는 서로의 방 앞에서 서로의 이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궁창 같은 저택에서의 유일한 단내, 나의 구원 어쩌면 서로의 구원이었을지도 모르니까. 끝내 난 정우영이 고한 이별에 멍청하게도 수긍 했다. 잘 자, 정우영. 사랑해. 우영이는 날 앞으로 보지 못 할 사람처럼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이래, 내일 볼 거면서. 툭 던진 내 말에 평소와 다름없이 웃어야할 정우영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고민이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냥 정우영을 믿어주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다.
방에 들어와서는 정우영과 맞잡은 손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의 얼굴을 한 정우영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뭘까, 그 표정. 내 고백이 그렇게도 싫었나. 아, 나 아직 고백 답도 못 들어봤지. 머릿속에 계속 맴돌던 생각은 씻고 난 후 포근한 잠자리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시린 겨울바람으로 얼어붙었던 내 몸을 따듯한 이불 안에서 녹이고 있을 때, 미처 듣지 못 한 내 고백의 결말을 문득 알고 싶어졌다. 그 대답을 듣겠다고, 기어코 기어 나와서는 정우영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았다, 뭐지. 방 안에 들어온 건 불과 10분 전인데, 정우영이 잠이 많은 아이는 아니란 걸 난 알고 있었다. 뭔가 뒤숭숭한 나의 직감이 안 좋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방문을 열었고, 한 순간 극락에서 나락으로 던져 짓밟아졌음을, 나는 느꼈다.
- 씨발
씨발, 씨발, 씨발. 훤히 열려있는 정우영의 옷장들. 무수히 많은 캐리어 중 가장 큰 캐리어는 사라져있었고, 정우영이 목숨같이 아끼는 악세사리와 시계의 케이스는 강도가 지나간 듯 텅 비어져있었다. 나에게 그 장소는 혼돈이나 다름없었다. 눈물이 나올 생각은커녕 정우영에게 뒤통수를 야구배트로 쾅 하고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항상 널 바라봤던 올곧은 내 시선이 무너졌다. 시린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에 정우영의 형체가 아른거렸다.
우영은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그 우뚝 솟은 정문을 당당하게 통과했다. 밝고 따뜻하지만 화려한 가식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저 지긋지긋한 저택을 그는 혐오했다. 잘 지내, 돈벌레들아. 다음에 만나면, 낯대가리 들이밀지도 마. 역겹잖아. 우영은 마음 한 편, 진득하게 눌러 붙어있는 불순물들을 씻겨 내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산의 방에 시선을 고정한 우영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종이에 연습처럼 썼던 말을 되새긴다.
- 산아, 있지.
- 내가 만약 없어지면, 날 탓해.
그냥, 날 탓해줘, 산아. 다음날, 정우영을 전담으로 일했던 집사가 나에게 찾아와서는 흰 종이에 삐뚤빼뚤하게 적힌 메모를 전달해주었다. 정말, 끝까지 비참하게 해. 난 그 메모를 읽은 즉시 그것을 불 태워버렸다. 그 재로 인해 정우영이 슬퍼하길 바랐다. 정우영의 부재로 난 삶의 의욕을 잃었다. 나만의 태양, 나만의 구원자였던 네가 날 버리고 갔다. 네가 날 죽였다.
정우영이 가출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어마 무시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정우영에 대한 아버지의 충격으로 잠잠하던 병세가 악화되었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엄마는 아버지와 날 버리고 떠났다. 피폐해진 내 마음은 부서지고 있었다.
구정물 범벅인 흰 장미꽃, 난 그것을 불태웠다. 불태워야만 했다.
-
어슴푸레한 달빛은 커튼으로 새어나와 내게 닿는다. 시계를 보니 저녁 아홉시 오십 분쯤이었다. 습관적으로 드레스 룸에 갈 채비를 했다. 추억이라 해야 할지 습관이라 해야 할지 모를 행동이 이 저택에 오고 나서부턴 막 튀어나온다. 그래, 산이한테도 마찬가지. 어렸을 때와 같이 자꾸 모난 돌을 던진다. 내가 잘못 했는데, 자꾸 날이 서있는 듯한 말이 나온다.
