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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태양 1편: PRIDE

Regel

tw: 약한 수준의 폭력성, 약한 호러 요소

‘정신 차리자, 홍중아.’

 

숨도 조심히 쉬며 웅크린 소년은 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반 회색으로 점칠된 스타커들이 시야 끝에서 삐꺽 대며 움직였다. 하나, 둘, 셋.

그것들은 잠시 멈춰서 있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홍중이가 숨어 있는 컨테이너를 지나쳐, 느리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하, 헉, 죽을 뻔했네...”

 

식은땀을 닦아낸 소년이 다시 골목 안으로 발을 디뎠다.

김홍중, 그는 블랙아리움 수치가 무려 372나 되는 괴인, 또는 초인으로 불리는 자였다.

 

“할 수 있어, 아직 유니온까지 더 가야 하는데 여기서 멈출 순 없다고…”

 

그리고 그는 도시를 오가며, 버려진 오프리미트의 땅을 탐사해 자원을 캐내고 파는 '정커'였다. 자연의 땅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도시들, 그리고 버려진 땅을 뒤집고 다니는 생존자였다.

지금 홍중이가 향한 도시는 유니온으로, 네오-콘티넨트에 남은 도시 중에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유니온은 다른 곳에 비해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그곳의 삶 역시 조금이나마 평화로웠다. 그래서 홍중은 자기가 수확한 블랙아리움 광석 (이라고 부르기에는 광산에서 나오지 않았지만)을 유니온에 많이 넘겼다.

블랙아웃과 함께 나타난 많은 이변의 중심에 있는 물질, 블랙아리움. OB 같은 괴물들이 반대편에서 넘어온 것들이라면 블랙아리움은 지구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일종의 방어물질이었다. 마치 독개구리같이. 블랙아웃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생명체는 일정한 블랙아리움을 몸에 담고 있었고, 인간의 경우 평균적으로 그 수치가 100이 조금 안되었다. 그리고 그 수치가 높은 사람일수록 '반대편'과 동기화가 높았고, 그로 인해서 특별한 능력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이런 블랙아리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두 가지: OB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물질이고, 시간의 비에 대한 저항이 강했다. 문제가 있다면 죽은 생명체에게서 아주 소량이 결정 형태로 만들어지거나, OB가 죽은 자리에 꽃처럼 피어난다는 것. 결론적으로 구하기 쉽지 않은 기적의 물질이었다.

어떤 도시들은 그래서 소량의 블랙아리움을 다른 화학물질과 결합해 인공적인 그레이아리움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홍중은 그게 그렇게 현명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띠링!]

 

작게 울리는 통신기. 홍중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고는 통신을 받았다.

 

“어?”

「형, 어딨어요?」

“나 지금 우리 캠프사이트 가고 있어.”

「빨리 와요, 곧 있으면 밤이야.」

“스타커 몇 마리 만나가지고...”

「위험한 거 알잖아요. 성화 형이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어, 조심해.」

“알았어, 끊어.”

 

윤호였다. 그 말대로, 벌써 건물 위로 보이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면 OB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기 시작한다.

 

“아오, 미치겠네.”

 

이럴 때만큼은 도시에서 살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괴물들에게서 안전하지는 않더라고, 밤이 되면 몸을 숨길 수 있는 도시 말이다.

발소리를 죽여가며 무너진 마을을 벗어난 홍중은, 멀리서 보이는 멀대 같은 윤호의 실루엣에 안심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등에 멘 무거운 가방이 가벼워진 것만 같았다.

정윤호, 블랙아리움 수치 217. 홍중이와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홍중에게 거의 친동생과 같은 존재였다. 불길하다면서 마을 사람들이 내쫓은 홍중이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민 사람. 홍중이는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6명의 아이 중 당연히 정윤호를 아낄 수밖에 없었다.

 

“어서 들어와요 형. 광석은 좀 모았어요?”

“꽤나 모았어. 이 정도면 유니온에서 팔아넘기고 나서 비행선 고칠 돈은 나오지 않을까?”

 

뒤로 문을 닫은 홍중이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봤다. 원래 홍중을 포함한 일곱 명의 남자는 '일루젼' 이라는 이름을 붙인 비행선으로 이동을 하고는 했다. 허공에 있는 OB들의 수가 땅에 있는 것들보다 적었고, 잔해가 많은 대지와 산보다는 탁 트인 하늘이 이동하기에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비행선은 작았지만 홍중의 노력이 가득담긴 튼튼한 골격과 블랙아리움 합금으로 만들어진 구조물, 그리고 성화가 도시를 나오며 가지고 왔던 최첨단 엔진을 탑재한 값진 기계였다.

