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센티넬X가이드 세계관을 차용했습니다.
- 본 작품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역사상 자국의 정부에 반대한 여러 집단들이 반란자로 규정되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여기에 적용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날이 가면 갈수록 자기들 배만 채우기 바빠 썩어 문드러진 윗대가리들한테 제발 자기들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얌전히 앉아 집회를 열었더니 반란이란다. 국가에 큰 위해를 끼쳤기에 죽어 마땅하단다. 짓밟힌 권리를 되찾겠다고 목소리를 내는 게, 그게 잡혀가 고문당할 일이란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라며. 국민이 곧 나라이자 주권이라며. 그러나 어떤 합법적인 방법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종이에 적힌 수많은 법들이 그저 글씨에 불과하게 된 게 어연 오 년 전 일이다.
오 년 전, 서울에서는 4·9 사태가 있었다. 4·9 사태의 발단은 가이드들의 기본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비폭력 집회였다. 집회가 거듭해서 거의 매일 열릴 정도로 가이드들의 인권은 바닥에 떨어져 짓밟히고 있었다. 가이드는 센티넬을 위한 도구로 취급되었다. 유명 연예 프로그램에서 다루거나 자주 언론에 소개되는 센티넬과 결혼까지 해서 행복하게 사는 가이드는 정말 극소수였다. 옛날 신분제와 다를 게 없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가이드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이 존재했다는 것 하나다. 하지만 기득권층인 센티넬들의 권리가 가이드들의 인권보다 우선시되었다. 그러니까, 있어 봤자 전혀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자신이 가이드인 걸 밝히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이드는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게 현실이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를 문제는 근원을 알 수 없기에 걷잡을 수 없이 한 순간에 어느새 고착화된 문화가 되었다.
그 날도 평소와 같은 집회였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전하려 마이크를 잡고, 함께 노래하고. 그러던 중 갑자기 사람들 사이로 연막탄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어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에 집회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는 누군가가 집회에서 무장한 사람들을 보았고 그 사람들이 자살테러를 모의한 걸 봤다며 경찰에 신고한 것에서 시작된 재앙이었다. 큰 굉음과 함께 연막탄 사이로 무장한 군인들이 보이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어 일말의 경고도 없이 군인들은 집회에 모였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제압하기 시작했다. 무장한 군인들은 남자건, 여자건, 노인이건, 어린아이건 상관없이 그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끌고 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끌려가며 울분을 토했고 몇몇은 저항했지만 그마저도 군인의 군화에 짓밟혔다. 잡혀간 그들은 오 년 후인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4·9 사태의 전말은 인터넷을 타고 빠르게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며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지만 정부는 이들을 비웃듯 전 지역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제압했다. 정부에겐 그저 국가와 국민들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들에게 반감을 가진 성가신 집단 하나를 제압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국민들에겐 지난날의 암담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과도 같았다. 4·9 사태의 피의자는 안타까운 비극으로 사건을 포장하고 싶어 했지만 피해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든 진상을 밝히려 애썼다. 그들에겐 심증이 아닌 물증이 필요했다. 그들이 아무리 정부가 신고한 '누군가'의 신원을 밝힘과 동시에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하길 원하는 국민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국민들이 참는 것도 잠깐이었다. 결국 한 순간에 가족과 집 모두를 잃은 가이드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소수의 센티넬, 그리고 일반인들이 모여 정부가 그렇게 원하는 '반란자들'이 직접 되어주기로 했다. 그들은 '반란군'이라 불리며 오 년 째 정부와 교전 중이다.
성화도 많은 사람들과 같이 4·9 사태 때 그저 그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님과 남동생을 잃은 일반인에 속한다. 비극은 가장 행복한 기억을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성화는 눈앞에서 제 가족들을 잃었다. 여느 날들처럼 가족들과 밥을 먹은 후 상가를 돌아다니던 게 다였는데. 성화는 갑자기 나타나 제 동생의 머리채를 잡는 군인들에 저항하다 총으로 머리를 맞았고 바닥에 쓰러진 후에도 쏟아지는 발길질들을 견뎌야했다. 성화는 와중에도 끌려가는 가족들을 붙잡으려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성화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기억이 없다. 자신도 자신이 언제 기절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머리를 세게 맞아 기절했으리라 대충 짐작하는 게 다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모르는 사람이 괜찮냐고 물으며 성화를 부축했고, 성화가 눈을 뜬 곳은 끌려가던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그 광장이 아니었다. 자신이 누워있는 이곳은 병원 같았다. 전기는 나갔지만 탁자 위에 오른 초가 성화와 남자의 얼굴을 밝힌다. 성화가 경계어린 눈으로 자신을 부축해주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성화를 부축하던 사람은 쓰러져있는 성화를 두고 가기가 마음에 걸려 어떻게든 끌고 도망쳤다고 했다. 그리고 성화가 쓰러진 지 사흘이나 됐다는 것도. 밖으로 나가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잡아다 일어서려다 그 말을 들은 성화는 온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리 엄마는, 아빠는, 내 동생은.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다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걸 게워내고 싶었다.
그렇게 주저앉아있던 것도 잠시, 자신을 다시 부축하려는 손길에 다짜고짜 남자의 멱을 잡았다. 우리 가족 어디 있냐고. 왜 자기를 살렸느냐고 울분을 토해냈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성화가 원하는 답을 알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무작정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감정이 이성을 짓이겼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자신과 자신의 세상을 망쳐버린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었으며 울분에 차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소리 없이 끅끅대며 우는 성화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자신은 정부에 대항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어느 정도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것과 자신의 이름이 김홍중이라는 것도. 그 말에 성화가 남자를 올려다보자 남자는 잠깐의 간극 후 손을 내밀며 모든 걸 버리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자신과 함께 하겠냐고 물었고 성화는 남자의 말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성화는 반란군이 되었다.
田犬의 悔恨
전견의 회한
구일
정부는 반란군보다 좋은 시설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국가에 소속된 센티넬 수가 미등록 센티넬보다 많았기에 정부는 한 대대만으로도 대도시 하나를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정부의 편에 선다는 자체가 비도덕적인 일이라고 여겨졌기에 센터를 탈출하는 센티넬들도 꽤 많았다. 몸에 부착된 장치로 인해 탈출하지 못했다면 자살을 택하는 센티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센티넬의 수가 더 많았다. 가이드들의 권리가 땅에 떨어지게 만든 장본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악질 센티넬들은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정부에 붙어 온갖 명예로운 표창장 따위를 받아가며 반란군을 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무고한 일반인들을 학살하는 게 주 임무였고 그들에겐 일상이었다.
윤호는 정부소속이자 실력이 출중한 센티넬과 군인들로 구성되어있다는 27사단의 소장 정명호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정윤호는 정부 소속 센티넬이라는 말이다. 윤호는 전류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사실 말만 마음대로지 실제로 자신의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건 몇 십 년을 훈련받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정도 공격은 가능하나 큰 건물 하나를 정전시키거나 대규모의 지역에 피해를 줄 정도의 능력 효용성은 없다는 소리다. 윤호의 아버지인 정명호는 자신의 아들을 완벽하게 키우고 싶었기에 남들이 14 살에서 19 살 사이에 능력이 발현되고 그제야 센터에 입주해 훈련들을 받을 때 윤호는 능력이 발현되기도 전인 10 살부터 훈련을 해왔다. 강압적이고 융통성 제로지만 나라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아버지 밑에서 큰 말 잘 듣고 착하고 능력 좋은 아들. 이게 윤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윤호는 무조건 적인 애정 속에 컸다는 것보다는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빨라 자신이 예쁨 받을 행동을 하는 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눈치가 빨랐다기보다는 눈치가 빨라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컸다는 게 더 맞는 말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센터에서 컸지만 센터 연구원들은 거의 모두 윤호를 귀여워했다. 싹싹하고, 착하고. 애가 참 착하다며 입을 모아 칭찬하기 바빴다. 그럴수록 정명호는 윤호의 가치를 높게 샀다. 언제는 연구원 중 한 명이 윤호에게 물었다. 대충 넌 어떻게 애가 그렇게 말도 잘 듣고 착하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질문이었다. 그게 윤호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건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런 질문들을 들을 때마다 윤호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정윤호는 정명호에게 있어 전견이다. 사냥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시킨 일 잘하지, 말 잘 듣지, 피로 묶여있어 도망칠 일도 없지. 정명호는 윤호를 그저 물건으로 봤다. 자신이 더욱 돋보일 수 있는 도구 하나쯤 되는 가치 딱 그 정도. 윤호가 남들보다 일찍인 12 살에 능력이 발현 된 후 좀 호의적으로 변한 것 같다가도 윤호가 너무 어려 자신의 능력을 잘 컨트롤하지 못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굴며 사람을 호용가치에 따라 저울질 하는 사람이 바로 정명호다. 정명호는 윤호가 자신의 눈 밖에 나는 걸 금기시했다. 윤호의 모든 일상이 자신의 손 안에 있어야 했다. 이것 때문에 모든 일들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야기는 센터 안 가이드들의 방들 중 하나에서 시작된다. 윤호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받고 싶지 않아도 삼 일에 한 번 꼴로 가이딩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윤호는 어렸을 때부터 센티넬들에게 고통 아닌 고통을 받는 가이드들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이딩 자체를 꺼리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가이드에 대한 혐오나 부인의 감정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엔간하면 가이딩을 받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윤호는 다른 센티넬들보다도 작전에 많이 투입되는 편이었고, 그만큼 능력을 쓰는 일도 잦다.