최 산. 내 아픈 손가락. 사실 이 저택에 다시 돌아올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걔 때문이었다. 무서운 눈으로 날 바라볼 그가 감당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날 원한다며 눈에 불을 켜고 날 바라봤던 최 산이 이젠 어떤 모습으로 날 바라볼지 무서웠다. 이젠 날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너만이 남았지만.
-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작은 시곗바늘이 열 시를 가리킨다. 안되겠다. 드레스 룸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아까 그 말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니까, 사과 할 일은 사과 해야지. 이 층 계단을 지나 부엌을 지나 안방 왼쪽에 있는 기다란 문을 열었다. 수많은 종류의 옷장들. 우리는 이들 중에서 특히 하얗고 깨끗한 저 옷장을 좋아했다. 난 그 옷장의 문을 열었다. 역시, 산이가 그 좁은 공간에서 눈가리개를 끼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잠들어있는 산이가 너무 예뻤다. 최 산의 볼을 슬, 쓸었다. 나 때문에 울었는지 얼굴에 눈물자국이 보인다. 마음 아프게 왜 이러냐. 진짜. 산이가 좀 더 편히 잤으면 하는 마음에 그를 들어 그의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따뜻한 이불 속에 최 산을 넣었다. 눈 가리개가 그의 얼굴을 감고 있다. 이건 왜 아직까지 갖고 있는 거야. 이제 이거 필요 없어, 최 산. 그 가리개를 벗기고는 그의 이마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나는 널 탐욕 할 수 없는 자격을 가졌는데, 그런데도 자꾸만 널 탐욕 해. 너의 모든 걸 탐욕 해. 한 순간도 널 잊어본 적이 없어. 조그맣게 속삭인다. 그리고 최 산에게 언젠가 내가 집을 나왔어야만 했던 이유를, 언젠가 얘기해주고 싶었다. 꼭 말해주고 싶어. 그의 머리칼을 조금 넘겨주다, 밖으로 나왔다.
-
한가로운 일요일, 난 최 산과 함께 논 옆에 흐르는 조그마한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고난 후 거대한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와 머리를 말릴 때쯤이었다. 아버지는 그의 서재로 날 부르더니 수차례 뺨을 갈구고 우리의 묘한 관계에 대해 캐물었다. 난 그에 맞는 대답을 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목숨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갔을 테니까. 아버지는 곰곰이 생각하며 내게 물었다.
- 어린놈은 좀 맛있나?
순간적으로 난 그 새끼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뚫린 입이라고 막말하는 건가. 일부러 내 화를 돋으려는 걸까. 어떻게 저딴 생각을 하고 있지? 아들이 보아도 그의 아버지의 머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도 아닌 사탄도 울고 갈 놈. 그때부터 난 그 새끼를 아버지로 섬길 수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최 산을 주거나, 경영 수업 시간마다 맞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랬다. 고민하는 내 모습이 퍽이나 재밌어보였는지 아버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난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고, 최 산에겐 상처가 될 것이 틀림없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눈가리개를 씌워주게 되었다.
내가 집을 나왔던 그날 밤도 아버지는 날 매우 때렸다. 내가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바지에서부터 삐져나온 하얀 와이셔츠가 보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얻어터지고 난 후 바닥에 누워있는 내 꼴이 우스웠다. 이 상태로 가면 백퍼센트 산이한테 걸릴 텐데. 최 산에게 가야했지만 자꾸 눈이 감겼고, 숨쉬기 버거웠다. 체력적으로 바닥이 난 상태였다.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지만 겁쟁이인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가출, 집을 나가는 것이 다였다. 산이는 건들지 않을 거야. 아버지는 산이를 나보다 더 좋아하니까. 알 수 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최 산을 만나러 가는 도중, 억눌러왔던 울음이 터지듯 화장실에서 혼자 엉엉 울었고 산이와 함께 있는 그 옷장에서도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관심과 사랑이 필요할 열여덟 살이 선택한 최선의 결과가 가출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커다란 저택 안, 깨어있는 사람은 우영밖에 없는 이 밤. 우영은 깡 소주를 세 병째 들이켰다. 쓸데없는 과거 회상이나 하며 말이다. 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휘청거리는가 싶다가도 세상 제일 씩씩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이 층에 도착한 우영은 벽에다 대고 무어라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낮잠을 자고 나왔던 그 방이라기엔 뭔가 희한하게 다른 분위기였지만 우영은 잠이 필요했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붉은 두 볼이 보라색 침대보에 닿는다.
