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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장군

매미가 찌르르찌르르대며 울어댄다. 창문이라고도 부르기 뭐한 틈새 사이로 짜증나게 울어대는 그 매미 소리가 들려온다. 방 안의 사람들은 그걸 콱 죽여 버리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총알이 벽을 뚫고 나갈 수만 있다면 밖의 매미에게 명중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바보 같고 무모한 짓을 하지 않는다. 목이 달아나는 건 둘째 치고 엄청난 소동이 벌어질 거다. 그 결과로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음 도망 감옥 중 택 1, 하나도 좋을 게 못 되는 선택에 기로에 설 것이다.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은 여전히 긴 소매의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에어컨을 틀어 줄 만한 가치도 없다는 듯이, 켜지지 않는 에어컨을 망연히 바라보며 정우영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나가떨어진 지 오래였다. 정우영은 그들을 보면서 승리감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난 좀 자만해도 돼. 아무래도 바닥이 조금 불편했는지 정우영은 상석으로 보이는 가장 편안한 1인용 소파에 몸을 늘어뜨렸다. 자만심을 느낄 틈도 없이 곧 문이 열릴 듯이 덜컹거렸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사람, 의자에 퍼질러져 있던 사람 할 것 없이 재빨리 일어섰다.

 

“총성이 하나도 들리지 않더군. 도통 연습이 잘 되어 가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총책임자의 말에 침묵이 흘렀다. 그가 명부를 열자 모두가 일렬로 늘어섰다. 줄의 순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가나다순으로 맞춰졌고, 더 말할 것도 없이 완벽한 일자였다. 총책임자 백 씨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들었다. 어떻게 하는지는 다들 알겠지. 날씨와는 정반대로 싸늘한 말투였다. 네! 너른 방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곽진명.”

 

이름이 불리자 키가 작은 소년이 걸어 나갔다.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적응을 못해 쩔쩔매고 있다. 다만 그 누구도 그에게 동정심은 느끼지 않았다. 다들 자기 앞가림에 급급했으니까 당연한 처사였다.

곧 총성이 세 번 울린다. 명중한 총알은 하나도 없었다. 형편없군.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총책임자는 다음 이름을 불렀다. 맨 앞에 있던 소년은 안 그래도 작은 체구가 더 작아 보이게 몸을 움츠리며 줄에서 빠져나갔다. 그 다음에 선 사람은 김홍중이었다. 말이 필요 없는 에이스 팀의 일원이었다 ― 그마저도 정우영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아까와 똑같이 총성이 세 번 울렸다. 다만 이전의 것보다는 총성의 간격이 일정했다. 두 발은 명중한다. 한 발은 중앙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본인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지만 그럼에도 모두의 선망의 눈빛을 받는다. 하지만 총책임자만은 칭찬할 거리가 아니라는 듯 바로 다음 이름을 호명했다.

 

이름이 불린 후 세 번의 총성이 들리기가 반복되었다. 아무리 봐도 김홍중보다 뛰어난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그나마 그 근처라도 간 사람이라면 역시 에이스 집단의 일원인 박성화 정도였다. 박성화의 총알 중 두 발은 명중했고 한 발은 바깥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 때문에 방해받았기 때문인지 조금 빗맞았다. 어쨌든 김홍중을 제외하면 가장 좋은 성과였다.

 

“장성진.”

 

벌써 ㅈ까지 순서가 돌았다는 사실에 정신을 빼고 있던 정우영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앞의 장성진은 여느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의 사격을 보여줬다. 역시 총책임자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장성진이 옆으로 빠지자 정우영이 한 걸음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뒤를 슬쩍 돌아보자 바로 다음 순서인 정윤호가 응원의 눈길을 보냈다. 부동의 1위답게 누구보다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모두의 기대를 받으면서 정우영은 총기를 손에 그러쥐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총성이 울렸다. 탕, 탕, 탕. 더 할 말도 없이 모든 총알이 중앙에 명중했다. 모든 사람이 정우영을 쳐다봤다. 그 눈빛들 틈에는 동경도, 선망도, 질투도 섞여 있었다. 총책임자는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았다.”

 

짧은 말이었지만 정우영의 사기를 올리기에는 충분했다. 총책임자는 누구보다 칭찬에 인색했으니 그 정도의 칭찬은 극찬이었다. 정우영도 옆으로 스윽 빠졌다. 김홍중이 칭찬의 의미로 정우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말이지, 자만에 빠지기에 딱 좋았다.

 

 

-

 

 

벙커 침대에 올라가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는 건 정우영의 한 가지 취미였다. 정우영은 드러누운 채로 오늘의 성과를 곱씹는다. 사격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낸 건 당연한 거였고. 그 외에 별 게 있나? 생각해 보면 그 이외에는 그리 대단한 일은 없었다. 다만 오늘 처음으로 사격 평가를 해 본 신입들이 현장에 나가 봤느냐, 실제로 사람을 상대로 총을 쏴 봤느냐 등의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심기를 건드리긴 했다. 정우영은 그럴 때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거 궁금해 할 시간에 연습이나 해. 그 실력으로는 평생 현장 나가 보지도 못할 거니까. 당연하게도 싸움이 붙기 딱 좋은 멘트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우영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정우영은 사격에서만 뛰어난 게 아니었으니까. 쟤네는 실력 전에 깡이 없어서 현장 나가기는 글렀구만. 정우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현장에 나가본 적 있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물론 수없이 받아 봤다. 심지어는 사람을 죽여본 적 있냐는 질문까지도. 다 터무니없는 뜬소문에서 비롯된 거였다 - 사실 그건 정우영의 주변 사람들이 정우영을 두둔하기 위해 해 주는 말이었지만. 정우영은 그 질문들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들어온 이유가 어쩌면 그 ‘현장’과 관계있는 일이었으니까.

 

 

총탄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게 반란군과의 격전지인 듯했다. 어린 정우영은 그 틈바구니 어디에서인가 귀를 막고 떨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그 중심으로 나간 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머니는? 말릴 틈도 없이 누군가 데려가 버렸다……. 그 틈에 혼자 남겨져 안전한 곳을 찾아 들어온 곳조차도 시체들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 방이었다 -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다. 아버지의 동료들. 반정부군 식구들. 저 아저씨는 나를 참 좋아했었는데. 그렇다 해도 살아 있는 그가 아닌 죽어 있는 그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은 극히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정우영의 아버지는 만일에 대비해 총 쥐는 법을 알려줬고 그건 나름 쓸모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그의 아버지는 어린 정우영에게 그걸 알려준 것이다. 어쨌든 그건 도움이 되었다. 한참 동안 시체들 틈바구니에서 쪼그려 앉아 있다 보니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어졌고 배는 음식을 공급해 달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먹을 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점점 더 배고픔은 심해졌고 참을 수 없는 경지에 다다랐다. 밖은 총격전이 한창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우영은 아저씨의 손에 들린 총을 스윽 빼냈다. 미안해요, 아저씨.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정우영은 문 바로 앞까지 가서 주변을 살폈다.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아무도 어린애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우영은 문틈 새로 발을 냈다.