센티넬들은 능력을 쓸 때마다 배출되는 에너지가 있는 반면 배출되지 못하는 체내 에너지가 몸속에 쌓이게 된다. 이 몸에 쌓이는 체내 에너지는 가이딩을 통해 없애지 않으면 독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에 센티넬들에게 있어 가이딩은 필수적인 일이다. 체내 에너지가 몸속에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센티넬들에겐 고통이었는데 윤호는 체내 에너지를 매번 사람의 가이딩이 아닌 가이딩 효과가 있는 약물로 해결하는 편이다. 하지만 가이딩 약물은 전쟁 시 당장 가이딩이 필요할 때 센티넬들이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걸 감수하고 투여할 정도로 부작용이 심한 약물이었다. 엔간한 센티넬들은 차라리 약물을 투여 받지 않고 폭주하길 선택하는 편이었는데 윤호는 매번 약물을 복용했다. 아무리 소량이라도 몸에 부담이 가는 건 변함없는데도 말이다. 가끔 약물이 아니라 일반 가이딩을 받을 때도 있었는데 그것도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윤호를 본 전담 가이드가 한 번씩 손을 잡거나 끌어안는 게 다였다.
"정윤호, 너 오늘도 나갈 거지?“
”당연하죠. 형은 누워서 푹 쉬고 계세요. 세 시간 안에 올게요.“
"어야, 조심해. 걸리지 말고.“
"웬일로 내 걱정을 다 해 주신대.“
"너 걸리면 내가 죽어서 그런다, 인마.“
"그럼 그렇지. 여하튼 늘 고마워요, 형.“
"내가 더 고맙지 이놈아. 얼른 가. 시간 아깝다.“
윤호와 윤호의 전담 가이드인 의혁이 가볍게 인사를 했다. 오후였지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 탓에 해는 거의 몸을 숨긴 상태였다. 노을이 땅 위로 자욱이 깔릴 시간이다. 의혁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가볍게 턴다. 슬리퍼를 질질 끌어 식탁에 가 향초에 불을 붙이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 책을 펼치며 손을 흔들었고 윤호는 그런 의혁에게 슬 웃으며 자기가 나가는 걸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며 궁시렁대며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윤호가 등을 돌려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창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열린 창문 밖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창틀에 걸터앉아 바깥세상을 도모하는 것. 이는 지루한 센터 생활 중 몇 안 되는, 윤호가 좋아하는 일들 중 하나였다. 능숙하게 창틀에 걸터앉아 자신이 착지할 곳을 내려다본다. 확인을 끝내곤 고민 없이 뛰어내렸다. 윤호가 있던 방은 2층이다. 그리 높은 층이 아니기에 몸을 낮춰 가볍게 착지한 윤호가 주변을 둘러보곤 건물 뒤편으로 뛰어갔다.
센터는 넓은 부지 위에 세워졌다. 센터 안에서 이동수단이 따로 필요할 정도였다. 센터 내에서 운영되는 버스를 타도 끝 건물에서 끝 건물까지 가려면 15 분이 걸린다. 그런 센터를 높은 벽들이 감싸고 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수용소와 다름없었다. 센터를 이루는 많은 건물들 중 가장 외곽에 있는 건 가이드들의 숙소다. 방금 윤호가 나 온 그 건물이 가이드들이 지내는 숙소이자 센티넬들이 가이딩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외곽이라고 해봤자 센터를 감싸는 벽과 꽤 거리가 되기 때문에 센터를 나가기 위한 비밀 쪽문까지는 뛰어서 오 분이 걸린다.
얼마를 뛰었을까, 윤호가 비밀 쪽문에 다다랐다. 뛰어오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입고 있던 검은색 후드집업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행복해. 20 년을 줄곧 억압받으며 살아온 윤호에겐 이 자체가 엄청난 일탈이었기에 느껴지는 행복감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은근 우리 사단 센터 방어가 허술하단 말이야. 혼잣말을 하며 윤호가 쪽문을 가리고 있던 넝쿨들을 대충 옆으로 밀더니 몸을 살짝 숙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 벽 밖으로 나 오자 보이는 풍경은 전부 깨진 콘크리트와 바람에 맞물려 기이한 소리를 내는 구조물들이었다. 곧 무너질 것 같은 건물들이 윤호를 반겼다. 원래 센터는 내전이 발발하기 전 도시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센터의 주변은 다른 곳들보다도 더 처참했다. 인사를 하듯 눈을 느리게 깜빡인 윤호가 익숙하게 몸을 틀어 도시 외곽 쪽으로 향했다.
도시 외곽엔 숲 하나가 있다. 그렇게 울창한 숲은 아니고, 동네 뒷산 정도 되려나. 분위기는 영화에서 볼법한 햇빛이 가득한 푸르른 숲이 아니라 나무들이 울창하다 못해 빼곡해 한 낮에도 어두울 정도의 숲에 가까웠다. 이 숲은 센터 근처에 유일하게 남은 숲이었다. 힐링을 받기엔 다소 우울한 면이 없지 않은 숲이었지만 윤호는 이곳에 있을 때 자유롭다고 느꼈다. 처음으로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제 의지대로 한 일이여서 더 그런 걸까. 떨어져있는 낙엽을 밟으며 걷다가 보이는 큰 돌 위에 걸터앉은 윤호가 나뭇가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중얼거리듯 툭 내뱉는다.
"도시는 불타 폐허가 됐고 세상은 녹음을 잃었는데 나 혼자 자유로워서 뭐해. 이건 영원한 것도 아닌데.“
내뱉는 문장 마디마디가 전부 무거웠다. 도시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정부군 간부의 아들이 저이며 그런 자신은 이 모든 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센터에 있는 사람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게 참, 모순이었다. 본래 사람이라면 응당 도덕적인 일을 하는 게 섭리이자 이치인데. 아직 윤호에게 있어 그 당연한 섭리와 이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바스락
갑자기 낙엽 밟는 소리가 조용한 숲을 울렸다. 눈을 감고 있던 윤호가 인기척에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본다. 나 말고 여기에 또 누가 있는 걸까. 머릿속으로 최악의 변수를 생각해본다. 여기서 반란군을 만나게 된다면? 다짜고짜 자기에게 총을 겨누는 사람을 맞닥뜨리게 되고 자신이 능력을 사용해 그를 죽여 센터가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윤호는 다시 센터 밖으로 몰래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할 게 뻔했다. 아, 짜증나.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나무 옆으로 삐져나온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반란군이 저렇게 허술할 리는 없으니 그럼 일반인인 건가. 말이라도 걸어보자는 심정으로 조용히 그를 불렀다.
"저기요.“
나무 뒤에 서있던 사람이 흠칫 떨더니 신발을 그제야 안쪽으로 숨겼다. 저기요. 윤호가 한 번 더 부르자 윤호 쪽으로 권총을 겨눈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의 반은 천으로 가린 상태였다. 윤호가 남자를 줄곧 응시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반란군 표식인데. 반란군 치고는 너무 엉성한 곳이 많았다. 총을 드는 폼이며, 아까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못 숨긴 것까지. 불안함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했다. 대충 태를 보니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자신의 선에서 조용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윤호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그제야 윤호는 자신이 입은 옷이 평상복이라는 걸 떠올렸다. 저 사람 지금 날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침에 군복을 입으려다 혹시 몰라 편한 옷을 입고 왔던 게 신의 한수였던 거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칭찬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윤호가 남자에게 뭐라도 말하려 입을 열려던 찰나, 남자가 먼저 윤호에게 묻는다.
"정체를 밝혀. 넌 어디의 누구지?“
"아, 저는 일반인입니다.“
"... 아. 죄송합니다. 여기가 센터 근처라. 센터 소속이신 줄 알았어요.“
”해도 다 졌는데 여기서 뭐 하세요? 여긴 위험해요. 내려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숲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대화의 공백을 숨소리가 채운다. 고요한 숲에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높다기보다는 낮은 쪽에 가까운 성음이었다. 목소리가 가는가 싶다가도 힘 있게 전달되는 단어들에 윤호가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남자가 하는 행동을 보면 자길 주거지까지 엄호해 줄 생각 같아 보였다. 이 상태라면 사이좋게 걸어서 일반인들 주거지까지 가게 생겼네.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아팠다. 그렇다고 여기서 정부 소속이라고 밝히기엔 그건 누가 봐도 결투신청이었다. 대충 어떻게 둘러대면 좋을까. 장소도 장소고 군인처럼 딱딱한 윤호의 어투에 아직 윤호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건지 남자의 눈이 윤호를 곧게 응시한다. 총구를 거두긴 했지만 방아쇠에 올라간 성화의 검지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윤호가 입을 열었다.