- 뭐야, 정우영.
술을 얼마만큼 퍼마신 거야, 미친 새끼야. 정우영은 커다란 술병에 다이빙이라도 하고 온 건지 그에게 술내가 진동했다. 내 머리까지 아파온다. 미친놈아 네 방가서 자. 내가 아무리 정우영에게 가라는 말을 해도 정우영은 듣지 않는다. 소리를 버럭 지르기 직전, 갑작스럽게 정우영은 내게로 파고들었다. 버둥거리면 버둥거릴수록 날 놓으려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이없다는 감정이 이렇게나 골 때리는 건지 처음 알았다. 뭐, 미안하다는 것 같긴 한데. 술 처먹은 꽐라 상태에선 듣기 싫을뿐더러 나한테 욕이나 했으면서 술이 잘 만 들어간 우영이에게 심술이 났다.
머리가 으깨지는 고통이 뇌를 파고들었다. 내가 종강 때도 이러진 않았을 텐데. 술기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울렁거리는 내 속을 애써 달래며 정신을 차린다.
- 잘 잤어, 우영아?
한껏 잠긴 목소리의 주인공은 산이었다. 뭐? 산이라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식은땀이 나온다. 그렇다, 난 예전의 내 방. 즉, 현재는 최 산의 방에서 잠이 들었던 거다. 정말 무섭게도 그의 옷은 침대 위쪽에 가지런히 벗겨져있었으며, 내 옷 또한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네가 일 한 번 제대로 쳤구나, 정우영. 엉엉 울고 싶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어제 너무 좋았어.
나도 네가 너무 좋아, 우영아. 분명 풀려있지만 짙은 쌍꺼풀이 돋보이는 눈이 날 바라본다. 오 년 전과 같이 산이는 날 바라보며 내 입술에 뽀뽀를 해준다. 꿈만 같았다. 너무 좋은데, 진짜 좋은데, 죄악을 지르는 기분이야.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산이에게 사실을 말해야했다. 술 처먹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말이다.
- 산아, 미안해.
술 때문에 넌 줄도 모르고 막, 막 했나봐 진짜 미안. 정신을 차려야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산이의 예쁜 눈매는 곧 축 처졌고, 난 그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야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나는 아침을 먹자며 밖으로 나가려는 최 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우리 뭐, 볼 것도 다 봤으니까. 마지막으로 내 얘기 좀 들어주면 안 되나. 난 그에게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나로 인해 갈라진 우리의 사이를 내가 다시 붙이긴 어렵겠지만 촉진제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내가 집을 나간 이유와 널 두고 갈 수 밖에 없던 이유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으며 마지막으로, 한 번도 널 잊지 않은 적이 없다는 뭐 그런, 자질구레한 얘기. 최 산은 관심 없다는듯 싶다가도 내 말에 귀기울여주었다. 나와 함께 분노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정말 미안하다는 내 말을 들은 최 산은 아무말 없이 날 안아주었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그 손길이 오래토록 그리웠다.
조용한 적막은 우릴 감싸올랐다. 최 산은 날카롭게 날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 네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개구라인자도 모르고 발발 기는 우영의 모습이 참 웃겼다. 조금 통쾌하기도 했다. 사실 집에 있는 동안 정우영이 날 보고 발발 기고 어쩔 수 없어하는 모습이 너무 보고 싶었는데 잘 된 것 같았다. 오늘 하루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방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정우영은 날 붙잡았다.
