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게 들렸다가 쿵 내려 앉아
사랑의 관계는 딱 두 종류만 존재한다.
마음이 무거워 아래에 있거나, 혹은 가벼워 위로 뜨거나.
마음은 아래로 내려앉고
빠앙
청춘은 앞만 보고 뒤는 살피지 않는다 했다. 앞만 보기도 힘든데 뒤를 봐 무엇하나. 감정에 충실히, 순간에 집중하기. 인생은 늘 뛰어가야 하는 법이다. 특권을 지녔다면 더더욱 앞만 봐야지. 뒤를 보는 것은 잃을 게 많은 부족한 자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전신이 보이는 길다란 거울 앞에서 홍중은 맨몸으로 똑바로 섰다가, 뒤로 돌았다가 몸을 반만 틀어 제 등을 보며 피어난 꽃의 개수를 셌다. 새빨갛고 유독 봉오리가 커다란 모란이 하나, 둘 셋. 감탄을 자아내는 모양새였다. 모란은 유독 그 꽃이 피어난 크기가 큰 꽃이라 맨 처음 꽃을 본 홍중은 피어난 모란을 보고 겉으로야 별거 아니네 했지만 내심 자신의 꽃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의 속에는 제 꽃과 나무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이 피어올랐고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외로 이어졌다.
가지 끝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의미 있던 시절은 이미 발랑 까졌던 어린 시절 다 지나갔다. 등에 피어나는 꽃이라는 것에는 힘이 있었고 제 꿀통, 그 속에는 저보다 어린 주제에 한사코 운명 어쩌구 하던 어린놈도 두셋 있었고 저 없이 못산다던 나잇값 못하는 놈도 두셋 있었지만 가질수록 욕심이 커진다더니 그 사이에 성화가 없는 것이 홍중은 못내 아쉬웠다. 몸에 꽃이 피는 사람 중에서도 흰끼 도는 갈색의 윤택한 나무를 품은 홍중은 스테먼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꽤나 먹히는 쪽이었지만 그게 유별난 박성화에게 아무 힘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홍중은 전전긍긍하는 박성화가 필요했다.
조금 더 내게 매달려봐.
코가 막혔나, 눈이 감겼나? 그도 저도 아니면 고자일 게 분명하다. 조금만 더 넘어오면 그 선인데 그 넘어옴을 실행하지 않는다. 발간 머리와 하얀 몸에 피어난 더 빨갛거나 노랗거나 하얀 꽃을 보고 돌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성화를 처음 만난 것은 17살 교실에서였으니까 지금은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동안 그의 손끝은 저를 향한 적도, 제 살결을 한번쯤 쓰담아 보지도 않는 무색무취의 것이었다. 꽃을 피우지도 못하는 평범하기에 이를 데 없는 사람인 주제에 주제넘게도 욕구하는 것이 없는 척을 하며 어딘가 제 앞에 한발자국씩 거슬리는 자욱을 남겼다.
17살 박성화는 당연한 듯 남의 자리에 다리까지 꼬고 앉아 있는 김홍중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목소리는 하나도 떨림 없이 낮게.
"김홍중, 여기 내 자리야."
"그래서 뭐?"
어이 없이 벙쪄 앉은 채로 성화의 얼굴을 길게 바라보다 눈을 굴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 짓는다 단언할 수 있는 꽃같이 어여쁜 얼굴을 드밀었지만 성화는 눈을 깔고 바라보다 시선을 돌릴 뿐 군더더기라고는 없다. 향까지 짙게 풀어도 하나도 바뀌지 않는 볼 위의 색에 주춤하며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가 주변 놈들의 얼굴에 떠오른 선명한 홍조를 보자 이대로 물러서는 건 김홍중 인생에 남을 창피한 일이라는 오기를 마음에 가득 담았다. 네까짓 게, 하는 비웃음을 한껏 담은 얼굴로 제 자리에 앉은 성화의 소매를 붙잡고 번호를 딸 때 희한하게 떨리던 손끝은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안 좋은가 보다는 예상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커다란 모란부터 시작해서 그 학교 꽃이란 꽃은 모두 다 등 뒤에 피웠을 때까지도 성화는 홍중에게 시선 한 켠도 주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게 무관심한건 네가 처음이야!' 하는 재벌집 아들내미의 마음으로 성화에게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은 동안 사실 홍중은 대충 세어도 손가락을 가뿐히 넘을만큼 제 옆을 갈아 치워 왔다. 성화를 갖고 싶은 것과 내 아름다운 나무에 꽃을 피우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지. 제 꽃들이 도덕성과 사랑을 운운하던 길고 지루한 시간, 난공불락. 그동안도 성화는 제게 눈길 한번 던져준 적이 없다. 없었다.