”어... 생각할 게 있어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제 얘기 좀 들어 주실래요?“
”아는 형이 아는 사람보다는 적당히 모르는 사람한테 고민 털어놓기가 더 쉽다길래.“
”저희가 적당히 모르는 사인가요?“
”방금 만났잖아요. 그럼 아예 모르는 건 아니지 않나.“
대답이 없는 남자에 세 번째로 입을 열 땐 머쓱할 정도였다. 윤호가 남자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진짜 고민이 있는 건 맞으니까, 이 정도 거짓말은 괜찮겠지. 아려오는 양심에 애써 자기합리화를 했다. 사람 죽일 때는 아무렇지 않던 양심이 괜히 이럴 때만 윤호의 발목을 붙잡는다. 저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날 더 의심할까, 아니면 알겠다고 할까. 답은 후자였다. 남자가 드디어 방아쇠에서 손을 떼고 윤호 쪽으로 걸어와 윤호가 앉아있던 바위 끝에 거리를 둔 채 나란히 앉았다. 어떻게 화두를 떼면 좋을까. 대화의 공백이 길어졌다는 생각이 들 찰나 남자가 먼저 윤호에게 말을 걸었다.
”무거운 고민인가 봐요. 여기까지 올 정도였으면.“
”아... 조금요. 사실 제 얘기 들어달라고 말은 꺼냈는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려우면 안 하셔도 돼요. 그냥 같이 앉아있어 드릴게요.“
남자의 말에 이상하리만큼 편해졌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호기심이 이유없는 안정감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처음 만났는데 이렇게 편해도 되나? 윤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오른다. 혹시 저 사람 가이드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말이 안 된다. 가이딩은 오로지 터치만으로 이루어지는데 지금 본인은 저 남자와 접촉을 하지 않았다. 만약 저 남자가 높은 랭크의 가이드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이딩이 된다면? 그렇다면 이 사람을 센터로 데려가는 게 자기한테도, 센터 입장에서도 이익 아닐까. 이미 윤호는 찰나의 식견으로 남자를 판단해 결론까지 내린 상태였다. 물밀듯 들어온 생각들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윤호를 보던 남자가 윤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느리게 윤호를 토닥인다. 지금 저 사람 날 위로하는 건가? 어떤 방면에서든 위로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윤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방금 전 윤호와 비슷하게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었다. 그게 다였다. 근데도 이상하리만큼 편했다. 어깨에 닿는 손에선 그저 사람의 온기만이 느껴졌다. 이 사람 가이드가 아니구나. 그렇다면 왜? 더 큰 의문이 윤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윤호와 남자의 시선이 올곧게 서로를 향한다. 어느 한 사람도 먼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독한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남자의 허리춤에 있던 무전기가 잔 소음을 일으킨다. 아마 인이어를 착용해서 본인에게만 내용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남자가 그제야 윤호를 보던 시선을 거두곤 무전 내용에 집중한다. 인이어 밖으로 새는 소리를 대충 들어보면 저 남자의 이름은 박성화이고, 기지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지났다는 것. 나 때문인 건가. 윤호는 남자와 무전기를 번갈아본다. 방해받았다는 생각이 치민다. 근데 왜? 따지고 보면 내가 저 남자의 일을 방해한 건데. 아까부터 근원을 알 수 없는 생각과 감정들이 윤호를 피곤하게 만든다. 모두 처음 본 사람에게 일만한 감정들은 아니었다.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남자, 아니 성화가 윤호를 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저 급하게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일반인 거주지역이랑은 정반대라서... 못 데려다 줄 것 같아요. 산 밑까지라도 같이 가요.“
”아, 괜찮습니다. 급하신 것 같은데 먼저 가세요. 자주 오던 곳이라 혼자 내려갈 수 있습니다. 생각할 것도 있고...“
”조심하세요. 혹시 모르니 이거라도 드릴게요.“
성화가 윤호에게 조명탄 하나를 쥐어준다. 조명탄을 건네받은 윤호가 저기, 저 인간 조명탄인데요. 따위의 말을 속으로 생각했다. 윤호가 진짜 괜찮다며 혼자 내려갈 수 있다고 뒤이어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성화가 그제야 자리를 뜬다. 성화가 산을 내려가려고 하려다 괜히 찝찝한지 도중에 윤호를 뒤돌아봤다. 윤호는 그런 성화에게 웃으며 조명탄을 흔들어보이곤 손을 흔들었다. 그게 다였다. 성화가 윤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윤호가 성화가 앉아있던 자리를 아까의 순간을 회상하듯 빤히 바라봤다. 바닥에서 무엇인가가 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자세히 보니 안쪽에 사진을 넣을 수 있는 펜던트형 목걸이었다. 펜던트를 주워 열어보니 한 쪽은 비어있고 한 쪽은 여러 명이 앉아있는 사진이 있었다. 목걸이에 넣으려고 사진을 꽤 축소한 것 같아 이목구비가 그다지 잘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맨 오른쪽 끝에 서 있는 게 아까 그 남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가족인 건가. 괜히 더 찝찝해졌다. 윤호가 자신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내려다본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펜던트를 그 자리에 두고 가려다 주머니에 넣었다. 소중한 것 같은데 돌려 줘야지. 윤호는 윤호 자기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다음을 기약했다.
*
성화가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성화는 홍중의 무전을 들은 후에야 자신이 돌아가야 할 시간을 훨씬 넘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떡하지. 걱정했겠다. 평소의 자신과는 다르게 얼이 좀 빠졌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랬지. 처음엔 정부군인가 싶었다. 이 근방엔 27 사단 센터가 있으니 그럴 가능성 또한 충분했다. 그러나 남자는 비무장 상태였다. 옷도 군복이 아니었고, 말투는 좀 딱딱했지만 군인이라기엔 어딘가가 엉성했다. 일단 머리가 노란 것부터가... 요즘 군인들은 염색해도 되나?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성화의 경계심이 허물어진 결정적 이유는 남자가 성화를 보며 웃었을 때였다. 그 웃음을 본 성화는 총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보면 그냥 웃는구나, 싶을 웃음이었지만 성화는 그 웃음을 너무나도 잘 안다. 오 년 전 4·9사태 때 끌려가던 동생이 성화를 보며 마지막으로 지었던 웃음과 흡사했다. 어딘가 씁쓸한 웃음. 그 순간 그 남자 얼굴에서 제 동생이 겹쳐 보였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남자는 그런 웃음을 지었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오 년 전 기억과 그 남자가 머릿속을 온통 채운다.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기지로 돌아오는 길이 짧게 느껴졌다. 기지에 도착하니 홍중이 기지 문 앞에 떡하니 서있다.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안 끼던 팔짱도 끼고, 성화는 사실 그게 좀 웃겼다. 어떻게 빠져나가지. 산에서 민간인 하나를 만났다고 말하면 시간을 어겼다는 시말서뿐만 아니라 보고서도 쓰라고 난리칠 거고, 조명탄 하나를 민간인 귀갓길 안전을 위해 날린 것도 분명 덤탱이 씌워서 욕먹을 게 뻔했다. 생각만 해도 기가 다 빨리는 느낌이었다.
”박성화, 30 분 지각. 너 뭐 하다 왔어?“
”30 분밖에 안 지났어? 뭐야, 난 또 한 시간 늦은 줄. 나 오는 길에 길 잃었었어. 산에 올라갔다가.“
”자랑이다. 그나마 너라서 아무 처벌 안 하는 거지 신입이었어 봐.“
알았어, 알았어. 성화가 손을 휘적거리며 대충 대화를 갈무리했다. 홍중을 끌고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비스무리한 곳에 앉아 오늘 정찰하며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고, 홍중에게 오늘 기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으며 타이핑을 하던 도중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와 소리쳤다.
”대장! 저번에 그 작전 할 때 잡혀갔던 천혜 형이 돌아왔어요!“
그 말을 들은 홍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 짜증이 잔뜩 서린 목소리였다. 성화도 홍중을 따라 일어나 천혜가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천혜는 반란군이 설립되고 일 년도 안 돼서 합류한 초기 멤버였다. 일주일 전, 일반인 주거지를 시찰하던 도중 사라져 다들 걱정이 많았고 심지어 몇몇은 죽은 사람 취급을 했었다. 그런 천혜가 돌아왔다니, 기지가 온통 난리법석이었다.
