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끗 차이
존윈
우영과 여상이 일찍 하교하는 겨울이면 다섯 시 반쯤부터 노을이 졌다. 하늘은 가끔 분홍빛이 됐다. 우영은 건물 외벽이 어스름을 입어 같은 빛을 띠는 게 좋았다. 나란히 걷는 여상의 얼굴에도 그 빛이 씌어졌는데, 분홍색 물감을 칠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가 기울며 여상의 속눈썹의 그림자가 눈 깜빡임과 같이 움직이는 게 마음을 뻐근하게 했다. 여상은 꼭 우영의 오른편으로만 걸어서 우영은 그의 왼 얼굴만 보고 걸었다. 우영은 저녁이 깊어갈수록 진해지는 친구 볼의 흉터를 볼 수 있었다. 가끔 그 흉터를 검지로 슬면 여상은 늘 같은 시간 동안 멈춰 섰다가 우영을 봤다. 우영은 여상의 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이 얼빠진 바보 같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평생 직접 볼 수 없다는 게 소름 돋는다던데, 우영은 자신의 눈에 비치는 여상을 상상하면 소름이 돋기보다는 어느 한켠이 울렁거렸다.
우영이 여상에게 연애를 제안하면, 그는 "너 좋을 대로"라고 답했다. 우영은 이런 순간마저 주도권을 놓는 여상이 야속했다. 우영은 서로의 첫사랑은 서로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처음을 약속했다. 처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지루하다지만, 여상에게만큼은 얼마든지 지루해도 된다고 여겼다. 여상도 여기에 동의해주길 바랐다.
*
우영의 대회가 시작됐다. 우영은 스케이트 날로 빙판을 가를 때마다 여상을 생각했다. 여상은 5년 전 단 하루 외에는 우영의 경기를 보러 오지 않았다. 우영만큼의 집중을 가진 적이 없었다. 한때는 경기를 보러 와달라고 빌었는데, 이제는 포기가 편했다.
“교통카드 잘 챙기고.” 우영이 말했다.
“그래.”
“너 목 좀 나갔더라. 목도리 챙기고.”
“가끔 니가 날 낳은 것 같애.”
“뭐래. 이상한 놈 따라가지 말고.”
“잘생겼으면 생각해볼게.”
“따라가지 마.”
여상이 웃었다. 우영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여상은 누구든 거부할 수 있다. 우영만 곁에 있다면. 그래서 우영은 길을 잃을 수 없었다. 여상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게. 아니, 어디든 가지 못하게 자리를 지켜야 했다.
*
여상과 산의 첫 만남은 우영에게 들켜선 안 될 결을 가졌다. 여상은 5년 전 그날 말고도 우영의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럴 뻔했던 때가 있다. 작년에 어떤 대회의 날짜를 알아보고 갔더니, 우영이 출전하는 대회가 아니었다. 그가 같은 학교의 누군가에게 출전권을 빼앗긴 대회였다. 두 시간 걸려 간 태릉이었다. 시작이라는 꽃말을 담은 꽃다발이 손 한가득 남아있었다. 성질이 벌어진 일은 후회하지 말자는 편이라 끝까지 경기를 지켜봤다.
종목은 매스 스타트였다. 맨 뒤 어딘가에 다른 선수들보다 체구가 작은 선수가 준비 자세를 취했다. 여상은 스피드스케이팅도 키가 커야 유리하다던 우영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선수는 우영의 것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우영이랑 별 차이도 안 나 보이는데, 얼마나 잘하길래. 여상은 생각했다. 여상이 모난 마음을 가진다면 우영이 연관됐을 때뿐이었다.
