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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직도 나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제타

그는 아직 안 들켰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를 꿰뚫어봤다. 평소에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사는 나인데, 그런 나에게까지 보일 정도로 그가 투명한 사람인 것인지, 군대에서 선임에게 혼날 때도 자고 있던 눈치 세포가 본능적으로 도망치라고 처음으로 일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바람 현장을 목격하고도 그저 밝고 순수한 애인 행세를 하였다. 그가 나를 속이는 것처럼 나도 그를 속인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밝고 순수한 애인 또한 나의 자아의 일부이며 침묵은 거짓이 아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아마 그도 분명 나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향수를 절대 뿌리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화장하는 것 까지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혹시 몰라 가방 구석에서 작은 향수 공병을 꺼냈다. 그는 내 향수 냄새를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한 번도 향수를 뿌린 적이 없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난 것이기 때문에 데이트와는 살짝 안 어울리는 회색 후드를 입고 있었다. 물론 내가 입은 것도 방금까지 함께 있던 그와 같이 산 쥐색 맨투맨이었다. 그의 어깨너머 노트북 화면에는 ‘교만’의 검색 결과가 띄워져 있었다. 살짝 어깨를 잡자 뒤돌아보는 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 피어 있다.

 

 

 

아마 이번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이었을 것이다. 내가 본가에 가 잠깐 롱디가 된 사이인지 아니면 그전부터 만났는데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바람 상대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의 바람 상대는 나랑 정말 달랐다. 잠깐만 지켜봐도 알 수 있었다. 생긴 것부터 옷 입는 스타일, 그리고 그를 대하는 태도까지도 겹치는 것이 없었다. 어쩌면 다행인가 싶었다. 적어도 누군가의 대체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그의 자신감을 넘어선 교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람 현장을 목격한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진짜 애인은 나인데 누군가의 대체재가 될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집에 도착한 나를 덮쳐왔고 그날 결국 그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소매를 적셨다. 하지만 그도 아직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너무 사랑했다.

 

 

 

그는 항상 바빴다. 물론 그걸 알고 고백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오늘도 나를 만나기 전까지 과제를 붙잡고 있던 것 같지만 내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노트북을 닫았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나는 문득 궁금해졌었다. 저기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어디 있었을까? 숨기는 연애는 내 성격에 안 맞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물어봤고 그는 ‘처음부터 네 자리는 남겨두고 있었으니까’ 하고 대답했었다. 꽤나 로맨틱한 면이 있었다.

 

 

 

“여상아, 너는 그렇게 바쁜데 내가 들어갈 틈이 있어?”

 

그냥 다시 한 번 묻고 싶었다.

 

카페는 어수선했고 나는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전의 대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 하나로 나는 아직 그에게 기댈 수 있었다. 애초에 그의 어깨는 양쪽이었고 내가 기댈 수 있던 자리는 한쪽밖에 없다는 것. 그와 나의 관계에도 끝이 존재할 것이다. 만약 그의 바람 상대가 나보다 먼저 그와 헤어진다면 나는 또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을까? 그게 몇 번이고 반복되어도 그는 나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고 그를 이렇게까지 믿는 것인지. 믿음이 아니라 나의 일방적인 기대일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확신에 가득 차 있고 겁이 없었으며 나는 그 확신에 착실하게 부응했고 겁이 많았다. 그 증거로 오늘도 향수를 진하게 뿌리고 옷은 향과 어울리지 않는 스포티한 룩을 입었다.

 

 

 

그의 웃는 모습을 보고 반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나에게 웃어줬다. 단 걸 좋아하는 그의 앞에는 종류와 만나는 카페에 상관없이 항상 케이크가 있었고 나에게 꼭 한 입씩 먹어보라고 했다. 그가 조금씩 주는 케이크 한 입은 그의 마음에서 나에게 주는 공간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작아 보이겠지만 그게 하루, 이틀, 한 달, 그리고 일 년이 쌓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른 듯 근육이 있는 그의 몸이 좋았다. 그를 처음 봤을 때도 여자 동기들이 좋아하던 커스텀 10개쯤 되는 음료를 들고 있어서 하얗고 말랑한 몸을 상상했다. 벗겨보니 말랑한 곳은 볼과 작은 엉덩이뿐이었지만. 그는 생각보다 부끄러움이 많았고 그래서 더 아래로 피가 쏠렸다.

 

 

 

아직까지 행복해하는 애인을 연기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이것도 나의 모습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연기가 된 것이다. 그를 보면 환하게 웃을 수 있고 섹스를 할 때도 그가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속은 뭉그러지고 있었다. 나는 너무 괴로운데, 또 한 편으로는 그를 놓지 못했다. 마지막 끈마저 놓쳐버린 나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갈 때도 나는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점점 소매가 젖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 환하게 웃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평소같이 웃고 있는 그를 생각하며 들어온 카페에는 같이 있으면 안 되는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난 것에는 남들이 흔히 생각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롱디라고 하지만 평일에는 거의 매일 영상통화를 하고 주말마다 만나 외롭다고 느낀 적도 없었고, 새로 만난 애인이 그와 특별히 다른 매력을 가져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던 것이 떠올랐다. 그의 모니터 상위에 있던 문장이었다.