”... 홍중 형, 성화... 형.“
기지 입구에 무릎을 꿇고 있는 천혜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저와 홍중을 부르는 목소리는 잔뜩 쇳소리가 섞이고 갈라져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상해있었다. 얼굴은 하도 맞아 잔뜩 부어있었으며 온 몸은 멍이 들어 상처투성이였다. 천혜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홍중이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죄송, 해요... 진짜, 버틸 수가 없었... 어요.“
기지에서는 천혜의 목소리와 숨소리만 들렸다. 모두가 쥐죽은듯 조용했다. 천혜가 센터에 끌려가 고문당했다는 가설이 암묵적인 사실이 되었다. 숨이 턱 막혔다. 분명 천혜는 반란군 초기 멤버이기 때문에 모든 원칙들을 꿰고 있을 것이었다. 센터에 잡혀갔다 돌아오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왔다는 소리였다.
초기 반란군들이 모여 함께 정한 반란군 매뉴얼에 따르면 센터에 잡혀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 사람은 발견된 즉시 총살이 원칙이었다. 센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잡혀가 정보를 불었는지 아니면 정신개조를 당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초소형 카메라나 위치추적기 등이 붙어있을지–반란군 쪽에서는 절대 먼저 알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사실상 이 원칙을 지켜왔기에 우리 기지가 건재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홍중이 허벅지에 매어 둔 밴드에서 권총을 꺼내 총구를 천혜에게 겨눴다. 성화는 본능적으로 그 앞을 막아서려고 했지만 뒤에서 성화를 붙잡는 손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자 천혜의 절친한 친구였던 현영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형, 원칙은 원칙이에요. 무덤덤하게 말하는 목소리와 달리 현영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성화가 떨고 있는 현영을 끌어안아 토닥인다. 형이 미안해. 내뱉는 다섯 글자에 모든 감정이 실렸다. 분노, 슬픔, 억울함. 지금의 성화를 이루는 감정들이었다. 성화는 현영이 장면을 보지 못하도록 손목을 잡곤 그 장소를 벗어났다. 성화 자신도 아끼던 동생이 죽는 장면은 차마 보지 못할 것 같았다.
탕 몇 발자국을 더 내딛자마자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총소리가 기지 안을 울렸다. 성화에게 끌려가던 현영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성화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주저앉아 숨이 넘어가라 우는 현영을 끌어안아 토닥이는 게 전부였다. 오 년 전에도, 지금도. 자신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순 없었다. 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실현해야 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성화를 밤새 괴롭힌다.
*
”평소보다 좀 늦었네?“
”아, 그쵸. 깜빡 잠들어가지고.“
윤호가 창틀에 가볍게 올라앉았다. 의혁이 읽고 있던 책을 덮어 윤호를 반겼다. 네가 잠이 들었다고? 밖에서? 의혁이 비꼬듯 물었다. 너무 뻔한 거짓말이긴 했다. 윤호는 불면증을 앓고 있었으니까. 윤호가 대충 둘러댄다. 센터 밖이 생각보다 잠이 더 잘 오더라고요. 윤호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 챈 의혁이 하하학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 숲에 꿀이라도 발라뒀니. 웃긴다. 의혁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긴 윤호가 씻을 거라며 욕실 문을 쾅 닫으며 들어갔고 의혁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웃고 있었다. 아, 진짜 웃겨. 저 곰탱이 거짓말을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윤호와 의혁 그들만의 진실공방 대전이 한바탕 지나고, 윤호가 의혁의 방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잡고 기다리던 도중 복도가 소란스러워 고개를 돌리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좀 더 자세히 보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안 보이자 윤호가 가까이 다가갔다. 서너 명이 한 명을 둘러싸고 있었다. 둘러싸인 건 오며가며 자주 본 가이드였고 둘러싼 여럿은 센티넬들이었다. 그것도 센터 내 기피대상 1호인 유호연네 무리였다.
유호연이 기피대상 1호로 불리는 이유는 뻔했다. 하도 쓰레기 같은 짓들만 골라서 하고 다녀서. 유호연은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다. 가이드를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 정도로 생각하는 건지 가이드들을 하대시하다 못해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는다. 근데 또 센티넬들한테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사람 좋게 군다. 이중인격자, 소시오패스. 유호연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수식어였다. 유호연에게 물들어 가이드 취급을 개같이 하는 센티넬들이 절반이었으니 말 다 했지 뭐.
지금 윤호가 보는 이 상황도 호연이 가이드를 개같이 대하는 많은 상황들 중 하나인 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경쾌한 종소리가 눈치 없이 울렸다. 윤호의 걸음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유호연네 무리를 향했다. 무리들 중 하나가 가이드의 뺨을 내리치려 손을 높게 들었으나 윤호가 손목을 재빨리 붙잡아 가이드가 맞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야, 너 뭐 하냐?“
”사람을 왜 때려. 말로 해.“
”말해도 못 알아먹는데 내가 뭐하러 귀찮게 설명을 하냐.“
호연이 센티넬의 손목을 잡고 있는 윤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윤호를 응시한다. 이 새끼 눈깔 보니까 반 돌았네. 윤호가 한숨을 쉬자 호연이 윤호에게 다가오며 한 글자씩 씹어 먹듯 얘기한다. 네 알 바냐고. 너 쟤 애인이라도 돼? 윤호는 가볍게 호연의 말을 무시하곤 넘어져있던 가이드를 일으켰다. 가보세요. 윤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연이 윤호의 멱살을 추켜잡았다.
”내가 묻잖아. 정윤호 네 알 바냐고.“
”말해도 못 알아먹는데 내가 뭐하러 귀찮게 설명해.“
”평소처럼 가던 길이나 가지 왜 꼽 끼고 지랄이야.“
”네 알 바야? 제발 좀 사람답게 살아. 유치하게 언제까지 사람 급 나눌 건데.“
윤호가 조금 전 호연이 한 말을 똑같이 따라하며 웃어보였다. 호연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거 놔. 윤호가 호연의 손을 뿌리치고는 더럽다는 듯 옷을 툭툭 털어냈다. 애들이 너 따르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근데 어쩌냐, 우리 아빠는 27 사단 소장인데. 윤호가 호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곤 자리를 떴다. 뒤에서 들리는 욕지거리에 가볍게 중지를 올린 건 덤.
윤호가 방에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눕는다. 진짜... 피곤하다. 유독 시끄러운 날이었다. 원래 안 이런데. 아까 그 성화라는 남자를 만나서 그런가 보다. 윤호가 몸을 돌려 눕자 주머니에 들어있는 펜던트가 달그락 소리를 낸다. 이거 돌려 줘야 하는데.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빡이다 성화가 자신을 토닥이던 손길을 회상하며 잠에 든다. 윤호가 뒤척이지 않고 잠든 몇 안 되는 날들 중 하나였다.
*
성화가 반도 못 뜬 눈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세면대로 향한다. 철제 세면대는 오 년을 매일 아침마다 봐왔지만 적응되지 않았다. 비행기냐고. 실없는 생각을 하며 양치를 한다. 거울을 보다보니 목 언저리가 허전했다. 어, 어. 내 목걸이 어디 갔지. 가족과 찍은 마지막 사진이 담겨있는 목걸이라 성화에겐 목숨만큼 소중한 물건이었다. 어떡해. 머릿속이 백지였다. 내가 어제 풀고 잠들었나, 하는 생각에 입을 대충 헹구곤 자신이 자던 접이식 침대를 다시 빼내 정신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베개 커버까지 다 들어내고 나서야 목걸이가 방에 없다는 걸 깨달은 성화는 대충 옷을 구겨 입곤 기지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어딜 갔었지. 성화는 어제 자신이 다닌 곳을 다 가 볼 기세로 바닥만 보고 다녔다. 자신의 목걸이를 본 적이 있냐고 누굴 붙잡고 물어도 봤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떡하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순간 어제 만난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산에 떨어트리고 왔나. 성화가 품에 대충 권총과 물 한 병, 무전기를 챙겨 어제 남자를 만났던 그 산으로 향했다.