페이스메이커도 없이 선두를 차지한 그가 1위로 결승을 마무리했다. 여상은 금빛의 표시 옆에, 우영의 이름이 있어야 할 곳에 그의 이름이 자리한 게 탐탁지 않다고 생각해야 했다. 여상은 10분 남짓한 경기가 찰나 같다 느꼈지만, 착각이라 여겼다. 저 애는 우영이가 없던 사람인 양 올라섰어. 여상이 꽃다발을 세게 쥐자 포장지가 흉하게 구겨졌다. 산은 담남색 유니폼의 지퍼를 열고 링크를 누볐다. 여상은 유독 자신의 앞을 맴도는 산의 목덜미에 시선을 얽었다.
얼핏 산의 얼굴이 스쳤다. 여상은 얕은 잠에서 깨 몸을 일으켰다. 발끝부터 밀려오는 저릿함이 여상을 덮쳤다. 이불을 쥔 손에 핏줄이 돋았다. 빙상장에서의 고요한 소란을 떠올렸다. 다리가 꼬였다. 몸 어느 곳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가쁜 숨을 톺았다. 처음으로 자신을 잠식한 욕정이 우영을 향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모멸감을 느꼈다. 내 감정의 주인이 내가 아닌 것 같아. 달뜬 몸은 멋대로 울컥거리는 감각 탓에 식지 못했다. 붉어진 눈시울이 터질 것 같을 때쯤 어딘가의 열기도 터진 듯했다. 여상은 끈적해진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시끄러운 곤란에 잠겼다.
*
“안녕?” 산이 말을 걸었다.
“어, 안녕.”
“오늘은 정우영이랑 안 붙어있네.”
“우영이 오늘부터 체전 가서. 근데 너 누구야?”
“나 몰라? 진짜?”
“응, 몰라. 나 이거 외워야 하는데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
“너 나 봤잖아 작년에. 되게 야했는데 눈빛.”
여상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뾰족하게 웃는 산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나가서 얘기하자.” 여상이 겨우 말뭉치를 뱉어냈다.
산이 따라오라는 고갯짓을 했고 여상이 곧 뒤를 따랐다. 자신이 걷는 줄도 모르고 걷던 여상이 도착한 곳은 라커룸이었다.
“최산. 맞지?”
“응 맞아 여상아.”
“그럼 나 할 말 할게. 너가 아까 무슨 의도로 그런 말 한 건진 모르겠는데. 난 그냥 그날 우영이 경기인 줄 알고 착각해서 갔던 거야. 진짜, 정말로, 아무 뜻 없이, 1등 했으니까 본 거….”
“그럼 왜 따라왔어?”
“…뭐?”
“아무 뜻 없던 게 맞으면 아까 복도에서 얘기하지 왜 여기서 해명하냐구.”
“….”
“미안, 좀 몰아붙였지. 마음이 좀 급해서. 나 너한테 제안할 거 있어.”
“뭔데?”
“정우영 없는 동안 나랑 놀자. 딱 걔 없는 동안만.”
“겨우 그거?”
“고백할 것도 있어.”
*
고백할 게 있다던 산은 여상이 경기에 왔던 날 밤을 읊었다. 자려고 해도 관객석의 그 얼굴이 떠올랐고, 참을 수 없는 뜨거운 게 밀려왔고, 자기 손으로 열기를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여상은 홀린 듯 “근데 나도 그랬어”라 답했다. 산에게는 거짓말을 하려는 시도부터 들킨다고 생각했다. 발끝에서 일렁이던 파도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자신을 억눌러주는 언어는 무용지물이었다.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 없는 말이 혀에 올랐다. 여상이 산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그래 놀자. 우영이 없을 동안만.”이라고 말했다.
“눕혀줘.”
“여상아, 너 존나 귀엽다.”
둘은 ‘놀다’라는 말의 사전 외적인 함의에 별다른 소통 없이도 합의했다. 산은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여상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여상의 상체를 훑는 손이 사나웠다.
“무슨 말 들으면서 하는 거 좋아해? 사랑한다고 해줄까?” 산이 물었다.
“사랑은 필요 없고. 너 말고 나 사랑해줄 애는 따로 있어.”