 

밖으로 나가자 차라리 시체 틈에 섞여있는 게 훨씬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는 피가 가득했고 숨이 겨우 붙어 있는, 방금 본 시체들보다 훨씬 심각한 사람들이 길에 나뒹굴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정우영의 머리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지만 다리는 길바닥에 딱 붙어버린 듯 움직이질 않았다. 공포에 장악당한 정신은 거리로 발을 내딛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까지 망각해 버렸다. 그런 정우영의 정신이 들게 한 건 비명소리였다. 눈을 감았다 뜨니 현장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정우영은 방금까지 눈앞에서 총격전을 벌이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쓰러지는 걸 보았다. 그의 상대는 멀끔한 제복 차림으로 서 있는 걸 보니 정부군인 것 같았다. 그 중 하나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이쪽은 보면 안 돼. 그는 계속 고개를 돌렸다. 제발 보지 마. 그의 시야에 정우영이 들어온다. 안 돼 - 딱 봐도 무자비해 보이는 인상의 정부군은 정우영을 보자 주저하는 듯싶더니 곧 총을 올린다. 정우영은 본능적으로 총기를 꽉 그러쥔다. 총을 들어 올리는 손은 덜덜 떨린다.

탕. 총성이 울렸고 그건 둘 중 어느 쪽의 총에서 난 것도 아니었다. 정우영에게 총을 올렸던 정부군 관료는 쓰러지고 있었다. 곧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가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안도감에 정우영의 손에서 총기가 빠져나갔다. 금속이 석재로 된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곧 검은 옷을 입은 몇몇이 정우영에게 달려왔다. 정부군의 제복은 아니었다. 곧 그 중 맨 앞에 뛰어오던 사람이 정우영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니, 얘야?”

 

정우영은 겨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정우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우영은 주저하다 그 손을 잡았다. 잡자마자 정우영은 들어 올려지는 기분과 함께 땅을 딛고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조금 비틀거리던 정우영을 잡았다. 곧 가장 펄럭이는 옷을 입은 남자가 정우영과 눈높이를 맞추고 앉았다.

 

“정 씨의 아들이구나.”

 

정우영은 이번에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잠시 정우영의 얼굴을 쳐다보다 말을 이어갔다.

 

“총 쏘는 건 아버지에게서 배운 거니?”

 

정우영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확실히 ‘네’의 의미였다. 남자가 다시 입을 떼기를 조금 망설이는 듯싶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함께 온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우영은 무슨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의문으로 그득 찬 머리는 조금의 작동도 하지 않았다. 곧 남자가 결연한 표정을 짓고 다시 정우영의 앞에 앉았다.

 

“이런 소식을 전해주게 되어서 매우 안타깝구나. 너희 아버지는 오늘 전투 중에 돌아가셨단다.”

 

예상했던 사실이었고 울 기력도 없었다. 정우영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조금 더 슬픈 표정이었다는 점이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었다.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여서 다행이구나.”

 

남자가 정우영을 바라보면서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우영은 그 미소가 왠지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남자가 옷을 몇 번 털고는 다시 일어났다. 그 탓에 정우영은 남자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목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일어난 이후에도 계속 정우영에게 뭔가를 말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우리도 아직 찾고 있단다. 일단 그동안에는 우리와 같이 지내야 할 것 같구나. 아버지께서 그 말을 남기셨지……. 싫으면 안 와도 된단다. 하지만 우리는 너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제공해 줄 수 있다. 교육, 숙식, 여가 활동까지도…….” 계속되던 남자의 말을 옆의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며 멈췄다.

“그런 말씀까지야 하실 필요 없습니다. 장담도 못하고, 가뜩이나 슬플 애한테…….”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의 사람이 남자가 원래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네가 오기 싫다면 안 와도 돼. 하지만 우리랑 가면 더 편하고 안전할 거야. 같이 갈래?”

 

솔직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그리고 그건 정우영도 마찬가지였다. 정우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앞의 사람이 정우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우영은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정우영은 그 날을 후회했다.

 

 

-

 

 

갓 들어온 애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사실 설명해 주기도 애매했던 게 이 시설을 정확히 정의내릴 단어가 없었다. 혁명의 근거지라기에는 개인 군대에 가깝고, 그렇다고 사적인 목적도 아니었다.

정우영이 설명한 시설은 혁명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한 개인이 설립한 훈련소였다. 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그 남자였다)의 비서 - 정우영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총책임자로써 설립한 기관이라고 했다. 정부의 승인 같은 건 당연히 받지 않았다. 총기로 열댓 살 애들한테 훈련을 시키는 게 합법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정우영은 시설에 들어오기 전부터 분명 혁명군 소속이었지만 시설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계속 이곳에 온 것을 후회했다. 혁명이 실패한 지금 그냥 일반인처럼 살아가도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실종 처리되고 - 어쩌면 사망처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펜 대신 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정우영은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때 총책임자의 손을 뿌리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다른 누군가 나를 발견했겠지. 어쩌면 죽었을지도 몰라. 생각이 생각을 물고 올라오고 그 생각들은 끔찍한 기억을 몰아온다. 다만 그 생각의 끝에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총책임자는 정우영이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정우영에게 과외 선생을 붙여 공부를 시켰다. 곧 총책임자는 정우영이 공부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시설의 분위기 때문에 억눌려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총책임자는 그의 상관에게 정우영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제안했다 - 결과는 미친놈이라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싸대기였다. 아무래도 정우영을 사무직으로 키우는 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 총책임자는 정우영의 손에 다시 총을 쥐어줬다. 당연히 총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정우영은 익숙하다는 듯이 총을 손에 쥐었다.

총책임자는 바로 다음 날부터 정우영에게 본격적인 훈련을 시켰다. 그곳에서는 정우영과 나이대가 어느 정도 비슷해 보이는 아이들이 서 있었다. 총책임자의 말로는 몇 달간 훈련을 받은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사격 훈련을 하고 말미에는 항상 평가를 받았다. 그 대열에 이제는 정우영이 추가된 것이다. 총책임자는 정우영의 실력을 어느 정도 보기 위해서 평가부터 했다. 순서는 물론 가나다순이었다. 김홍중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 앞으로 나갔다. 세 발이 모두 중심을 비껴갔지만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그 다음 소년은 박성화였는데, 한 발이 완전히 빗나갔다. 수가 적어서 그런지 정우영의 차례가 빠르게 다가왔다. 정우영은 이름이 불리는 즉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 섰다. 떨리는 손은 총기를 꽉 붙들었다. 그리고 방금 모두가 그랬듯이 총을 세 발 쏘았다. 탕, 탕, 탕. 두 발이 명중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정우영의 아버지는 혁명군 중에서도 가장 명사수였고, 정우영은 그의 피를 타고난데다가 그에게 직접 사격을 배우기까지 한 거였다. 그 이후로 정우영은 들어오자마자 단연 가장 뛰어난 교육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전까지 교육생들 중 가장 뛰어났던 김홍중과 함께 다녔다 - 같이 다닐 사람이 김홍중과 그 친구들밖에 없을 정도로 수가 적긴 했지만.