우리 둘 사이 꼭 풀어야 할 문제를 정우영이 제시한 것이다. 예상치도 못한 사실이 날 때렸다. 생각보다 심했던 폭력에 눈물이 고였다. 썩을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절대 용서 못 하고 하고 싶지도 않은 정우영의 상황을 들으니 곤혹스러웠다. 나는 정우영을 째려보며 정적을 깨트렸다. 그동안 혼자 끙끙 앓았을 네 모습이 참 가여워, 영아. 네가 가정폭력을 당한다는 사실도 완전히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 내 잘못 또한 인정할게. 그렇다고 날 버린 이유는 납득이 되지 않아. 말을 안 한 이유도 그렇고. 나랑 같이, 이 망할 곳을 빠져나갔어야지. 너무 이기적 이었어 너. 모든 정황들이 맞아들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 혼자 그 많은 것을 짊어지고 살았던 건가. 널 탓하라며, 그래서 한 번 지독하게 탓해 봤는데, 이미 죽은 사람 얼굴에 총구를 박아 장전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우린 너무 어렸고 우리를 감싼 환경들은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었으니까. 우린 돈에 눈이 멀고, 이익에 눈이 먼 어른들에게 우리의 삶을 빼앗긴 것뿐이었다. 정우영은 날 또렷이 바라본다. 널 보는 나의 역한 눈길이, 가여운 눈길로 변하는 그 과정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더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싫지만 예뻤으니까.
- 응, 그래서 내가 그 새끼한테 복수하려고.
울 아빠 제명에 못 살게 내가 한 번 크게 조져놓으려고. 산이의 품속에 들어간 채 이야기를 꺼냈다. 이 집에서 가출하기 훨씬 전, 수업이 마친 뒤 나는 우연히 아버지 안방에서 여러 개의 장부들을 발견했다.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는 시대에 누가 장부를 쓰겠는가. 그건 비리가 가득 담긴 장부가 틀림없었다. 그 장부, 방송국에 뿌리려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회장 그리고 그 회장이 십몇 년 간 모아온 자신의 비리 기록서. 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총구를 자신의 낯대가리에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길 바랐다. 그리고 공개적인 개망신을 당하길 나는 바랐다.
독하디 독한 정우영의 발언이 내 심장을 짓눌렀다. 아버지 아래에서 놀아나야했던 과거의 우리는, 오늘 그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정했다. 우린 함께 아버지의 안방으로 향했다. 저택 가장 안 쪽, 우리의 옷장 옆 커다란 문 앞. 우리는 그 커다란 문에 억눌려지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손이 차가워진다. 미세하게 떠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아버지의 심박수는 모순적이게도 내의 심장을 쾅쾅 뛰게 만들었다. 아버지에게 내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우리는 잠자는 아버지 몰래 그 장부를 찾기로 했다. 예전엔 잘 만 보이던 그 장부가 지금은 이상하게도 잘 보이지 않는다.
- 얘들아.
뭔 짓거리를 꾸미고 있는 거니. 갈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버지였다. 주무시는 것 같았는데 언제인지 일어나서는 우릴 지독하게 노려보고 있다. 아버지를 바라보기만 해도 금방 일어나 날 죽이려 뛰어올 것 같았다. 문 밖에서 했던 나의 다짐은 내 온 몸과 함께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허튼 짓 하는 거면 용서 안 한다. 쩍쩍 갈라지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스산한 분위기에 공포감을 추가하게 했다. 내가 너무 아버지를 얕봤나보다. 떨리는 손은 주체가 안 된지 오래다. 아버지. 저, 그게. 숨이 턱 막힌다. 속이 갑갑하다. 심장을 움켜쥐고 입을 열어본다.
- 아버지가 행동했던 수많은 악행들.
하나도 빠짐없이 싹 다 긁어모아서 형벌로 돌려주려고요.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럴 줄 알았다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니까지껏들이 감히 애비를 모욕해? 아버지는 주변에 있는 모든 책들과 찻잔들 모조리 쓸어 던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가빠져온다. 투명한 액체들이 내 시야를 가린다. 난 아무 짓도 하지 못 한 채 좌절만 했다.
니 새끼 콩밥 처맥이려고 장부 찾는데 뭐. 불만 있어요? 삐딱하게 서서는 역한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는 최 산이 거칠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 방에 있는 모든 서랍을 꺼내어 던졌다. 용서는 우리가 해야지 네가 왜 거들먹거려. 사람대접도 받으면 안 되는 새끼가. 최 산은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너 죽지 못하게 어떻게든 살려내서 평생 후회하게 만들 거야. 하얗게 샌 머리로 무릎 꿇게 해서 싹싹 빌게 할 거야. 처음 보는 최 산의 눈빛은 강렬했다. 아버지에 대한 적의가 한 눈에 보였다.