그러나 얼마 전, 프레데터 OB과 마주치는 바람에 연료 탱크와 갑판 일부가 박살이 났었다. 아무리 여상이의 염동력이 강력하다고는 해도, 없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만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장 재료를 사자니, 돈이 부족했고, 수리를 윤호가 임시방편으로 해도 다 새어 버린 연료도 문제였다. 결국 비행선은 여상이가 띄워서 가고, 나머지는 육지를 발로 건너야 했다.

그것도 이제 곧 있으면 끝이었다. 홍중이는 떨려오는 손을 꽉 쥐며 저를 보러 비행선에서 빼곰 나온 동생들에게 억지로 웃어보였다.

 

“형 괜찮은 거야? 들어와서 밥부터 먹어, 성화 형이 저녁 해놨어.”

 

산이의 걱정어린 말에, 홍중이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알았어, 사냥은 잘 갔다 온 거지?”

“당연!” 산 옆으로 튀어나온 우영이 외쳤다. “나랑 산이가 얼마나 열심히 생선 잡고 왔는데!”

 

아, 비린내가 그거 때문이었나. 홍중이는 키득키득 웃으며 어린 동생의 이마를 툭툭쳤다.

 

“산이가 잡고 넌 소리 질렀겠지...”

 

아니라고 항의하는 우영을 뒤로 하고, 홍중은 비행선 안으로 들어섰다.

 

###

 

홍중의 비행선 식구는 총 일곱 명이었다. 김홍중, 박성화, 정윤호, 강여상, 최산, 정우영. 처음에는 홍중이밖에 없었고, 그다음에는 그와 윤호가 함께 했으며, 나머지 소년들은 그 뒤로 줄줄이 합류했다.

 

그중에서도 박성화, 그는 도시 안에서 자란 것 같이 생긴 주제에 홍중보다도 고통스러운 불지옥을 벗어난 자였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은 아직도 생생했다.

몹시 춥고, 바람이 거센 어느 날, 홍중은 지금처럼 오래되고 무너진 마을의 잔해를 뒤집고 다니는 중이었다. 블랙아웃 전에는 사람이 살고, 빛이 났을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홍중 같은 정커들만이 그 거대한 묘지를 뒤집고 파먹는 곳.

그 속에서 김홍중은, 헤드헌터 박성화를 만났다.

 

“X발, 미쳤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탄성이 옆에서 터져 나왔다. 홍중 말고도 몇 명이 더 그 현장에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앞에서 일어나는 일방적인 학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홍색 마스크를 쓴 갱단과, 그에 대치하는 검은 제복 한 명. 그러나 학살당하는 쪽은 갱단이었다.

 

“저것들 걔네 아냐? 지난번에 유리하 가문 아들내미 건든 애들? 머리에 돈 걸어놨더니 저런 헤드헌터도 찾아오네.”

 

눈 하나를 잃은 공서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가끔 마주치는 정커였는데, 공서는 홍중을 볼 때마다 혀를 차는 사람이었다.

홍중은 날카롭게 버려진 검으로 갱단의 팔다리를 잘라내는 남자를 훑어봤다.

헤드헌터. 그들은 누구인가. 도시에 살지 않되 도시의 군견인 놈들. 살상력이 높아서 유용했으나, 그만큼 불안정한 정신으로 유명한, '범죄자' 처단자였다. 물론 범죄의 기준은 도시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사, 살려줘!”

 

두려움에 벌벌 떨던 갱단 중 한 명이 무기를 떨어트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헤드헌터는 자비가 없었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붉은 마스크의 머리가 날아갔다.

 

“...”

 

싸움 구경이 끝난 사람들은 금세 다시 제 할 일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홍중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남자가 시체들을 정리해서 불붙이고, 블랙아리움 관에 증거를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남자는 그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천천히, 깔끔하게 살육을 정리한 남자는 곧 허리를 펴고 홍중이를 돌아봤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헬멧을 벗자, 그 속의 멀끔한 얼굴이 드러났다.

 

“할 말 있어요?”

 

툭 치듯 말한 남자는... 음, 뭐랄까. 딱 홍중의 취향이었다. 그래서 그 말투가 더 기분이 나빴다.

 

“아뇨, 그냥 그렇게 살면 어떨까 해서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홍중이 똑같은 말투로 대답해 줬다.

 

“그래요?”