 

 

 

그의 바람 상대와 단 둘이 만났을 때 그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나의 반응에 놀란 표정이었다. 의외였던 사실은 그는 본인이 바람 상대였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 사람도 나처럼 그의 교만함에 속은 걸까? 애초에 이 사람은 내 관심 밖이었다. 어쩌면 정말 교만한 것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으로 인해 나와 그의 관계가 변할 정도로 큰 영향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나 이 사람이나 똑같은 상황이면 결국 키는 그가 쥐게 된다. 왜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쥔 키를 못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 때 그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고, 문과 가까운 쪽에 앉은 그의 바람 상대와 한 프레임에 있는 것을 보자 얼굴의 가면이 벗겨졌다. 연기를 포기한 것은 또 다른 교만이었다. 내가 더 이상 잘 웃고 착한 애인이 아니어도 그가 나를 못 놓을 것이라는 교만. 키를 쥐었지만 내가 그 키를 쓸 자신이 없던 것과 다르게 키를 쥐고 있는 그의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를 기다리면서 교만의 뜻을 찾아본 적이 있다. 검색창에 쓰인 한 문장은 ‘겸손함이 없이 잘난 체하여 방자하고 버릇이 없음을 일컫는 말’ 이었다.

 

 

 

나는 버릇이 없었으며 그는 그것을 알고도 자신의 잘난체를 위해 나를 감수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헛웃음을 치던 나를 3개월 된 애인은 질린다는 듯이 쳐다보았고 자리를 떴다. 이것마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나를 소유하는 방법을 가장 완벽하게 알고 있었으며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보았자 할 수 있는 것은 버릇의 형체를 바꾸는 것뿐이었다. 강여상도 정우영도 이제서야 서로에 대해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이제 알 것이다. 나는 이제 그를 꿰뚫어봤다.

 

 

정우영은 버릇이 없어 나를 두고도 바람을 피웠으며 강여상은 바람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자신이 그의 마지막 연인으로 남을 것이라는 잘난 체를 하였던 것이다. 우리 둘이 합쳐져 완벽한 교만을 만들어 냈으며 그 사실을 알고도 변하지 않은 우리는 앞으로 이런 관계를 지속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교만에 대한 죗값은 서로에 대한 끊임없는 상처로 치를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의 버릇이 사라지더라도 또 새로운 버릇이 생길 것이고 나의 반쪽짜리 교만 또한 그의 버릇에 형체를 맞출 것이다.

 

 

 

 

 

 

지긋지긋 했다. 나는 또 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앞에 앉아있었다. 그도 지긋지긋한 표정이었다. 예전이라면 여전히 환한 웃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웃음은 그가 상처받았을 때 짓는 웃음이라는 것을. 그는 처음부터 상처받는 역할을 자처했다. 그래야 내 버릇이 바뀌었을 때 더 큰 사랑을 느낀다 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그 말에 상처받았지만 그의 상처와 나의 상처를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내가 아직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그도 분명 나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그와 만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에게 새로운 버릇이 생기지 않아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았다. 나는 아물어가는 상처를 보며 연애 초반, 내가 그의 버릇을 모르고 그도 나의 방자함을 몰랐을 때에는 어떻게 연애를 한 것인지 되돌아보았다. 미디어에 나오는 보통 연인처럼 지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첫 번째 버릇이 나에게 들키지 않았었다면, 그리고 내가 그를 포기했다면 우리는 내가 가면을 벗은 그 순간 남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케이크를 먹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나에게 오는 한 입도 없어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의 네 번째 버릇은 카페에 가면 케이크 시키기가 되었다. 애인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과 애인의 예전 습관을 따라가는 것이 무슨 연관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게 내 진짜 버릇이 된 것인지 의문이었다.

 

 

내가 대학시절 카페에 가면 꼭 케이크를 한 입씩 주던 것처럼 그도 이제 나에게 케이크를 한 입씩 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가 그에게 했던 행동과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제 우리를 더 견고하게 해줬던 그의 예전 바람 상대를 만났다.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직 터지지 않은 그의 버릇이 사그라들지 모른다. 나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그 몰래 그의 예전 바람 상대를 만날 것이다. 남들이 우리 커플의 실체를 알면 뭐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로 그를 사랑했고 그만큼 나와 잘 맞는 상대가 없을 것이며 그도 나만큼 잘 맞는 상대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 나도 마침 상처받은 연기를 하기 지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가 상처를 주고 그에게 상처받는 즐거움을 알려줄 차례였다. 그는 아직도 나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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