그 이후로 교육생들의 수가 계속 증가했다. 정우영은 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시설에 들어오는지는 잘 몰랐다. 교육생들도 시설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몰랐다. 아마도 영화에 나오는 뒷세계 같은 건 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밝지 않나? 정우영은 그런 사소한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신입들을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 정작 본인도 혁명으로 인해 시설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면서.

 

정우영은 자신과 김홍중, 박성화, 정윤호 넷이 합쳐 에이스 팀이라 자칭했다. 다른 셋은 너무 부담스럽다며 꺼려했지만 정우영은 적극적으로 그 칭호를 사용했다. 물론 정우영은 그들 중에서 자기가 제일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교육생들보다는 확실히 다른 세 명이 나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우영은 이 셋과 같이 다니는 것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다른 셋도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우영이 그 셋 중 가장 높게 평가하는 건 역시 가장 뛰어난 데다 그의 조에서 조장까지 맡고 있는 김홍중이었다. 그래서 김홍중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고, 또 그러려고 노력했다. 자신을 제외하면 최고의 인재였으니까. 그래서 정우영은 언젠가 한 번 김홍중에게 시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어쩌면 정우영은 김홍중이 다른 교육생들과 다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김홍중의 얼굴에는 의문만이 떠올랐다. 아니, 몰라. 넌 알아? 다른 교육생 같았으면 그것도 모르냐며 자신만만하게 설명해줬겠지만 김홍중마저 모른다는 말에 괜한 실망감이 든 정우영은 몰라서 물어본 거라며 도리어 화를 내고 말았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정우영은 본인이 화를 내고서는 김홍중을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서는 자신의 방으로 곧장 뛰어가 버렸다.

정우영은 침대에 올라갈 생각도 않고 방바닥에 누워서 생각했다. 저 형도 모르면 다른 애들은 얼마나 심각한 거야. 정우영은 실망감에 화가 나 혼자서 겨우 분을 삭혔다. 이 시설에 대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긴 한가? 정우영은 마음속으로 시설을 엄청나게 깎아내렸다. 그러고 난 뒤에는 자기가 진흙 속 핀 연꽃이 된 것 같았다.

 

 

-

 

 

가끔 정우영은 사격이 아닌 다른 실습에서는 조금 뒤쳐졌다. 그럴 때마다 정우영은 분노가 치솟았다. 이 시설에서 가장 뛰어난 건 자신이었다 ― 확실히 사격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정우영은 유도나 수영 같은 종목에서는 자신이 뒤쳐진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수영에서 부동의 1인자가 정윤호라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었지만 정우영만은 그 사실을 무시했다. 물론 정윤호는 그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에 별 일은 없었지만, 유도에서 가장 점수가 높은 교육생은 정우영과 만나기만 하면 바로 싸움이었다. 에이스 팀의 세 명은 정우영을 말리기에 급급했고 최대한 그 교육생과 정우영을 만나지 않게 하기 위해 피해 다녔다. 정우영은 셋이 그에게서 정우영을 멀리 떼 놓을 때마다 자기가 겁쟁이같이 보일 거라며 하지 말라고 악을 썼다. 하지만 다른 셋이 보기에는 정우영이 겁쟁이라기보다는 자신감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어린애였다.

박성화는 어렴풋이 정우영이 계속 저렇게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성화는 정윤호와 김홍중이 정우영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서 애쓰고 토라지지 않게 하려는 모습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럴수록 정우영의 자만심은 커져만 갔다. 계속 반복되는 악순환에 결국 박성화는 저녁 시간에 정우영이 모르도록 정윤호와 김홍중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냈다. 박성화의 방에 모인 셋은 바닥에 둘러앉았다. 영문을 모른 채 방에 들어온 둘은 셋뿐인 방에 당황했다. 우영이는 왜 없어? 김홍중의 물음을 뒤로하고 박성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영이 계속 이렇게 나둬서 될까?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데.”

“솔직히 나도 그런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어.” 김홍중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윤호에게 따라붙었다. 정윤호는 잠시 당황하는 듯싶었지만 곧이어 그도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긴 했는데……. 사실 잘 모르겠어.”

 

정윤호가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정윤호도 내색은 안 했지만 켕기는 구석이 있었을 거다 - 특히 수영에 있어서는. 박성화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애 같지, 아직.”

“애긴 하잖아.” 김홍중이 말을 잘랐다.

“우리도 애잖아. 그리고 우영이는……. 진짜 어린애 같아.”

 

김홍중은 박성화의 말을 듣고서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확실히 셋과 정우영의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셋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았던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게 조금 나아질 것 같은데?” 김홍중이 물었다.

“일단, 너무 띄워주진 마.” 조금의 간격을 두고 박성화가 말했다. 말을 한 뒤에 다시 박성화는 생각에 잠겼다. 박성화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정윤호가 픽 웃었다.

 

“이런 주제로 얘기하는 것도 웃긴데 다 진지한 것도 웃기네.” 정윤호의 말에 셋이 잠시 웃었다. 조금 풀어진 분위기로 셋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더 연습해서 정우영 이기는 건 어때?” 박성화가 말했다.

“야, 걔 연습량 봤잖아. 다른 건 몰라도 사격으로는 절대 못 따라가.” 김홍중이 손을 내저었다. 확실히 정우영의 자만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연습으로 만든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성화도 정우영이 연습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수긍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우영보다 잘하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 리는 없겠지…….” 박성화가 머리를 파묻었다. 박성화의 말과 행동에 두 사람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형, 혹시 모르지. 진짜 정우영보다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내가 걔한테 수영 1인자 자리 넘겨준다.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윤호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아, 걔 거기 없잖아! 정우영이 화를 내며 들어왔다가 셋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순간 벙쪘다. 방에 있던 셋은 당황해서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래, 나 빼고 모여 있었다 이거지. 나한테는 거짓말이나 쳐 놓고서.”

 

정우영이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김홍중은 문이 닫힘과 동시에 일어나 정우영을 달래러 뛰쳐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야, 정우영! 하는 김홍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윤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박성화를 쳐다봤다. 박성화는 그저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쟤는 구제불능이야. 박성화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간절하면 기도를 안 해도 신이 들어 준다는 말이 진짜였나 보다. 김홍중은 정우영을 찾으러 뛰쳐나오긴 했지만 정작 정우영을 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시설 이곳저곳을 정우영을 부르며 들쑤셨지만 시끄럽다는 핀잔을 들을 뿐 정우영을 찾지는 못했다. 좋아, 안 나오겠다 이거지. 확실한 건 정우영은 자신의 방에 없는 이상 7층에는 없었다. 딱히 다른 애들의 숙소에 들어갈 만큼 친한 교육생은 없었기 때문이다. 김홍중은 한숨을 쉬며 6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당에 있으면 바로 보일 텐데 아무도 없었으니깐 6층도 꽝. 하는 수 없이 한 층 더 내려간 김홍중은 들키지 않게 발소리를 죽였다. 교육생이 5층, 그러니까 중요한 일들과 문서가 오고 가는 층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는 직원은 없을 거였으니까.