성화가 멈춰서 숨을 골랐다. 뛰어오면서 어디 떨어지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바닥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느라 목이 다 뻐근할 지경이었다. 산에 도착하고 나서도 어제 산을 오르내린 길을 눈이 빠져라 쳐다보며 올라왔지만 목걸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제 앉아있던 바위 근처에도 없으면 어떡하지. 물으로 목을 좀 축이곤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어제 앉아있었던 곳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노란머리에 검은 후드. 어제 그 남자였다. 어제와는 반대로 성화가 남자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기요.“
”어, 오셨네요?“
마치 성화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성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네? 그제야 남자가 아차 싶었는지 주머니를 뒤져 성화에게 무엇인가를 내민다. 성화가 가까이 다가가 받아보니 성화의 목걸이었다. 이걸 그쪽이 왜 가지고 있어요?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성화가 목걸이를 다시 제 목에 걸며 남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어제 먼저 가셨잖아요, 혼자 앉아있다 뭐가 반짝거려서 보니 이거였어요.“
”... 아, 아. 진짜 죄송해요. 어제부터 자꾸 실례만 끼치네요.“
”괜찮습니다. 소중한 거잖아요. 저랑 엇갈리시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설마 그래서 이 이른 시간에 여기 계셨던 거예요? 목걸이 돌려주시려고?“
”네.“
이 사람 대체 뭘까. 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니, 어떻게 그래? 솔직히 누군가의 물건을 줍고 나서 그 사람이 언제 그 장소에 돌아올지 모른다는 이유로 이른 아침부터 그 장소에 나와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제가 여기 늦게 왔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괜히 아침마다 저를 챙겨주던 남동생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타박 섞인 말들을 내뱉었다. 남자는 그런 성화를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진짜, 뭐지 저 사람.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성화에게 펜던트는 진짜 소중한 거니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하지. 문득 남자가 사진을 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혹시 이 안에 있던 사진 보셨어요?“
”아... 죄송합니다. 궁금해서 열어봤어요.“
순수한 건지 솔직한 건지. 성화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남자를 보면 볼수록 꼭 제 동생 같았다. 보통 안 봤다고 하지 않나? 어제보다 좀 더 가까이. 그렇다고 너무 가깝진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윤호의 옆에 걸터앉은 성화가 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입을 연다.
”보고 바로 아셨겠지만 가족들 사진이에요. 지금은 만날 수 없어서 이렇게라도 가족들을 떠올리거든요. 어... 가족들이랑은 오 년 전에 헤어졌어요. 4·9 사태 때요. 아직도 동생이 잡혀가던 순간에 제가 아무것도 못한 그 꿈을 꿔요. 동생은 매번 꿈속에서 괜찮다고 말하고 웃는데... 그게 진짜 괜찮은 건 아니잖아요. 그냥, 남은 게 이것밖에 없었는데 찾아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 죄송해요. 제 말이 너무 길었죠.“
”어... 아니에요.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어제 제가 한 말이 맞았죠?“
”뭐가요?“
”아는 사람보다 적당히 모르는 사람한테 이런 얘기하는 게 훨씬 편하다는 거.“
아무래도 말린 것 같았다. 내가 어쩌자고 오늘 두 번째로 보는 사람한테 내 이야기를 했지. 성화가 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때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여태 눈을 맞춘 채였다. 성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여하튼 진짜 감사합니다. 연신 이어지는 감사 인사에 남자가 진짜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 잠시 남자가 고민하는 것처럼 뜸을 들이다 성화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고마우면 제 부탁 좀 들어 주세요“
”당연하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도와드릴게요.“
”가끔 이렇게 여기서 만나면 안 될까요?“
”네?“
”서로 속마음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 하자는 말이에요.“
이틀 만에 둘은 비밀 친구가 됐다. 어제 말문을 튼 이유도 어디까지나 남자의 부탁에서였다. 저 얼굴로 부탁을 하면 괜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성화가 잠시 고민하더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그런 성화한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뭐가 고마운 걸까, 당연한 건데. 성화가 머쓱한지 입꼬리만 올려 살짝 웃으며 시선을 피하자 남자가 성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허공에 내밀어진 손을 홀로 둘 수 없어 맞잡았다.
”저희 통성명부터 해요. 저는 정윤호. 스무 살입니다.“
”어, 어... 저는 박성화예요. 스물 두 살.“
”형이네요? 성화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안 될게 뭐가 있어요.“
”그럼 형은 저한테 말 편하게 하면 되겠네요.“
이상하게 계속 말렸다. 저 남자애, 아니 정윤호가 뭐라고 자꾸 말간 얼굴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다. 성화는 어제 오늘 모두 일반인을 사적으로 만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어겼으며 일반인에게 이름을 밝히면 안 된다는 원칙 또한 어겼다.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가명 하나 즉석으로 지어서 말해 줄 걸 그랬나. 지금 생각해봤자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고민들이었다. 성화가 가볍게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곤 앉아있던 넓은 바위 위에 드러눕는다. 모르겠다, 나는. 성화가 독백을 삼키곤 앞으로 넘어질 듯 굴었다.
윤호가 그런 성화를 빤히 쳐다보다 따라 나란히 누웠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들어온 햇볕이 유난히 따스했다.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웠으며 이상하리만큼 둘은 이유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성화에게 이런 편안함은 오 년 전 4·9 사태가 발발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지나치게 조용한 숲에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간간히 들려왔다. 불편하지 않은 적막이 꼭 윤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아 성화는 윤호를 믿기로 결심한다. 속마음 터놓는 동생 하나 둬서 나쁠 거 없지. 이게 성화의 결론이었다.
이후로 둘은 삼 일에 한 번 꼴로 만났다. 삼 일이 이틀이 되고 결국 매일 보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나서 하는 건 딱히 없었다. 시답잖은 대화들을 나눴다. 몇 시에 일어났고, 산에 오르는 길에 뭘 봤다와 같은 것들이 대화의 주를 이뤘다. 그래도 이상하게 재밌었다. 윤호랑 있으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함께 지내보니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 같았다. 애가 어딘가 좀 엉성한데 말하는 거 보면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애 같기도 하고. 이런 애를 일반인 주거지에서 못 봤다는 점이 조금 걸렸다. 노란 머리라면 어딜 가더라도 눈에 띌 텐데 왜 여태 한 번도 못 본 걸까.
*
”소장님, 요즘 윤호가 가이딩을 자주 받으러 갑니다.“
”그 놈이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능력 수치는 좀 어떤가.“
”그...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가이딩을 받는 횟수에 비해 가이딩 수치는 전혀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놈이 그 시간에 다른 곳을 가기라도 한다 그 말인가?“
”... 그런 것 같습니다.“
”이따 내 방으로 올려 보내. 아무런 언질도 주지 말고.“
”알겠습니다.“
센터의 가장 안쪽 방이었다. 연구원이 센터의 소장이자 동시에 27 사단의 소장인 정명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소장이 책상을 크게 내리쳤다. 망할 놈. 내가 자기 잘 되라고 얼마를 쏟아 부었는데 고작 가이딩 하나를 안 받겠다고 뻗장대서 그걸 망쳐? 소장이 거듭해 책상을 내리친다. 자신의 전견이 말을 듣지 않는다. 주인이 사냥개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해 화를 내는 꼴이 퍽 웃겼다. 설마 자신의 전견이 행하는 곳이 반란군의 기지라면? 가서 무엇을 하든 간에 센터에 보고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 자체로 국가에 대한 엄청난 배반행위였다. 이는 곧 정명호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생각을 마친 소장이 악을 쓰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곤 윤호의 전담 가이드를 찾아갈 생각으로 자신들의 부하 몇과 함께 센터 외곽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혁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 침대에 앉아 편하게 책을 읽던 의혁이 갑자기 방으로 들어온 소장과 군인들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 아, 좆됐네. 의혁이 뭐라도 둘러대 시간을 벌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소장이 다짜고짜 의혁에게 돈다발을 던졌다.
”정윤호. 그 놈 어디 갔는지 불어.“
”더 필요해?“
반응이 없는 의혁에 소장이 자신의 옆에 서있던 군인에게 딱딱한 재질의 브리프케이스를 받아 의혁에게 던졌다. 그럼에도 의혁이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장은 의혁에게 다가가 그대로 의혁의 목을 한 손에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돈 줄 때 곱게 대답했으면 좋았잖아. 정윤호 어디 있어. 소장이 언성을 높였다. 의혁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손을 두 손으로 밀어내 보려고 애썼다.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공중에 뜬 발을 버둥거렸다. 의혁이 잔뜩 쉰 목소리로 소장의 손을 밀어내며 뚝뚝 끊긴 성음으로 말하겠다는 문장을 만들자 그제야 소장은 의혁을 조르던 손을 풀었다. 소장이 손을 풂과 동시에 의혁이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덜덜 떨고 있는 의혁의 몸을 내려다보던 소장이 의혁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들어올렸다.
”정윤호 어디 있어.“
”매번, 나갑니다. 하지만 전 어딜 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워낙 세게 목을 졸린 터라 의혁의 성음이 툭툭 끊겼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의혁을 내려다보던 소장이 손을 들어 의혁의 뺨을 세게 내려친다. 시간만 버렸네. 끌고 와. 소장의 말에 군인들이 뺨을 맞고 나가떨어진 의혁을 양쪽으로 거칠게 붙잡는다. 어떡하지, 윤호한테 말해 줘야 하는데. 와중에도 윤호의 걱정을 하던 의혁이 조금이라도 반항하려 자신을 붙잡는 군인의 손을 피했다가 배를 걷어차이곤 정신을 잃었다.