 

남자는 인상 쓰듯이 웃었다. 미친, 저 얼굴도 잘생겼네?

 

“내가 보기에는 나한테 반한 것 같은데.”

“...”

 

홍중의 썩은 표정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이번에는 소리 내서 웃었다.

 

“아, 장난친 것 가지고 왜 그래요, 무섭게.”

“그쪽을 좋아하게 될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로요? 나름 맹세 하시는 건가요?”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뭐하고 (사실 제 취향이라 그랬다), 그렇다고 그냥 떠나기에는 남자는 흥미로웠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게 지금까지 그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

 

“왔어? 늦었네.”

 

비행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홍중을 맞이한 건, 예상보다 훨씬 어울리는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하고 있는 성화였다.

그들의 첫 만남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나고, 같이 다니게 된 후에도 한동안 어색했다. 그때 박성화가 현상금의 20%를 줄 테니 도시로 태워달라고 말만 안 했어도 그들은 남남이 되었어야 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홍중은 그와 성화가 꽤 가깝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오늘은 생선이야?”

“산과 우영이가 잡아 와서. 애들은 이미 식사했으니까, 주는 거 다 먹어라.”

 

접시에 담겨 나오는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우물거리던 홍중은, 문득 생각했다. 오늘은 진짜 고백할까?

... 안된다. 전에 한 말이 있는데, 어떻게 번복하냐. 홍중은 스스로 타박하면서 딴 곳으로 새는 정신을 밥에 집중시켰다.

그렇다. 그는 멍청이에다 겁쟁이였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 그가 왜 그러나 싶을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자존심. 그는 자존심이 무척 센 사람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기가 내뱉은 말에 있어서는 그랬다. 누군가는 그것을 교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우매함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름을 뭐라 붙이든, 실제로 그건 그의 연애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에휴, 형 왜 그러는 거야...”

 

그리고 그런 홍중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다섯 명의 동생들. 아니, 여상이는 별 생각이 없을 테니 네 명인가?

비행선의 복도를 오가며 짜게 식은 눈으로 혀를 차는 동생들을 째려본 홍중이가 다시 식탁 정리하는 성화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니까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았겠냐고...

 

속으로 과거의 자신을 욕하는 홍중은, 현재의 제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성화 형.”

 

응? 비행선의 재배실에서 마이크로프로틴 통을 살피다 말고 말을 걸어오는 윤호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야?”

 

어두운 표정을 한 윤호가 재배실 작업장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낡고, 이미 한번 부러졌다가 다시 붙인 그 의자는 위태롭게 끼익 끼익 거렸다. 그러나 윤호는 그 소리는 듣지도 못했는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형, 홍중이 형 좋아하죠?”

 

“응? 맞기는 한데, 그 의자에서...”

 

내려와 주면 안 될까 윤호야. 성화는 하고 싶은 뒷말을 삼키며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번에 유니온에 도착하면 개인 사비를 털어서라도 의자를 새로 가져다 놔야지...

 

“아 진지하게 형! 좋아하면 고백하라구요!”

 

당돌한 윤호의 요구에 성화는 말이 없어졌다. 얘가 왜 이러지 싶으면서도, 속으로 찔리는 게 없잖아 있었다. 사실 백번 맞는 말이다. 좋아하면 고백하는 게 맞다. 홍중이도 그를 좋아하는 걸 아는 이상 그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안 받아줄 것 같은데.”

 

박성화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애꿎은 딸기 넝쿨을 건드렸다. 둘이 서로 좋아하지만, 홍중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난번에 엿들은 그와 산의 대화도- 음. 그래, 고백 안 하는 게 낫겠다.

 

“홍중이 형은 그냥 자존심 상해서 그러는 거라니까요! 형이 고백하면 백 퍼센트 받아준다고요!”

 

답답하다 못해 스트레스받은 윤호가 펄쩍 뛰었다. 웬만해서는 소리도 안 높이는 애가... 많이 힘들긴 했나 보다.

 

“생각은 해 볼게.”

 

때마침 쳐들어온 민기의 손에 끌려나간 윤호의 뒷모습을 보고 성화는 고민했다. 과연 그의 말이 맞을까?

사실 그는 자신이 없었다. 과거의 모습을 아는 자들이 이런 성화를 봤다면 아마 기함을 토했을 거다. 나름 헤드헌터로도 유명했고, 그중에서도 카리스마 넘치고 사람을 잘 이끌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살다니.

 

정말, 그래. 그 녀석들이 비웃을 만한 상황이었다.

 

 

 

- 기울어진 태양 1편,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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