정우영이 설마 여기에 왔겠어, 하면서도 김홍중은 발을 옮겼다. 최대한 들켜서는 안 됐다. 밤에 가까운 시간이라 직원은 거의 없는 걸 알면서도 김홍중은 발소리가 안 나게 걸었다. 코너에 다다른 김홍중의 눈에 갑작스럽게 많은 양의 빛이 들어왔다. 그 근원지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 딱 한 개의 사무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홍중이 가까이 가 보니 그 안에서 총책임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총책임자라고만 부르긴 하지만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교육생 총책임자였다. 총책임자가 사무 책임까지 맡는다는 건 몰랐는데. 교육생 총책임자가 아니었나? 김홍중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문 근처로 가까이 갔다.

문 안에는 처음 보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김홍중이 자기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낼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총책임자의 앞에서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김홍중이 총책임자의 말을 더 선명하게 듣기 위해 문에 귀를 붙였다.

 

“……여상 군이 들어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자네같이 뛰어난 교육생이 아직까지는 없었는데…….”

 

김홍중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니까 총책임자의 말이 진실이라면 총책임자 앞의 저 소년은 정우영보다도 뛰어나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박성화의 계획 아닌 계획은 사실이 되리라는 말이다. 그래, 박성화가 아주 좋아하겠구만. 김홍중은 더욱더 문에 붙었다. 문의 유리로 머쓱해하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내일부터 바로 훈련 시작하겠다. B조니까……. 10시 수영 훈련부터 시작하겠군. 자네 방은 720호야. 열쇠 받아라. 푹 쉬고 내일 훈련 때 보자.”

 

B조라면 김홍중을 포함한 넷이 있는 조였다. 정말 운명이네, 어떤 의미로는. 김홍중이 강여상을 쳐다봤다. 그는 총책임자가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김홍중이 숨을 틈도 없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리고 - 총책임자가 문을 열었고 김홍중과 총책임자의 눈이 마주쳤다.

 

“어, 안녕하세요…….”

“홍중 군?”

 

이 시간에 밖에 돌아다니면 안 될 텐데. 총책임자의 눈이 잠시 싸늘한 시선을 보내왔다. 하지만 강여상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건지 다시 이전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늘은 잘 왔네. 신입생이 들어왔거든. 그리고 마침 가장 오래 시설에 있었던 홍중 군이 여기에 오다니……. 차마 혼낼 순 없겠군.” 총책임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픽 웃었다. 그가 다시 목을 큼큼거리며 다듬었다. 그리고 김홍중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면서 말했다. “그 기간만큼 시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지?”

“네.” 김홍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러면 여상 군을 안내해 주게. 아, 먼저 인사부터 하고. 그러면 나는 이만 들어가 보겠네.” 총책임자는 말을 마치고 어두운 복도 속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5층에는 여상이라는 신입생과 김홍중만 남았다. 신입생이 방에서 조심스럽게 걸어 나온다. 김홍중이 그를 돌아보자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김홍중이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 난 김홍중이야. 너랑 같은 B조고, 조장이야.” 김홍중이 악수를 요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아, 저는…….” 신입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이라는 말에 김홍중이 손사래를 쳤다.

“존댓말 안 써도 돼.” 김홍중의 말에 신입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신의 소개를 했다. “나는 강여상이야.” 강여상이 김홍중의 손을 맞잡았다. 둘이 잡은 손을 살짝 흔들고 놓았다.

“방금 하는 얘기 들었어. 총책임자님이 너 잘 한다고…….” 김홍중이 살짝 웃었다. 강여상의 얼굴이 붉어졌다 -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잘 하진 않아. 다들 나만큼은 할 거야.” 강여상이 말했다. 하지만 김홍중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총책임자는 그 누구보다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고, 우리 중에 가장 뛰어‘났던’ 정우영에게도 ‘괜찮다’라고만 했지 ‘뛰어나다’라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던 거다.

강여상의 대답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홍중의 목소리가 그 대기를 갈랐다. “이제 다 잘 시간이니까 우리도 올라가야 돼.” 김홍중의 말에 둘이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는 7층에 있어. 식당은 6층이고. 여긴 5층이니까 2층만 더 올라가면 돼. 너 방 호수가 몇 호랬지?” 계단을 올라가는 중 던져진 김홍중의 질문에 강여상이 방 열쇠를 내밀었다. 김홍중이 열쇠를 받아 들고 호수를 확인했다. “720호면……. 가동이야. 우리랑 같은 동이네. 난 718호야. 옆옆 방이니까 혹시라도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러 와도 돼.” 어느새 둘은 7층에 도착해 있었다. 720호는 바로 보였다. 김홍중이 열쇠를 다시 강여상에게 돌려줬다. 그럼 잘 자. 김홍중의 말에 강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여상이 방에 들어가는 걸 확인한 김홍중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잊고 있던 것들이 밀려왔다. 맞다, 정우영. 취침 시간에 밖을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두 번의 용서는 없을지언정 어쩔 수가 없었다. 정우영을 찾으러 나서지 않으면 내일 하루 종일 삐진 상태인 정우영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

 

 

괘씸하게도 정우영은 자신의 방에 있었다. 김홍중은 그의 방부터 찾아가지 않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도 안 하고 돌아선 정우영이 짜증나기도 해서 여러모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와중에 새로 들어온 강여상까지 챙겨야 했으니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살짝 삐진 척을 하려던 정우영도 김홍중의 낯빛을 보고는 그만뒀다.

김홍중이 기분이 안 좋으니 왠지 모르게 박성화도 저기압이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 식당에서 축 처진 분위기로 식사 중이던 넷 사이에는 한 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 분명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건 김홍중이었는데 가장 침울해 보이는 건 정우영이었다 - 아마 모두가 저기압이라 어제 일에 대해서 투정을 못 부리기 때문일 거다. 김홍중은 조용히 밥만 먹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확 들었다. 그리고 박성화에게 눈짓을 했다. 박성화는 단박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김홍중은 손동작을 추가했다. 너, 나랑, 밖으로.

 

“무슨 뜻이야……. 나랑 밥 먹을래 아니면 나갈래?” 박성화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뭔 소리야. 따라 나와.” 보다 못한 김홍중이 박성화를 끌고 나갔다. 박성화는 밥을 먹는 도중에도 순순히 끌려 나가 줬다.

 

“왜 불렀어?”

“네가 어제 말한 거 있잖아. 정우영 얘기.”

“어, 그랬지.” 박성화가 말하다가 잠시 멈췄다. “근데 그냥 해 본 소리였어. 잊어버려도 돼.” 김홍중이 생각보다 무미건조한 박성화의 반응에 당황했다. 나 가 봐도 돼? 박성화가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다급해진 김홍중은 빠르게 말했다.

 

“진짜로 정우영보다 잘하는 사람이 들어온 것 같아.” 박성화가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김홍중을 쳐다봤다. 진짜야? 김홍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책임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칭찬 잘 안 하는 사람이잖아.” 박성화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확실히 그래. 난 걔가 사격 좀 잘했으면 좋겠네.” 김홍중이 박성화의 말에 픽 웃었다.