*
평소와 같이 성화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창틀에 걸터앉아 의혁에게 오늘은 숲에서 본 기이할 정도로 곧고 큰 고목나무에 대해 말해 줄 생각이었다. 형, 나왔어. 평소 같았으면 침대에 누워서 인사를 받아 줄 의혁이 보이지 않았다. 형? 되물어도 대답은 없었다. 화장실에 있나 싶어 문을 두드렸지만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에 문을 여니 아무도 없었다. 어디 나갔나. 근데 그 형이 갈 곳이 마땅히 없을 텐데. 괜히 기분이 싸했다. 혹시 형이 혼자 나갔다가 유호연이라도 만나면 어떡하지. 급하게 방문을 열고 뛰쳐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의혁 형을 찾아야 했다.
가이드 건물을 다 돌아다녔지만 형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방으로 올라가 보려 윤호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을 때였다. 센터의 연구원 한 명이 윤호를 붙잡았다. 윤호가 놀라 연구원을 쳐다보자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소장님이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일단 알았어.“
설마, 하는 생각에 뒤로 미뤄뒀던 가설이 기정사실화되는 순간이었다. 밖에 몰래 나가던 일이 결국 걸렸다는 것. 윤호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였다. 아버지의 사무실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성화가 자꾸만 떠올랐다. 의혁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어떡하지. 도저히 제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과오로 인해 성화와 의혁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 그 생각을 하니 그제야 대충 생각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책임질 수 없어도 어떻게든 책임져야 했다. 자신이 시작한 일이기에, 자신만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윤호의 발걸음이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표정이 평소와는 달리 사뭇 가라앉아있었다. 이내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문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요즘 부쩍 가이딩을 자주 받으러 간다던데.“
”아, 맞습니다. 저 아버지, 그...“
”근데 왜 가이딩 수치는 그 전보다도 못한 거지.“
윤호의 말을 끊은 소장이 마시던 커피잔을 소리 나게 쾅 내려놓았다.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윤호를 응시했다. 소장은 윤호가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 같았다. 윤호 또한 소장을 아무런 말 없이 응시한다. 사무실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윤호가 먼저 화두를 뗐다.
”견의혁은 어디 있습니까.“
”지하실에 가둬뒀다.“
”그는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풀어 주세요.“
”상관이 없어? 네가 나가는 걸 보고하지 않은 것 그 자체로 직무유기다.“
”제가 명령했습니다. 센티넬인 제 명령을 가이드인 견의혁이 거절할 방법은 없습니다.“
윤호가 감정을 최대한 짓눌렀다.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말까지 뱉어가며 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아버지의 눈을 곧게 응시한다. 여기서 자신의 감정을 모조리 쏟아내 버리면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다. 윤호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던 소장이 윤호가 스스로 모든 걸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군인들 몇을 사무실로 호출했다. 그러곤 윤호를 쳐다보지도 않고 군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 놈 데리고 가서 방에 가둬. 못나오게 감시하고.“
”능력 못 쓰게 제어 장치도 달아.“
발버둥 쳐도 달라질 게 없었다. 윤호가 끌려 나가며 아버지를 뒤돌아본다.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지독하게도 싫은 감정들 중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시킨 일을 할 때에 윤호의 의사 따위는 반영되지 않았다. 윤호가 하기 싫다고 해서 하지 않게 된 일은 없었다. 윤호가 스스로 걷겠다며 자신의 양쪽 팔을 거칠게 잡은 군인들 손을 뿌리쳤다. 아무리 소장인 아버지에게 무시 받는다고 해도 윤호가 정명호의 아들인 건 달라지지 않는다. 윤호가 목에 채워진 능력 제어기를 손으로 건드리자 제어기가 목을 조여 왔다. 성화 형이 느꼈던 오 년 전 무력감이 이런 거였을까. 윤호의 방문이 닫혔다. 윤호가 떨군 고개를 들어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성화 형이 나를 기다리지 말아야 할 텐데. 불안감이 윤호의 목을 조인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제어기가 작동한 걸까 싶어 확인해 봤지만 아니었다. 어떡해, 어떡해요. 나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형, 성화 형. 보고 싶어요. 윤호가 방문에 기대 주저앉았다.
*
성화는 숲 속에서 매번 윤호와 만나던 그 바위 위에 앉아 윤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하지. 기지에서 애들이 아침밥 먹다 싸운 얘기를 해 줄까. 윤호가 좋아하겠다. 실실 웃으며 나눌 대화들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바위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발을 앞뒤로 흔들어보기도 했다. 평소보다 너무 늦는 윤호에 의문이 들어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윤호구나.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성화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정윤호 너 왜 이렇게 늦었...“
성화 앞에 멈춰선 사람은 윤호가 아니었다. 검은색 군복. 정부군이었다. 게다가 가슴팍에 단 배지를 보니 센터 소속이었다. 도망쳐야 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호는? 잡혀간 거야? 반란군인 나를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성화가 곁눈질로 뒤쪽을 확인했다. 같이 온 군인이 없는 건가. 이상했다. 군인은 단독행동을 하지 않는다. 분명 뒤쪽에도 군인이 있을 것이다. 성화가 몸을 돌려 옆쪽 길로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고 했다. 몸이 순간적으로 붕 떠올랐다. 그냥 군인이 아니라 염력 계열 센티넬이었던 것이다. 망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성화가 눈을 떴다. 자신이 있는 곳은 지하실 같았다. 말이 지하실이지 사실상 지하 감옥에 가까웠다.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덜그럭거리는 쇠사슬이 성화의 팔다리를 전부 옭아맨 상태였다. 엄마 아빠랑 동생이 잡혀왔던 곳이 이곳일까. 자신의 가족들이 있던 곳에 자신이 오게 됐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창살 밖으로 불규칙적이게 깜빡이는 전등이 보였다. 암담했다. 무력감이 몸을 서서히 잠식한다. 성화가 고개를 떨궜다.
끼익
얼마 지나지 않아 철창이 녹슨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바닥과 구두가 마찰되는 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성화가 떨궜던 고개를 들어 올려 소리의 근원을 확인했다. 아까 자신에게 능력을 쓴 그 염력 계열 센티넬이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은색 명찰이 성화의 눈에 들어왔다. 유호연. 기지에서 정부 소속 센티넬들의 명단을 볼 때 유호연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유호연은 그 중에서 꽤 높은 랭크를 차지하는 센티넬이었다. 호연이 성화를 응시했다. 형형한 눈빛이 꼭 먹이를 응시하는 맹수와 흡사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성화가 몸을 주춤거리며 살짝 뒤로 물리자 호연이 그런 성화를 비웃듯 말했다.
"네가 박성화야?“
"아까 나 보고 정윤호라며. 네가 정윤호가 매일 몰래 만나러 나간 사람 맞잖아.“
호연의 어투는 마치 이미 대답을 정해두고 그에 맞는 성화의 응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성화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셈이었다. 윤호는 어떻게 된 걸까. 먼저 잡혀간 걸까. 어쩐지 너무 평화롭다 했어. 성화는 대가 없는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적어도 성화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왜 그걸 몰랐을까. 지난날의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저 사람은 윤호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않을까. 와중에도 제 안위보다 윤호가 더 걱정됐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혹시 윤호가 죽었다면.
"윤호 어디 있어.“
”이거 봐라? 말을 까네.“
”윤호 어디 있냐고.“
”자기 방에 갇혀있겠지. 소장 아들이어도 이번 일은 그냥 못 넘어갈걸.“
자기 방? 소장 아들? 성화가 대체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호연을 올려다봤다. 윤호가 센터 소속이라는 건가.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저 인간이 날 무너뜨리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아니야. 윤호는 일반인인걸. 성화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 성화의 흔들리는 눈을 본 호연이 그런 성화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 번 더 비소를 지었다. 호연의 웃음소리에 광기가 서려있는 것 같았다. 호연이 미친 사람처럼 끅끅대며 웃다 순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는 성화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야, 못 믿겠어?“
”보여 줘?“
성화가 애써 호연의 시선을 피했다. 윤호를 믿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웠다. 호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호연의 무리 중 하나인 것 같았다. 호연이 그에게 윤호를 데리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설마. 성화가 다시 고개를 떨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목숨을 바쳐 실현해도 모자를 이상을 뒤로하고 눈앞에 실재하는 현실을 쫓은 내 잘못이었을까. 호연의 말을 들은 남자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공간 이동 계열 센티넬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들의 말처럼 정말 윤호가 센터 소속 사람이고, 그런 윤호를 마주하게 된다면 자신은 과연 뭐라고 말할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먹은 게 없는데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꼭 오 년 전 그날처럼.