짧은 문답이 오가고 여상과 산은 숨소리만으로 라커룸을 채웠다. 빈 사물함에 부딪힌 소리가 그들의 주위로 날카롭게 떨어졌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여상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산의 손을 겹쳐 잡고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산이 자신에게 무게를 싣자 그의 목에 매달려 우영에겐 비밀이란 말을 반복했다.
*
우영이 돌아왔다. 여상 혼자 하교하는 저녁이었다. 우영의 대회는 3일 동안 열렸는데, 우영은 떠나며 4일 후 학교에서 보자고 했다. 노래를 들으며 집 앞 골목을 걷던 여상이 눈앞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일 학교에서 볼 우영이었다. 벌써 왔냐며 우영을 안는 여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우영이 여상을 졸라 둘은 근처 카페로 갔다. 우영은 평소보다 반응이 풍부한 여상이 불안했다. 금메달을 목에 걸어도 잘했네, 하며 어깨를 툭 치던 여상이었다. 우영은 아까의 포옹을 떠올리며 불투명한 웃음을 지었다. 진동벨이 울리자 여상이 일어섰다. 우영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여상이 있던 의자를 바라보며 톡, 톡, 소리를 이어갔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고민이 잇따랐다. 트레이를 든 여상이 돌아오자 그는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여상을 바라보는데, 카페의 조도 낮은 조명이 여상의 셔츠 깃 안을 비췄다. 멍 비슷한 자국이 얼룩덜룩했다. 우영이 다시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없이 가라앉으면서도 어딘가 텅 비는 기분이었다. 우영은 그거 멍이냐고, 싸우기라도 했냐고, 사실은 뭐냐고 캐물을 수 없었다.
“별일 없었지?” 우영이 무수한 질문을 삼키고 물었다.
“응. 없었어.” 여상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우영이 경청을 좋아하는 여상에게 이번 경기 이야기를 했다. 여상이 히터가 갑갑했는지 셔츠 단추를 풀었다. 우영은 말이 이어지지 않아 머리를 헝클였다. 여상은 소매 안으로도 자국을 매달고 있었다. 애써 여상과 눈을 맞춰도 시선은 다시 그의 목 언저리와 손목으로 떨어졌다. 묻고 싶었다. 혹시 처음은 나랑 하기로 한 그걸 다른 사람과 했냐고. 우영은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여상이 시인하는 것. 여상이 거짓말하는 것. 여상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여상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고를 수 없었다.
“너 울어?”
여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영은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여상이 당황하며 휴지를 찾았다. 은메달도 잘한 거라는 여상의 말에 우영은 새는 웃음소리를 냈다.
“여상아.”
“응 우영아.”
“너 다른 누구, 아니 내가, 아니, 너, 나 사랑할 거야?”
“어?”
우영이 말을 마치고 다시 울기 시작해 여상은 답할 수 없었다. 우영이 학교를 비운 사흘간 여상은 매일 라커룸을 찾았다. 산이 먼저 그를 찾을 때도 있었고, 여상이 스스로 산을 찾아갈 때도 있었다. 여상은 자신이 실체가 없는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먹고 먹히는 관계는 여상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었다. 우영과 했던 약속대로, 사랑을 나눈다는 행위는 우영과 하는 게 처음이 될 거라고 자신을 달랬다.
여상은 난 너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 번의 추임새도 넣지 않고 우영의 물음에 답했어야 했다. 호흡으로 띄어지는 한순간도 아까웠다. 내 마음은 띄엄띄엄하지 않은데. 한 칸의 침묵이 쌓여 우영이 자신을 오해할까 봐 두려웠다.