 

 

수영 훈련은 평소 같았다. 다만 내가 강여상을 챙겨야 해서 같이 다니던 셋을 뒤로하고 강여상과 수영장까지 같이 가야 했던 게 차이점이었다. 막 수영 훈련을 시작했을 때, 아무래도 정우영은 강여상을 당연히 자기 아래로 보는 것 같았고 강여상은 정우영에 대해서 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았다. 수영 실력은 둘 다 고만고만했다. 아마 강여상이 뛰어난 분야는 사격일 거라고 김홍중은 생각했다. 다른 것보다도 사격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총책임자도 그렇게 말했으리라는 추론이었다.

강여상을 처음 본 아이들의 반응은 김홍중이 강여상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했다. 잘생겨서인지 그냥 신입생이 들어온 게 오랜만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아이들의 시선은 강여상에게 쏠렸다. 정우영도 강여상을 처음 봤을 때 놀라는 듯싶었다 ― 아마 외모 때문인 듯했다. 그리고 강여상이 저와 실력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는 뭔가 자극받은 듯 평소보다 더 연습에 임했다. 쉬엄쉬엄 해, 라는 정윤호의 목소리는 닿지 못한 듯했다.

 

최종적으로는 정우영의 기록이 강여상의 기록보다 짧았다. 그런데도 정우영은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수영장을 나섰다. 그 와중에 김홍중이 강여상을 다음 훈련에 데려다주러 가서 정우영의 낯빛은 더욱 더 어두워졌다. 박성화가 정우영의 눈치를 살폈다. 박성화가 정우영에게 말을 걸기도 전에 정우영이 짜증을 냈다.

 

“쟤 뭐야?”

“저 신입생?” 정윤호의 말에 정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게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정우영은 말을 계속했다.

 

“아니, 너야 그렇다 쳐. 근데 쟤는 뭔데 처음부터 나랑 비슷해?” 정윤호는 정우영과 자신 사이에 몇 명이 더 있는 걸 굳이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박성화가 뭐라고 말하려는 걸 막았다. 정우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우영아, 다음 시간 사격이잖아, 네가 제일 잘하는 거.” 정윤호가 정우영을 달래기 위해 애를 썼다. 정우영이 다시 고개를 벌떡 들었다. 그래, 그랬지. 정우영은 금세 기운이 든 듯했다. 이번에는 박성화가 한숨을 쉬었다. 다른 둘이 박성화를 쳐다봤다.

“형, 왜 그래요?” 정윤호의 말에 박성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해 본 거야.” 박성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 둘이 박성화를 따라 갔다.

 

 

사격 연습 시간에 정우영은 강여상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사실 신경 쓰였지만 무시하려 애쓴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했다. 이번에도 가장 늦게 총을 내려놓는 건 정우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총책임자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총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박성화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쟤 진짜 작정했냐?”

“그런 것 같은데……. 평소에도 열심히 한다지만 이번에는 진짜 눈 돌아간 것 같아.”

 

신입생 하나 이겨먹겠다는 승부욕 때문에 저러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는 본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건지, 알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건 저렇게 눈에 불을 키고 누구 하나 잡아먹을 듯이 연습에 매진하는 정우영은 초면이라는 거였다. 마침내 정우영이 나가떨어졌고, 그 직후에 총책임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은 총성이 꽤나 들리던데. 어제보다는 연습을 좀 했나 보군.” 총책임자의 말에 정윤호가 정우영을 흘끗 돌아봤다. 정우영만요. 정윤호가 속으로 생각했다. 총책임자가 장부를 열었다. 모두가 가나다순으로 정렬했다. 김홍중이 강여상을 맨 앞 순서로 보냈다.

 

“나는 처음 들어왔다고 봐주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첫 순서라도 어쩔 수 없다.”

 

정우영은 강여상이 조금이라도 떨 거라고 생각했다. 곽진명이 처음 들어왔을 때도 첫 순서였는데, 걔는 벌벌 떨며 총을 쏴서 다 빗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우영이 강여상을 흘끗 쳐다봤을 때 그는 그의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강여상은 누구보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거다. 강여상이 뒤를 흘끗 돌아봤다. 짧은 찰나에 둘의 눈이 마주쳤다. 정우영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정윤호의 발을 밟았다.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강여상의 이름이 불렸다. 정우영은 오만상을 짓는 정윤호를 뒤로하고 다시 강여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강여상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걸음걸이가 훈련을 몇 번은 해 본 사람처럼 당당했다. 총을 드는 자세는 완벽했다. 총성이 세 번 울렸고 그 뒤에는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정윤호는 걱정되는 눈빛으로 정우영을 흘끗 쳐다봤다. 정우영은 충격을 받은 듯이 서 있었다. 세 발이 모두 명중했다. 완벽했다. 총책임자가 ‘괜찮았다’ 이상의 칭찬을 하는 일은 없었기에 모두가 놀랐다. 강여상은 충격 받은 얼굴들을 뒤로 하고 줄에서 빠져나왔다. 이로써 순위가 뒤바뀐 것이다.

 

 

정우영은 그 날 한 발을 비껴 쐈다.

 

 

-

 

 

정우영은 저녁을 걸렀다. 강여상에 대한 소문이 쫙 퍼진 건지 옆 동의 여자 교육생들까지 이쪽을 기웃거렸다. 걸리면 백퍼 징계 받을 텐데. 정우영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른 조의 교육생들도 강여상을 보면서 수군거렸다. 조원들은 자신에게 빌빌 기던 때는 언제고 이제 강여상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강여상은 그럴 때마다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김홍중이 신입 챙긴답시고 하루 내내 그의 옆에 붙어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붙어 대던 같은 조의 다른 교육생들이 이제는 강여상에게 친한 척 하는 꼴도, 그리고 박성화랑 정윤호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도……. 정우영의 오늘은 최악이었다. 정우영은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박성화와 정윤호를 무시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베게에 얼굴을 파묻으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사실 정우영도 인정해야 했다. 강여상은 자신보다 뛰어났다. 정우영은 자신이 처음 훈련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수영 실력이 형편없었던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사격 평가에서는 순서가 세 번째였는데도 손이 덜덜 떨리던 게 기억났다. 거기다 한 발은 빗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강여상은? 첫 평가 첫 번째 순서였는데도 긴장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총알이 중심에 맞았다. 정우영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비참해지는 기분만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가장 뛰어났던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생각이 잘 되지 않았다. 이미 가장 뛰어난 교육생은 강여상이었고 교육생들도, 총책임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우영은 강여상의 능력을 뛰어넘지 못할 거였다.

이때 정우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차라리 강여상을 내 걸로 만들면 다시 나를 동경의 눈으로 쳐다보지 않을까? 지금 강여상에게 끊임없이 들러붙는 남자 교육생들과 강여상 하나 보려고 징계 받을 각오를 하고서 옆 동에서 찾아오는 여자 교육생들을 생각해 보면 꽤나 그럴 듯한 생각이었다. 정우영은 이 생각을 하고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나 진짜 미쳤나 봐. 하지만 이게 최고의 방법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강여상이 내 거라면 강여상의 능력도 내 거인 게 아닐까. 정우영은 그런 생각에 미치자 바로 내일부터 그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친 짓이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

 

 

김홍중이 정우영의 방문을 몇 번이나 쾅쾅 두드렸지만 정우영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다른 교육생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뿐이었다. 김홍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한 8번 쯤 했을 즈음 짜증이 머리끝까지 나 그냥 문을 확 열었다. 문은 닫히지 않았었는지 그냥 열렸다. 정우영은 안에 없었다.