-내게?
하지만 알지, 성화의 곁에 가장 오래 머무른 이는 자신이다.
-결국은 내 향을 어떻게 잊을까.
변변한 애인 하나 옆에 끼지 못했던 성화는 저 말고는 아무에게도 이렇게까지 오래 곁을 내준 적은 없다. 아냐, 고작 눈길 한번도 비싼지 건넨 적 없다. 그뿐인가, 제가 피우는 꽃이 바뀔 때마다 그 감정 변화 없는 목석이 눈썹을 올렸다 내리고, 목이 멘다며 괜히 물이나 벌컥벌컥 마시는 걸 보아하니 꼴에 분명 거슬리는 거다.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 올라갔다 내려오는 눈썹에 입이라도 맞추며 매달리고 싶은 것을 애써 숨기며 등 뒤로 웃음을 넘겼다.
왠지 모르게 결국 성화가 늙어 죽을 때까지 옆에 있을 이는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니 몸이 짜릿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우위에 선,
우리가 시소에 탔다면 제가 틀림없이 저 위에 떠 있는 쪽일 것이다. 홍중은 이제 성화의 늘씬한 가슴팍이라던가, 제 몸을 꽉 끌어안아줄 팔뚝이라던지를 갖고 싶기보다는 그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아 징그럽게 피어난 채로 기억나는 한송이 꽃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홍중은 제가 큰 방을 쓰고 그 옆의 방을 성화가 쓰는 같은 집 안에서 유흥도 지겨워져 오랜만에 일찍 귀가한 가뿐한 몸을 이끌고 제 방 문을 열었다 그가 제 이름을 부르며 수음하는 것을 보았대도 소리 따위를 지르거나 깔깔 웃거나 성화의 뒤로 가 등을 쓸어 안는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소름에 오금이 저리기는 했지.
문을 다시 살짝 당겨 닫은 채로 홍중은 가슴팍을 부여잡고 영문 모를 한숨을 길게 쏟았다가 다시 주워담았다. 박성화가 뒤돌아 있을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침대 위가 뭐 그리 야한지. 제가 원한것을 갖는 기분이 이렇게 짜릿할 줄을 알았다면 진작 더 많이 탐을 내볼 것을 그랬다. 김홍중은 비로소 박성화를 가졌다는 생각을 한다. 시소 아래에 앉아, 위에 앉은 저를 목이 빠져라 쳐다보겠지. 그 눈을 바라보는 저는 이제 온전히 차오른 만족감에 다시금 몸을 떨게 될 것이다. 꽃을 피우고 싶은 욕망에 안달이 난 몸은 잠시 기다릴 여유를 느꼈다.
아껴두던 향은 더 감출 필요가 없었고 향은 마음껏 길 잃고 눈 먼 꽃들을 끌어당겨 제 등에다가 가져다 피웠다. 만개한 등을 지나 가지가 팔로 내려오도록 제가 꽃나무인 것을 만끽할 때쯤 성화는 자그만 반항의 표시인지 뭔지 홍중의 작은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등짝에 피어오른 꽃들의 향이 숨막히던 끈적이는 날이었다. 그 순간 홍중은 아무 향도 안나야 할 성화에게서 더럽게 지독한 향이 난다고 느꼈다. 금방 사라졌지만.
-그럴리가.
한 침대에 누워 성화에게 곁과 한쪽 팔을 내준 홍중에게서는 달디 단 새로 핀 꽃의 꿀내가 났다. 홍중은 제게도 느껴지는 향내에 코를 찌푸린 성화의 코 위 얕은 주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편 다음 작고 오만하게 입술 밖으로 내뱉었다.
"향이 너무 진해? 어쩔 수 없었어. 이번엔 작약인가 그랬거든. 꽃도 나 빨리 죽으라고 엄청 큰게, 향까지 죽이게 진해서 나도 욕 좀 해줬어. 좀 더 박박 닦을걸 그랬나."