”데려왔어.“
”... 윤호야.“
전자는 윤호를 붙잡고 눈앞에 나타난 센티넬이었고 후자는 성화였다. 윤호의 목에는 능력 제어기가 채워져 있었다. 성화를 마주한 윤호의 눈이 흔들렸다. 성화는 그런 윤호를 보자마자 호연의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됐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윤호의 표정이었다. 지금 저와 눈을 맞추고 있는 윤호는 쇠사슬에 묶여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보다도 더 불안해보였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어. 지금 그런 표정을 지어야 할 사람은 나야. 하지만 정작 윤호를 보니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았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왜 나한테 거짓말 했어. 널 믿은 내 잘못인 거야? 우리 둘 다 행복할 수 있다고 믿은 내가 어리석었던 거냐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들이 목구멍 언저리를 밑돌았다. 성화가 윤호의 시선을 먼저 피했다. 도저히 윤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너 정윤호가 센티넬인 것도 몰랐어? 둘이 만나서 대체 뭐 했냐.“
호연이 툭 던진 말에 윤호의 손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윤호가 호연을 죽일 듯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능력 제어기와 양쪽으로 윤호를 붙든 호연의 무리들 때문에 윤호는 성화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성화는 배신감에 휩싸여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정말 이 모든 게 내 잘못인 걸까. 목이 메어 왔다.
”형, 성화 형.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윤호가 다급하게 성화를 불렀다. 성화는 떨군 고개를 들어 올릴 생각이 없었다. 말하려고 했어요. 진짜예요. 형... 갑자기 끊긴 목소리에 성화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했지만 윤호는 없었다. 지하 감옥에는 다시 성화와 호연 둘만 남게 됐다. 눈가가 붉어져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성화가 호연을 올려다봤다. 호연의 시선은 여태 성화였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계속 웃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싸함을 느낀 성화가 몸을 뒤로 물리자 호연이 환하게 웃으며 성화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나 정윤호가 쩔쩔매는 거 처음 봤잖아.“
”정윤호 그 새끼한테 당한 것만 생각하면 널 찢어 죽여야 하는데. 아쉽게도 소장님이 네가 반란군 주요 인물이라 죽이지는 말라네.“
”그러니까, 적당히 처맞다가 반란군 정보도 좀 불어 주고. 성화야. 알았지?“
호연의 말을 흘려들으며 정윤호 생각을 했다. 윤호의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아까 잠깐이라도 보는 건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다. 제 감정은 체념에 가까웠다. 윤호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윤호를 원망하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제 잘못이었다. 애초에 선을 똑바로 긋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호연이 문장 끝에 제 이름을 부르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으로 제 이름이 역겹게 느껴졌다. 피할 곳이 없었으며 피할 수도 없었다. 성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암전이었다.
*
성화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았다. 성화를 다시 보길 간절히 원했지만 이런 식을 원한 건 아니었다. 뭐든 붙잡아도 모자랄 주제에 요구사항이 많았다. 큰 손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다시 방에 홀로 남은 윤호가 굳게 잠긴 문을 주먹으로 두어 번 내리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창은 모두 방탄 재질이라 깰 수도 없었다. 성화가 센터 안에 있는 걸 확인했으니 윤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화를 구해야했다. 분명 성화가 있는 곳은 지하실이었다. 그럼 그 곳엔 의혁도 있으리라 결론을 내리고는 윤호가 방 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머릿속이 온통 하얬다. 정신이 없었다. 윤호에게는 능력을 쓸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큰 제약이었다. 제어장치만 없었어도 이미 성화를 구했을 텐데. 가구로 문고리를 내려치다 자신의 서랍장을 가득 채운 가이딩 주사가 떠올랐다. 효과가 확실했지만 리스크가 큰 선택지였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윤호가 서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호에게 고민은 사치였다. 뭐가 되던 간에 윤호에겐 성화를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책장에 숨겨둔 열쇠를 찾아 서랍을 열었다. 가이딩 주사 대여섯 개가 서랍 안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윤호는 고민하지 않고 주사기를 한꺼번에 집어 들었다. 주사기를 감싸고 있던 비닐들을 벗겨냈다. 마음이 급한지 몇 번 손이 엇나갔다. 주사들을 책상에 잠시 내려놓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던졌다. 윤호가 대여섯 개의 주사들을 한꺼번에 집어 들고는 제 팔뚝에 가져다 댔다.
... 제가 교만했던 걸까요. 이 모든 게 형과 저 모두 행복할 수 있을 거라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제 교만에서부터 비롯된 재앙인 겁니까. 제발, 제발. 신이 계시다면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듣고 계신 거 압니다. 저 꼭 저희 형 살려야 합니다. 어리석은 제 자신을 믿었던 것에 사죄드립니다. 감히 책임질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모든 일을 책임지지 못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제 죄까지도 사죄드립니다. 제 어리석은 과오로 인해 무너진 모든 것들에 대한 벌은 달게 받을 테니, 형을 살릴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저를 도와주세요.
감았던 눈을 떴다. 주사기를 잡고 있었던 손이 덜덜 떨렸다. 바닥에 떨어진 주사기들은 전부 비어있었다. 윤호가 눈을 느리게 슴벅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손끝에 스파크가 일었다. 윤호가 제 목을 조여 오는 제어기를 잡아 순간적으로 많은 양의 전류를 흘려보내 오작동을 일으켜 제어기를 풀어냈다. 그러고는 벽에 손을 짚었다.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윤호가 눈을 감아 센터 내에 있는 전류의 흐름들을 읽어내고는 센터를 돌아가게 하는 모든 전류를 한꺼번에 끊어낸다. 평소에 연습할 땐 죽어도 안 되던 기술이 성공한 건 이미 복용 한계치를 넘은 약물 덕분이었다. 센터가 한꺼번에 정전이 됐다. 그제야 열린 문에 윤호가 뛰기 시작했다.
윤호가 남아있는 잔류들의 흐름을 읽어 온통 암흑인 센터 안을 뛰어다녔다. 지하실로 가는 길이 어디였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으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윤호가 지하실에는 비상 동력기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남아있는 희미한 전류를 따라가자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와 성화가 갇혀있는 곳에 도착하자 호연이 성화의 머리를 구두로 짓이기다 말고 윤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성화는 의식을 잃은 건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좀 늦었네?“
윤호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호연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호연이 윤호에게 맞고 저만치 나가떨어지자 윤호가 쓰러져있는 성화에게 뛰어가 성화를 부축했다. 형, 형. 정신 좀 차려 봐요. 늦어서 미안해요. 형, 제가 다 미안해요. 호연이 아릿한 제 턱을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이게 미쳤나. 눈이 반쯤 돌아 능력을 사용해 지하실 벽 쪽에 걸려있던 고문 기구들을 모조리 공중으로 띄운 호연이 윤호와 성화 쪽으로 팔을 크게 휘두르려던 찰나, 어디선가 쇠공이 날아와 호연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진 호연이 정신을 잃은 건지 움직이지 않았다.
”저 분이 네가 그렇게 만나러 가던 분이냐?“
”형!“
의혁이었다. 의혁의 얼굴은 하도 맞아 엉망이 된 상태였다. 나 때문이겠지. 윤호가 의혁에게 다가서려고 하자 의혁이 윤호를 멈춰 세웠다. 미쳤어? 나 목숨 걸고 너희 돕는 거야. 저 분 데리고 얼른 도망쳐. 처음 듣는 의혁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 새끼 어차피 못 일어나. 그러니까, 걱정 말고 얼른 나가. 윤호가 성화를 부축해 지하실을 빠져나가다 밑쪽을 바라봤다. 형, 형도 같이 가요. 윤호의 말에 의혁이 고개를 젓는다. 난 얘나 마저 조질래. 의혁이 잔뜩 터진 입술을 끌어올려 윤호를 보며 웃어 보인다. 형 진짜 괜찮아, 얼른 가. 윤호와 의혁 둘 다 지금이 서로가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대화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윤호도 애써 의혁에게 웃어 보였다. 형, 이따 봐요. 기약 없는 약속이었다. 의혁은 그런 윤호에게 알았다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아직까지도 센터의 동력이 전부 돌아오지 않아 군인들을 피해 센터 밖으로 나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깥은 한밤중이라 군인들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문제가 있다면 아까보다 몸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는 것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성화를 부축하는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뒷문으로 몰래 센터를 빠져나왔다. 얼마를 뛰었을까, 센터와 숲 중반쯤에 있는 커다란 엄폐물이 보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아 윤호가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다. 서있는 윤호의 손끝을 타고 윤호의 것인지 모를 핏방울들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윤호가 성화를 엄폐물에 기댈 수 있게 내려놓자 성화가 앓는 소리를 냈다. 형?
”... 윤호야.“
”형, 형. 정신이 좀 들어요?“
윤호가 성화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몸은 어때요. 걸을 수 있겠어요? 윤호의 물음에 성화가 고개를 대충 주억거렸다. 윤호가 주변에서 들려오는 사이렌에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성화가 손을 뻗어 윤호의 손을 붙잡았다. 윤호가 그런 성화를 잠시 바라보다 손가락 사이를 단단히 얽어 맞잡는다. 언제 떼어낼지, 혹은 더할지 모르는 지독한 눈치게임의 시작이었다. 먼저 둘 사이의 적막을 깬 건 성화였다.