김홍중은 정우영이 방에 없었다는 걸 박성화와 정윤호에게 말해주기 위해 다시 6층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식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계단에 뭔가 충격받은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둘을 발견하였다. 김홍중이 박성화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안 들어가고 뭐 해?” 김홍중이 물었다. 박성화가 식당 안을 가리켰다. 김홍중이 안쪽을 흘끗 들여다보고는 기겁을 했다. 강여상과 정우영이 마주보고 밥을 먹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강여상이 자기보다 잘 하니까 밥도 안 먹더니……. 너는 왜 저러는지 알겠냐?” 박성화의 질문에 김홍중이 자기가 어떻게 알겠냐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너무 예상 밖이었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정우영에게 말이라도 걸러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 했더니 정윤호가 그를 막았다.

 

“내가 말 걸려 했는데 나보고 꺼지래. 말로는 안 하고……. 입모양으로만.” 정윤호의 말에 김홍중의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는 정우영은 누가 앞에 있든 욕 내뱉을 놈인데. 이상하네.” 그 말에 박성화가 풉 웃음을 터뜨렸지만 정윤호는 표정이 굳었다. 박성화가 정윤호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박성화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정우영이 그들에게 오고 있었던 거다.

 

“차라리 들어와서 밥을 먹어. 내 얘기 하는 거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알겠다.” 김홍중이 뭔가 변명하기도 전에 정우영이 잽싸게 말했다. “나는 여상이한테 가 볼게. 밥 먹든 말든 알아서 해.”

 

“그래, 이 싸가지가 정우영이지.” 김홍중이 정우영이 사라지자마자 말했다. 박성화는 왠지 모르게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뭔가 정우영 아닌 것 같은데. 정우영이 자기랑 안 친한 사람 성 떼고 이름으로만 부르는 거 봤어?”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정우영 아닌 것 같지?” 박성화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김홍중이 한숨을 쉬었다. “밥이나 먹자, 진짜. 강여상이랑 지지고 볶던 총질을 하던 우리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해.” 정윤호가 큭큭 웃었다. 정우영은 여전히 강여상과 마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는 알게 모르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우영은 신기하게도 매 훈련마다 강여상과 붙어 있었다. 강여상한테서 사격 팁이라도 받아오려는 건지 뭔지. 정우영의 가히 충격적인 계획을 모르는 셋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우영은 날이 밝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강여상에게 계속 캐물었다. 아침부터 강여상이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같이 아침 먹자고 불러내서는 밥을 먹는 내내 강여상에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강여상은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 정우영은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물론 훈련 이야기는 아니었고, 강여상 본인에 대한 질문이었다. 몇 살이야? 같은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서.

 

“훈련 힘들지?”

“어? 응, 조금은.”

“나도 처음에 왔을 땐 진짜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너는 잘하더라, 어제.”

 

그 말에 강여상이 어색하게 웃었다. 1등이라도 칭찬은 아직 적응이 안 됐나 보다. 확실히 그 점은 정우영과는 다른 점이었다. 정우영은 계속해서 강여상에게 말을 붙였다.

 

“홍중이 형이 너한테 잘해 줘?”

“응, 처음에 안내도 해 주고.”

“이제 내가 해 줄게.”

“어……. 괜찮아.”

 

약하긴 했지만 확실한 거절의 의미였다. 약간 풀 죽은 듯한 정우영의 모습에 강여상은 당황해서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근데 같이 다녀주면 좋을 것 같아.”

“그래? 그러면 그러자.”

“근데 너 원래 같이 다니던 친구들 있지 않았어?” 강여상이 말을 하면서 뒤를 흘끗 쳐다봤다. 물론 시선의 끝에는 정우영의 ‘에이스 팀’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여상과 정우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우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정우영은 강여상을 보고는 다시 웃었다.

“괜찮아. 너 도와준다고 하니까 다들 오케이 하던데?” 물론 거짓말이었다. 정우영은 강여상만 모르면 된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건 정우영의 착각이었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김홍중, 박성화, 그리고 정윤호가 정우영에게 다가왔다. 강여상은 영문도 모른 채 뒤로 밀려났다.

 

“너 뭔 얘기를 그렇게 했냐?” 김홍중이 물었다. 정우영이 이마를 짚었다. 김홍중마저. 진짜 죽어도 도움이 안 됐다. 박성화와 정윤호도 입을 열려는 것을 겨우 저지한 정우영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나 이제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쟤랑 친해져야 되니까 나 좀 가만히 놔 둬.” 정우영은 뭔가 반박하려는 정윤호를 뒤로하고 강여상을 향해 돌아섰다. 강여상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우영을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너 말했다고 하지 않았어?”

“어, 어어, 말했지. 그냥 할 말이 좀 있대서.” 정우영의 말에 강여상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휴게실로 가는 길이 고요했다. 강여상이 고개를 돌려 정우영을 스윽 쳐다봤다. “왜 나랑 같이 다니고 싶었던 거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정우영이 당황했다. “난 그냥……. 네가 마음에 들어서.” 마음과 다르게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강여상은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내 얼굴에 웃음을 피웠다. 정우영이 이때까지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본 적 없는 웃음이었다. 그런 말을 내뱉은 건 정우영 자신이었음에도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나도 그래.” 강여상이 정우영의 말에 대답했다. 정우영은 지금 아마 자신의 얼굴이 터지기 직전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 너무 덥다. 음료수 마실래?” 정우영이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말에 강여상이 슬쩍 웃었다. “사과 주스로.”

 

 

-

 

 

정우영은 방으로 돌아가 오늘의 성과를 곱씹어 봤다. 확실히 강여상은 자신에 대한 경계를 허문 것 같긴 했다. 그건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근데 왜 그 때 강여상의 웃음을 보고 얼굴이 붉어진 걸까.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정우영은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설마 반한 건가? 그게 맞다고 해도 인정하기 싫었다. 바로 위로 가깝게 보이는 천장의 무늬가 복잡한 게 정우영의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하긴 원래 강여상은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잘생긴 얼굴하며 성격도 다정하고. 거기다가 능력치까지 뛰어나니 강여상을 시기할 사람은 있어도 - 정우영은 자기가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다른 교육생들마저 강여상을 보러 찾아올 정도였으니. 자기도 남들이 그랬듯 그냥 자연스럽게 강여상에게 끌린 거다, 라고 정우영은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다른 교육생들보다 강여상과 보낸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그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다. 어쩌면 그에게 끌리는 것도 당연한 거였다 - 하지만 그게 친구로써의 감정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강여상이 씨익 웃던 게 생각났다. 입꼬리에 걸린 웃음은 예의상 나에게 지어 준 것일 거다. 괜히 의미부여해봤자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정우영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강여상의 생각이 지워지진 않았다.