최 산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아버지에게 화를 냈다. 끝까지 지 잘못은 모르는 새끼라며 아버지의 말을 들은 채도 않았다. 장부를 찾는 최 산은 마지막 남은 하나의 금고를 남겨두고 있었다. 분명히 여기에 들어있겠지. 산은 아버지에게 한 번 더 욕을 꽂아 내리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도 그를 따라 나가려는데, 아버지가 내게 나직이 말을 했다.
- 최 산이 네 곁에 영원히 있을까? 글쎄 네 애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시끄러워요. 입만 살아선.
나한테 이제, 니 같은 아버지는 없어요. 정신 차려요. 수년 동안 참고 살아왔던 체증이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평생 외로이 썩어가길 바라요. 당신은 그럴 값어치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 마지막을 끝으로 평생 아버지를 볼 일이 없길 바란다. 그 얼굴, 이젠 보기도 싫다. 바깥에서 산이가 날 기다렸나 보다. 최 산은 금고 함을 소중히 들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금고 함을 방송국에 넘겼고 집에서 요양을 선택했던 아버지를 병원에 이송시켰다. 이제 완벽히 나와 최 산 우리 둘만 남았다.
그 일이 있고난 뒤 아버지는 온 국민에게 수치를 당했다. 희게 샌 머리의 노인네가 자신에게 터지는 불빛들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처지를 보니 나름 통쾌했다. 아버지는 징역 10년의 선고를 받았고, 감옥 안에서 삶을 마무리 할 것으로 보였다. 대중매체의 의견도 나와 동일했다. 재판에 출석해야했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간단한 신상이 까발려졌고 용기 있는 아들들의 복수극이었다며 기자들과 정치인들은 우리를 높이 세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내게로 따라온 재산과 회사 결정권 문제로 며칠간 골머리를 싸매야했다.
- 회사 결정권을 포기하겠습니다.
우리의 결정으로 이사회는 난리가 났다. 근데 뭐, 어떡해. 평생 혐오해오던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될까봐 무서운 감정이 컸고 우린 역사를 반복할 것이 뻔했다. 뻔한 결말과 강압적이고 자유로움에서 벗어난 우리의 처지를 벗어나고 싶었다.
단시간 안에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우리는 피곤에 찌들었다. 특히, 나는 더 그랬다. 최 산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부터 어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아예 우리 가족사를 파볼 작정이었다. 기레기 새끼들. 쓸데없는 질문은 존나 많아요. 그럴 시간에 나는 잠이나 자고 싶었다. 내 방에서 잠깐 눈을 붙이지 않으면 내가 최 산보다 먼저 골로 갈 것 같았다. 눈꺼풀이 무겁다. 고개가 기우뚱해진다. 몽롱한 기운이 감돈다.
잠시 후, 최 산처럼 보이는 남자가, 내 품에 안겨든다. 몽글하고 미묘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난 그를 꽉 안는다. 머리카락을 쓸다가 이마에 입술을 맞춘다. 잠결에도 산이에 대한 내 마음이 나타나는지 심장이 빨라지는 것도 같다.
내 감정에 대해 잘 모르겠다. 그냥 오늘 밤 정우영과 함께 잠들고 싶은 욕구가 든다. 나는 곧바로 정우영의 방으로 향했고 침대에 누워 조는 정우영 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하다. 그리웠던 정우영의 품이다. 난 그의 가슴팍에 안긴다. 그리고 이어 말한다.
- 영아. 사실.
- 너랑 나랑 잤다는 거 개구라다.
그래도 난 네가 좋아. 어떡하지. 다시 봤을 때도 난 네가 좋아서 미치는 줄 알았어. 죽고 싶기도 했는데 잊을 수도 없고, 뭐. 암튼 그래.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성격장애가 아닌가 생각해봤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서. 정우영의 가슴팍에 내 얼굴을 비빈다. 정우영 냄새, 몽글한 그의 냄새가 맡아 진다. 솔솔, 졸음이 몰려온다.