”미안해, 윤호야.“
”형이 뭐가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형은 잘못한 거 없어.“
”미안해. 형이 미안해. 널 쳐내지 못해 미안해.“
”나는 형이 날 쳐내지 않아줘서 고마운데요.“
세상은 이미 오 년 전에 망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억지로 무너지려는 세상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형을 오 년 전에 만났다면 뭐라도 달라졌을까. 저를 바라보는 성화의 눈에 슬픔이 어려 있어서 윤호는 또 한 번 무너졌다. 제가 처음 만나게 된 그 날 성화에게 말을 걸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호기심은 자만심이 되었고 결국 그 감정은 윤호를 제 스스로 절대 책임지지 못할 결말로 이끌었다. 이 모든 건 자신의 교만이 낳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윤호가 고개를 떨궜다. 성화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성화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은 게 저라서. 성화의 이상을 가로막은 게 자신이기에 윤호는 더욱 성화를 바라볼 수 없었다.
성화가 윤호의 뺨을 빈손으로 감쌌다. 윤호가 놀라 성화를 바라보자 성화는 그저 웃기만 했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해서 미안해요. 형, 저는 그래도 형 만나서 좋았어요. 왜 영화 같은 곳에서 곧 본인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와중에도 소중한 사람을 붙잡고 구구절절 고백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제가 딱 그 꼴이었다. 성화가 윤호를 보며 말했다. 나도 고마워. 근데 너 왜 우리가 곧 헤어질 것처럼 말해.
순간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울리는 사이렌에 놀란 윤호와 성화가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엄폐물 뒤로 센터 군인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윤호가 성화를 일으켰다. 형, 저 곧 따라갈 테니까 먼저 숲 쪽으로 가고 있어요. 뭐? 성화가 윤호의 소매를 다급하게 잡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같이 가야지. 윤호가 제 소매를 붙잡은 성화의 손을 겹쳐 잡아 떼어낸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에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윤호가 성화의 손을 끌어다 손등에 짧게 입맞췄다. 약속할게요. 잠깐 시간만 벌어놓고 형한테 갈게요. 누군가가 자신에게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며 타박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윤호는 성화를 살려야 했다.
성화가 자신을 먼저 보내려는 윤호의 눈을 올곧게 응시한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밖에 없구나. 애초에 성화가 윤호를 믿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성화의 눈에서 눈물 몇 방울이 거듭해 떨어졌다. 성화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메마른 땅을 적신다. 아니, 이게. 왜 눈물이 나오지. 성화가 눈물을 닦으려 허둥대자 윤호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성화의 뺨을 감싸곤 엄지로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았다. 윤호의 엄지가 훑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성화의 뺨에 혈흔이 남았다. 이제 진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윤호가 성화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울지 마요, 형. 우리 어차피 좀 이따 만날 거잖아요. 그래서 안 우는 거예요, 저. 이마를 맞댄 채 윤호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꼭 윤호가 성화를 처음 만난 그 날 지었던 웃음과 흡사했다.
조심해요, 그리고 이거 가져가요. 윤호가 품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성화에게 건넸다. 저 예전에 형이 저한테 조명탄 줄 때 한 말 똑같이 따라해 봤는데. 어때요? 좀 비슷해요? 응, 비슷하네. 성화가 권총을 건네받고는 잡고 있던 윤호의 손을 놓았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윤호의 말에 성화가 숲 쪽으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몸이 불편한지 절뚝거리며 점점 작아져가는 성화의 모습을 보던 윤호가 엄폐물 너머를 응시했다. 내가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할 텐데. 윤호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가이딩 약물이 든 주사기를 꺼냈다. 아까 센터를 빠져나올 때 떨어져있는 응급 키트에서 챙긴 것이었다. 윤호가 입으로 주사기를 감싸고 있던 비닐을 벗기곤 대충 옷을 걷어 올려 아까의 바늘자국들 옆에 주사를 찔러 넣었다. 몸이 더 이상 버티질 못하는지 입에서 알싸한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윤호가 엄폐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검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의 총구가 일제히 윤호를 향했다. 군인들의 앞엔 자신의 아버지인 정명호 소장과 유호연, 그리고 그의 무리들이 있었다. 윤호가 호연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의혁을 그렇게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윤호가 이빨을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물었다. 약물을 너무 많이 투여한 탓인지 몸이 끓는 것 같았다. 성화를 위해서라도 버텨야했다. 윤호가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주변에 스파크와 불꽃이 일었다. 한계였다. 끝내 윤호의 능력이 윤호를 집어삼켰다.
*
얼마를 뛰었을까. 저와 윤호의 전부였던 그 숲에 도착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봤지만 윤호는 없었다. 성화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더 숨이 찼다. 아무래도 아까 지하실에서 배를 너무 세게 걷어차인 탓인가 보다. 마른기침을 몇 번 하며 산의 중턱 쯤 올라갔을 때 센터 쪽에서 큰 굉음이 들렸다. 성화가 빠른 걸음으로 산 중턱에 이르러 센터가 있는 쪽을 내려다 봤다. 땅이 폭탄을 맞은 것 마냥 돔 형태로 푹 파여 있었다. 구덩이의 중간에 누군가 우뚝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머리가 노란 색이었다. 정윤호였다. 윤호가 살았구나. 성화가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센터와 꽤 멀리 떨어진 숲까지도 들릴 정도의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윤호가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아, 아. 안 돼.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성화의 세상이 결국 점멸의 끝에 이르렀다.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았던 성화가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섰다. 여기서 멈춰있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두 다리를 억지로 끌어 산 반대편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벅지에 경련이 와 움직이지 않을 때마다 그곳을 주먹으로 때려가며 걸었다. 그렇게 걷는 와중에도 윤호가 죽은 게 아니라는 순진하고 오만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걸어가다 보면 네가 날 붙잡지 않을까. 이렇게 걸어가다 보면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며 늦어서 미안하다고 환하게 웃지 않을까. 윤호와 함께라면 어느 곳을 가든 좋았지만 지금 박성화의 옆에 정윤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방황할 수도 없었다. 성화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 어떡하면 좋아, 윤호야.
성화가 센터와 꽤 먼 곳까지 쉬지 않고 걸어왔다. 모든 걸 잃은 성화가 갈 곳은 오 년 전부터 한 군데 뿐이었다. 본래 제가 몸을 담구고 있던, 바로 그 곳. 동이 터오며 한기가 서린 땅을 햇볕이 비추기 시작함과 동시에 익숙한 천막과 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부인인가 싶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성화에게 다가왔던 반란군 신입들이 성화의 얼굴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라더니 성화를 부축했다. 성화가 괜찮다며 그들의 손길을 거절하고 절뚝이며 홍중의 사무실로 향했다. 센터가 뒤집어졌으니 지금이 반란군에겐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성화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 박성화.“
”다들 잠깐만 나가있어 주세요.“
회의를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성화를 위아래로 훑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개중에는 성화의 옛 친구도 있었다. 홍중이 놀라 성화에게 다가왔다. 너 어딜 다녀온 거야. 무슨 생각으로 여길 다시 왔어. 센터에 잡혀갔다 오면 어떻게 되는지 네가 제일 잘 알면서. 홍중이 성화를 다그쳤다. 목소리에는 걱정과 분노, 슬픔 등 여러 감정들이 서려있었다.
”우린 센터에서 큰 내부 분열이 있었다는 것밖에 몰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성화야. 네가 말해 줘야 우리가 움직일 수 있...“
성화가 홍중의 말을 가만히 듣다 품에 있던 권총을 꺼내 장전한 후 홍중에게 다가갔다. 홍중은 피하지 않았다. 성화가 홍중의 손에 권총을 쥐어 주곤 제 머리를 총구에 가져다 댔다. 역설적이게도 차가운 쇠붙이가 이마에 닿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총을 쥔 홍중의 손이 잘게 떨렸다.
새벽에 일어난 일이 꿈만 같았다. 세상이 떠났고 별이 저문 데다 꽃이 시들었으며 시간이 멈추었다. 여전히 우주는 팽창하고 지구는 태양을 공전하고 낮과 밤이 바뀌었다. 적어도 나는 전부를 상실한 나머지 호흡이 고통스럽고 영영 움직임을 그만두고 싶은데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세계가 이상했다.
”홍중아. 네가 날 단 한 번이라도 친구로 여겼다면 아무것도 묻지 말아 줘.“
”미안해.“
고요한 기지 안에 한 번의 총성이 울렸다. 갑작스레 생긴 공백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해와 달은 저물고 뜨는 걸 반복했다. 윤호와 성화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숲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윤호와 성화를 잃고 남겨진 이들은 그저 죽은 이들을 새길 생존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