 

 

-

 

 

정우영은 오늘도 저녁을 걸렀다. 오늘은 또 왜? 라고 묻는다면 수영에서마저 강여상이 정우영의 기록을 깨 버린 거였다. 자신의 뒤통수에 대고 이름을 불러대는 강여상을 뒤로하고 정우영은 방으로 들어왔다. 정작 방에 들어오니까 할 일도 없어서 눈이나 붙이기 위해 침대에 올라가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어보니 강여상이 서 있었다. 강여상은 예의 그 미소를 희미하게 띠고 있었다. 왜인지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들어가도 돼?”

“밤에 이렇게 막 돌아다니면 안 될 텐데.”

 

강여상은 정우영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정우영의 방으로 들어갔다. 허락도 안 받은 손님 치고는 아주 당당한 태도였다. 의자에 걸터앉은 강여상은 정우영을 올려다봤다. 정우영은 뭔가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불편해? 나갈까?”

“어, 근데 나가지는 마.”

 

강여상이 어색한 정우영의 말에 입꼬리를 스윽 당겼다. 예상한 것과 같이 정우영은 참 투명한 사람이었다. 앞뒤 행동이 뻔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강여상은 이미 정우영의 계략을 다 눈치챘다. 어렸을 때부터 남 눈치 보며 사느라 이미 그런 건 통달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저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행동하는 것. 강여상은 그 틈바구니에서 그 수들을 다 읽으며 자라왔다. 썩어빠진 바닥에서 더 이상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한 강여상은 그 밤을 틈타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그들과 전혀 반대되는 곳으로 가려면 - 혁명군에게로 발을 돌려야겠지. 얼마 전 그들에게서 혁명군의 훈련소가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강여상은 그가 어디로 가야 할 지 단서를 얻었다. 한참을 괴물들 사이에 끼여 총을 쏴 온 게 누구인데. 그리고 거기서 악착같이 1등을 먹은 게 누군데. 총질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있었다.

하지만 들어간 시설은 기대에 발끝도 미치지 못했다. 형편없는 실력들에 그들과 거의 다름없는 사상. 죄다 부수고 순종하지 않으면 죽여라. 어딜 가든 콩가루 인생인가. 강여상은 어쩔 수 없이 그 제도에 순종했다. 하나 장점이 있다면 여기서는 아등바등 노력하지 않고서도 1위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거였다. 다만 그에게는 딱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었다. 모두가 그를 올려다볼 때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던 정우영. 아마 전에 왕좌에 앉아 있었을 거다. 열등감과 질투심이겠지 - 1위를 빼앗긴 것에 대한 감정이 치솟을 거였다. 강여상 자신이 그랬듯이.

 

강여상은 그 날 사격 평가에서 정우영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못하는 교육생들이 수없이 지나가는 지루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마침내 정우영의 차례가 왔고 그제야 강여상이 고개를 들었다. 왕좌를 빼앗긴 신세가 된 정우영의 실력을 보기 위해서. 하지만 정우영은 왜인지 모르게 떨고 있었다. 시선은 바닥을 향하려는 걸 겨우 정면으로 돌려놓은 모양이었다. 옆에서 김홍중과 박성화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떨지? 그러게, 사격 때는 절대 안 떨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슬아슬한 총성이 세 발 울렸다. 한 발이 완전히 빗나갔고, 강여상의 기대는 이내 물거품이 됐다. 교육생들이 실망과 충격으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강여상은 사격 훈련이 끝나면 역시 여기서는 자신이 가장 우수하다는 생각으로 기쁠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분노가 안에서부터 밀려왔다. 고작 적수가 하나 등장했다고 이렇게 떤다고? 나는 옆에서 동료가 맞아 죽는 걸 보면서도 침착하게 총을 쐈는데? 정부군은 기강이 개판이었고 여기는 실력이 개판이었다. 확실히 후자가 낫긴 했지만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날은 강여상도 저녁을 걸렀다. 저녁 같이 먹자며 추근덕대는 교육생들을 일일이 다 쳐내려니 비위가 상했다. 전에는 정우영한테 이렇게 달라붙었을 생각을 하니 역겨웠다. 강여상은 미소조차 짓지 않고 말했다.

 

“미안한데, 그래줄 시간 없어.”

 

강여상은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이 상태로 정부군과 맞붙는다면 혁명군의 패배인 건 당연했다. 여자 훈련소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부군과 전력 차이가 엄청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죽어도 정부군에 달라붙어 있을 걸 그랬나. 재수 없게도 정우영이 손을 떨던 게 생각났다. 라이벌 하나 생겼다고 총도 제대로 못 쏘던 바보 같은 모습. 하지만 얼마 후면 그도 자신에게 돌아설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 강여상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실력 있는 쪽에 붙으려는 모습. 정우영은 웃으며 자신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래, 비위 맞춰주는 것도 나쁘진 않지. 강여상은 역겨운 느낌을 억누르며 겨우 정우영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같이 아침 먹을래?”

 

좋아. 강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여상은 정우영의 웃음에서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보았다 - 강여상은 그 웃음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예상하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다시 강여상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정우영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나 여기 있는 거 알면 혼이라도 날까 봐 무서워?”

“애초에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내 말 못 들었어?” 정우영이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하자 강여상은 딱하다는 눈으로 정우영을 쳐다봤다. 나는 귀가 아주 잘 들리는데. 강여상은 의자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의자는 사격 훈련장의 소파처럼 매우 편했다.

 

“들키면 내가 멋대로 네 방에 들어왔다고 해 줄게. 어차피 내 잘못이니까. 그리고 총책임자도 별 화는 못 낼 거야.” 그렇게 말하는 강여상의 목소리는 매우 태연했다. 정우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도 정우영은 강여상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여상은 너무 쉽게 알 수 있었다 - 아, 얘 나 좋아하는구나. 강여상은 어쩌면 정우영에게 연민을 느꼈다. 자신이 질투하는 사람에게 애정을 느끼는 꼴이라니. 질투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는 말을 들어본 것도 같았다.

 

“그래서 내 방엔 왜 온 건데?”

“그냥, 와 봤어.” 너무나도 평온한 강여상의 목소리에 정우영은 화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냥 한 번 와 본 거였는데 이 정도로 반응할 줄은 강여상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우영은 지금 자신의 얼굴이 붉어졌다는 걸 알고는 있을지 강여상은 의문이 들었다. 강여상은 조금 수가 보이는 도발을 해 보기로 했다.

 

“나는 사실 좀 기대했었는데.”

“뭘 기대해?” 정우영이 날카롭게 물었다.

“나는 네가 총을 좀 잘 쏠 줄 알았지.” 정우영의 표정이 금방 바뀌었다. 하지만 강여상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근데 그 정도일 줄은 - ” 화가 날 대로 난 정우영은 강여상의 입을 가리고 있던 손목을 잡아챘다. 진짜 걸려드네, 강여상은 속으로 웃었다.

 

“닥쳐.” 정우영이 화를 꾹꾹 참으며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강여상은 정우영의 표정을 살폈다. 누가 봐도 화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내가 아는 거?” 여전히 정우영이 내려다보고 있는 강여상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내가 너보다 뛰어나고,” 정우영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거?”