그 다음 날, 우린 한가하게 일어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어나 하루의 시작을 최산으로 한다. 누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산이와 함께 아침을 챙겼고 오 년 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나눴다. 지금은 여유롭게 티비를 보고 있다. 그런데 자꾸만 산이는 내 허벅지를 꼭 베고 티비를 보겠단다. 귀찮다고 밀어내도 자꾸 위로 올라온다. 왜 자꾸 올라와.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 티비를 바라보는 최 산이 신경 쓰인다. 길게 뻗은 하얀 다리, 훤히 들어난 배. 난 손을 내 입 속에 넣고 손톱을 잘근잘근 깨문다. 오독오독, 최 산을 보면 자꾸 손톱을 물어뜯게 된다.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들어 내 상태를 확인한다. 산이의 머리칼이 내 이마에 닿음을 느꼈다. 심지어 최 산의 숨까지도 내 살결에 닿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난 내 손톱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었고 결국 입 속엔 비릿한 피 비린 향이 퍼졌다. 당황한 마음에 최 산을 밀어내고는 손 상태를 확인한다.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빨았다. 비릿한 피 비린내가 입안에 훅 들어왔다. 따가워. 입속으로 흘러들어오는 피를 빨아먹는다.
산이를 탐욕 한다는 증거일까. 그를 보며 손톱을 깨문다.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최 산의 시선이 나를 자극한다.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 손톱은 망가진다. 그를 탐욕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최 산은 계속 내 손을 주시하고 있다. 최 산은 이내 내 손을 자신의 입에 넣고 빨기 시작한다. 야, 내 피 더러워. 뱉어 빨리. 당황함에 빨리 뱉으라고 소리쳤다. 최 산은 아예 자리를 잡으려는 듯 내 무릎 위에 앉아서 날 바라보고 있다. 그는 다른 내 손을 자신의 속살에 가져다대고 한 번 더 나에게 물었다.
- 진짜? 하지 마?
산이의 행동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눈을 감은 상태로 내 손을 구석구석 제 입안으로 욱여넣어 빨고 있다. 대놓고 섹스어필이야? 대충 찢어진 살갗의 피가 아물었을 즈음 난 내 손을 그의 입에서 빼내었다. 그리고는 그의 뒷목과 볼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말랑한 산이의 혀가 맞물린다.
- 우영아, 나 듣고 싶은 거 있어.
오래 전 내 고백의 대답. 듣고 싶어. 내 입술을 물던 최 산은 갑자기 내 볼을 움켜쥐며 말을 했다. 너 좋아해, 정우영.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너를 사랑해. 최 산은 예쁘게 웃으면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웃을 때 나오는 보조개가 참 예쁘다. 나는 산이의 입술에 한 번, 입을 맞춘 뒤 말을 했다.
- 나도 너 좋아하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넌 내 첫사랑이었고 그 후로도 너만 바라봤어. 난 산이에게 미루고 미뤘던 고백의 대답을 했다. 산이는 내 대답을 들은 후 미소를 지으며 입을 맞춰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힘들게 하는 것들도 없고 힘들 이유도 이젠 없어. 나와 최 산, 우리 둘은 영원히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산이와 함께 다른 곳에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하자고 마음먹었다. 망할 뱀 소굴, 역겨운 가식들의 향연인 악몽의 집, 다시 들어가나 봐라. 부모님들의 재산 절반은 사회에 기부를 할 것이며 그 절반은 가지고 떠날 거다. 최산과 난 이제 상상으로만 했던 둘의 소원을 마음껏 이룰 것이다.
- 안녕히 계세요, 돈벌레들아.
다음 생에 낯대가리 보이면 바로 죽여 버릴 테니까 머리 조심하시고요. 집도 세를 내놓았다. 이제 완전히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 어른들의 탐욕에 망쳐진 아이들은 서로를 탐욕 했고, 마침내 서로를 얻게 되었다. 우리에겐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했으며 그만큼 많이 아파했으니까. 이젠 행복한 우리의 삶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