무슨 말인가 하려고 벌어진 입술이 무겁게 닫혔다. 생전 제게 쓸데 없는 소리는 안하던 성화가 제 꽃을 쓰다듬으며 이게 끝까지 다 피어오르면 넌 죽는다고? 따위의 소리를 귓가에 흘려넣었기 때문이었다. 무심하게 응.하고 답하니 시무룩하게 구겨지기나 할 줄 알던 사랑을 주기만 하는 사람의 순애 어렸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더 말해선 안될 거란 경보가 울렸다. 입 밖으로 더 내뱉으면 무언가 잘못될 것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한번도 머리와 이성에 따라본 적 없던 꽃나무는 그냥 저질렀다.
-청춘은 앞만 보고 뒤는 살피지 않는다 했다. 앞만 보기도 힘든데 뒤를 봐 무엇하나. 감정에 충실히, 순간에 집중하기. 인생은 늘 뛰어가야 하는 법이다.
"그걸 왜 물어. 어차피 네 꽃은 평생을 가도 안 필텐데."
확인해보자.
뭘?
정말 꽃이 안피는지, 확인해보자고.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려놓았다가 들어올리는 박성화를 보자 다시 17살의 제가 떠올랐다. 제게 무심히 말하던 그를 붙잡던 손 마냥 가볍게 성화의 위에 올려 놓았던 손이 진동했다. 그 떨림을 알고 있다는 듯이 도닥이는 손의 마디가 크고 굵었던 바람에 질끈 눈을 감았다.
-오기.
전신이 보이는 길다란 거울 앞에서 홍중은 맨몸으로 똑바로 섰다가, 뒤로 돌았다가 몸을 반만 틀어 제 등을 보며 피어난 꽃의 개수를 셌다. 한개였다. 모란도, 작약도, 은방울꽃, 팬지, 장미, 목련. 크고 작게 제 몸에 향과 색을 남긴 꽃들이 어디론가 가고 검게 시들어 떨어지고 남은 꽃잎대만 앙상히 남았다.
그것들을 모두 제껴두고 나만 봐달라는 듯이 왼쪽 옆구리 가장 굵은 가지 끝에 빨간 꽃이 세 겹 잎을 펼쳐냈다. 중앙이 검게 탄 듯한 지독한 향이었다. 자리 선정도 기가 막히게 집착적이었다. 가장 많은 것을 깊숙히 빨아들일 가장 좋은 자리. 홍중은 멍하니 꽃을 한 번, 성화를 한 번 보고나서.
분명히 무엇도 아니었던 제 시소 건너편 아래에 있던 성화를 보고나서.
다시금 제 한송이 남은 새빨간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환각의 향이 짙게 풍기고 홍중은 환각 속에서 어린 성화의 얼굴을 보았다. 변화없는 무심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자신만을 눈에 담은 지금의 성화로 변해갔다. 빙글 도는 시야 앞의 성화는 제 볼부터 얼굴, 목까지 내려오는 선을 손바닥으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난초의 화분이라도 쓰담듯이 쓸어내려갔다. 두 손을 맞붙여 등 뒤로 깍지를 낀 채로 텅 빈 가슴팍에 얼굴을 붙이는 사람은 제가 알던 사람보다 배는 위험한 냄새를 내뿜었다.
-진하고 탁한.
첫 꽃도 마지막 꽃도 빨간색이네. 낮게 깔린 목소리의 주인보다 더 낮게 제 시소가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엉덩이가 쿵, 하고 바닥에 부딫히자 부딫힌 곳이 아니라 가슴 속이 쓰려왔다. 옆구리에 커다랗게 핀 양귀비가 무거웠다. 지독한 향 탓에 머리가 지끈거리다 이내 바닥에 주저 앉았다. 네가 꽃을 피운다는, 그것도 독이 든 꽃을 피운다는 걸.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네 마지막 꽃이 나일텐데, 너무 일찍 피우고 미움받고 싶지 않았어.
이제 등짝에 제 꽃뿐, 다른 게 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안쓰러운 듯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끝내 홍중의 등을 파내듯 긁어냈다.
너는 네 꽃처럼 어찌나 지독하고 얼마나 위선적인지.
까맣고 지독하고 끝까지 내려간 그를 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독이 가득 든 잔을 위로 들고, 가장 깊은 곳에 제 마지막을 부어 넣는 멍청한 나무가 여기에 있어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을 가졌더니 제 앞을 막아서더라. 삼류 신파극이래도 믿지 않을 멍청한 피날레였다.
-마음은 아래로 내려 앉고.
그 순간에 홍중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제가 아래서 성화를 애걸하듯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묘한 감정이었다. 지독한 나무에, 지독한 꽃이 가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