*
우영이 학교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채우자 여상은 거짓말처럼 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대단한 사랑이 뭐길래. 한번 흔들면 간단하게 무너지면서. 산은 생각했다. 사흘 동안 그에게 여상은 손 닿는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여상은 우영이 출전권을 딴 것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했냐고 물었다. 글쎄. 그렇게 치졸한 마음은 아니었다. 먼저를 따지자면 작년 그 대회 이후로 우영을 데리러 오는 여상을 본 것이었다. 우영과 여상의 서로를 보는 눈이 비슷했다. 수시로 얽히는 그들의 시선을 지켜봤다. 다른 어떤 것도 담고 싶지 않은 눈이었다. 산이 웃었다. 여상의 눈이 자신을 향했던 것처럼 뜨겁게 날카롭지 않았다.
흥밋거리가 될 줄 알았다. 우영을 향한 그의 마음을 사흘만 희석해보고 싶었다. 욕구도 상대가 있으면 마음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애착이었다. 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여상의 빈틈 없는 마음이 여상에 대한 산의 애착을 키웠다.
*
“야. 여상이 봤어? 앞에서 기다린댔는데.”
“아까 최산이랑 창고 가는 거 같던데?”
“걔랑? 왜?”
“몰라. 최산이 뭐 도와달라고 하더라.”
여상이가 도울 게 뭐가 있지? 왜 운동하는 애도 아닌 애를? 둘이 어떻게 알지? 꼬리를 무는 생각 위로 여상의 목덜미가 떠올랐다. 우영은 이 생각의 교차가 우연일지 고민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탁, 탁 발소리가 목을 옥죄는 것 같았다. 깜빡이는 조명 아래 남은 둘을 상상했다. 일면식도 없는 둘의 처음이 언제일지 그렸다. 숨이 찼다. 우영이 창고 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일부러 다른 애들이 듣게 말했다. 산은 여상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덧붙였다. 마지막이야. 시험에 든 여상의 표정이 재밌었다. 여상이 순순히 창고로 따라왔다. 우영이 기다리니까 빨리하고 나가자고 말했다. 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욕구에 잡아먹힌 여상의 눈은, 우영을 볼 때와는 판이하게, 할딱이는 것 같았다.
산을 등진 여상이 바닥을 짚고 몸을 움직였다. 산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산이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옅어져 가는 자국 위로 새로운 붉은 원을 남겼다. 여상이 바르작거렸다. 산은 여상이 욕망에 잠기는 게, 그리고 그게 자신으로부터 촉발됐다는 게 즐거웠다. 정우영, 빨리 와. 산이 생각했다.
문고리가 헛도는 소리가 들렸다. 여상은 앓는 소리를 내다가, 그 소리를 듣고 버둥댔다. 여상이 놓아 달라고 애원했다. 산은 그를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여전히 여상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문이 열렸다. 여상에게는 문이 열리는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산은 우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가는 게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산은 뒷걸음질을 치는 우영의 표정과 자신을 등진 여상의 표정이 같을 걸 생각하니 짜릿했다. 산이 속삭였다. “우영이 왔네.” 우영이 입을 벙긋거리더니 뒤 돌아 나가는 게 보였다. 여상이 몸을 떨었다.
“악마 새끼…. 알고 있었지.” 젖은 여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욕하니까 섹시하다.”
“너는 악마야.”
“내가 왜 악마야 여상아. 신이지 너한테는.”
여상이 옷을 추스르고 뛰쳐나갔다. 무너져 우는 우영이 보였다. 우영은 창고를 뒤로하며 가장 먼저 여상과 예전처럼 만나지 못할 경우를 걱정했다. 그게 우영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도망친다고 해서 여상에게서 아예 달아나려는 건 아니었다. 여상이 오해할까 봐 두려웠다. 여상에게 뒷모습조차 보이지 못하면 그와의 관계는 오해가 전부인 관계로 끝날 것 같았다. 더는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우영은 사실 처음이 아니라, 끝을 여상과 함께하길 바랐단 걸 깨달았다.
"우영아…."
"…나왔어?"
"나도 이런 내가 실망스러워."
여상은, 그래도 된다면, 지금부터 다시 처음을 만들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울지 말라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너에게 돌아가고 네가 내게 돌아오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