 

갑자기 정우영의 맥이 탁 풀렸다. 그 때문에 그의 손에서 강여상의 손목이 빠져나가려는 걸 다시 꽉 잡았다. 강여상이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하지만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간 채였다. 정우영의 입에서는 매가리 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 강여상이 그 말을 내뱉음으로써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했던 감정이 그에 대한 애정으로 정의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뭔 헛소리야.” 정우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여상은 잡혀 있는 쪽 손을 정우영의 목 뒤로 옮겼다. 강여상의 손이 닿자마자 정우영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쳐내지는 않았다. 강여상이 다 알면서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상하네.” 강여상이 입꼬리를 올렸다. “안 좋아한다면서 왜 쳐내지는 않지?” 어느새 강여상의 손목은 자유로워져 있었다. 정우영이 강여상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나 안 좋아한다고?”

“…….”

“왜 대답을 못해?” 강여상이 정우영을 몰아붙였다. 강여상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정답이었다. 남은 건 정우영의 대답뿐인데 도통 정우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여상이 정우영의 눈을 들여다봤다. 역시 그는 강여상의 눈을 피했다.

 

“……맞아.”

“뭐가?”

“좋아하는 거 맞다고. 이제 됐냐?” 정우영의 대답 아닌 대답에 강여상이 조소를 띄었다. “그러면 행동으로 보여 줘.” 정우영이 잘못 들었나 싶어 강여상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닌 듯 싶었다. 강여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못 들었어?”

“아니, 제대로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하라고 하지 마.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니까.”

 

정우영이 강여상에게로 몸을 숙였다. 강여상은 정우영의 손이 뺨에 닿는 게 느껴졌다. 다른 한 쪽 손은 벽을 짚었다. 강여상은 정우영이 뭘 하려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곧 그의 입술에 다른 한 쪽의 입술이 닿았다. 거창했던 말과는 다르게 입술만 붙인 채로 몇 초 가지도 않고 떨어졌다. 뭐야, 이게 끝? 강여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키스 드럽게 못하네…….

 

“너 키스 안 해 봤지?” 강여상이 말을 끝내고 풉 웃었다. 아, 이렇게 뭣도 없는 키스는 처음이네. 사격 얘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자존심이 긁힌 대로 긁힌 정우영은 화를 삭히려 머리를 헤집었다. “그렇게 잘하면 네가 해 보든가.” 그 말에 강여상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우영도 말을 내뱉고 아차 싶었다.

“그 말 진심이지?” 강여상이 다시 웃었다. “그러면 다시 해 봐.” 정우영이 다시 강여상의 뺨을 잡고 그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한쪽 손은 계속 벽에 붙여진 채였다.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정우영의 입술 틈이 조금 벌어졌다. 강여상에게 자신의 숨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혀에 무언가 말랑한 게 닿았고 질척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강여상의 머리가 벽에 닿았다. 그러자 정우영이 먼저 강여상에게서 떨어졌다.

 

“이런 거에서도 밀리는데 어떻게 나를 이기려고 그래.” 강여상이 조금 달뜬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래서 뭐. 너도 좋았잖아.” 정우영의 말에 강여상이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말은 너도 좋았다는 거네?” 정우영은 속내가 다 들킨 기분이었다. 반박할 수도 없는 사실이어서 정우영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정우영에 강여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가 볼게.” 강여상이 현관으로 걸어갔다. 정우영은 강여상의 등에 대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강여상이 정우영을 쳐다봤다.

 

“왜?”

“넌 나 좋아하냐?” 정우영의 물음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던 강여상의 입에는 갑자기 냉소가 흘렀다. 곧 그가 차갑게 말했다. “아니?” 강여상은 문을 닫고 나갔다.

 

정우영은 분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강여상이 그 소리를 들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비웃을 거다. 정우영이 이러는 꼴을 보고서. 정우영은 벽에 기댔다. 정말 그가 성공할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 어떻게든 강여상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했다.

 

 

-

 

 

정우영은 이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어제의 일 때문에 둘의 분위기가 분명 평소 같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의연하게 평소처럼 행동해야 했다. 별 거 아니네. 그리고 아마 강여상과 같이 다녀야 할 거다. 분명 어색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우영은 김홍중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강여상과 같이 다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는 따로 다녀야 했던 거다. 당연히 앞뒤 사정을 모르는 남겨진 셋에게는 의문뿐이었다. 쟤가 대체 왜 저러지? 하면서 식당으로 내려가면 정우영과 강여상이 마주보며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것은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적응되지 않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건 강여상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그렇게 성질을 긁어놓고 나면 상종을 안 한다. 근데 자기 앞에 있는 정우영은 찰거머리처럼 자기 옆에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를 않으니. 어쩌면 잘 된 일인 게 강여상은 딱히 같이 다닐 사람도 같이 다니고 싶은 사람도 없었던 거다. 그나마 친한 게 김홍중이었지만 정우영이 옆자리를 꿰찬 이후에는 딱히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었지만 정우영과도 따지고 보면 친한 사이였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조금 뭐한 사이었지만. 보통 친구들끼리 키스를 하고 그러진 않잖아. 어쨌든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나은 처지였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정우영은 강여상이 성질을 긁어놓은 건 기억도 못 하는지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을 보였다. 너무 평소 같아서 오히려 강여상이 당황스러웠다. 강여상은 정우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밥을 먹었고, 체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정우영의 이야기에서 어제 일에 관련된 내용은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게 이상한 점이었다. 보통 정우영은 사소한 일이건 강여상이 아는 일이건 다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오늘은 사격 훈련이 없었다.

 

강여상이 하나 눈치채지 못한 게 있다면 정우영의 마음도 강여상의 마음만큼이나 복잡했다. 다만 정우영은 평소같이 행동하려고 기를 썼다. 처음에는 그에 대해서 별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곧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냥 좋아한다는 것만 인정하고 평소대로 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와 별개로 어젯밤의 일이 자꾸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정우영은 최대한 그럴 생각이 날 틈을 주지 않았다. 훈련할 때는 훈련에 매진하고 강여상과 있을 때는 그 상황에 집중했다. 강여상이 아니라. 강여상에 집중하면 어젯밤의 일이 머릿속에서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 때 강여상의 눈빛과 입술이 닿았을 때의 느낌이 머릿속을 헤집어도 정우영은 평소같이 행동하려고 했다.

정우영은 곧 강여상은 평소와 같지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말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자꾸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끈덕지게 눈을 마주하려 해도 강여상과 눈을 마주할 기회는 적었다. 곧 정우영은 강여상도 강여상 본인이 저지른 어제의 일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우영은 자기가 해 놓은 짓에 연연하는 강여상이 어이없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승리감을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어제 강여상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나 좋아하냐?’ 라는 물음에 눈에 띄게 표정이 변했던 그의 모습이 정우영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수영 훈련에서 둘이 비등비등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에 강여상이 기록이 더 길었다는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우영마저 평소 같았으면 좋아하는 게 눈에 선했을 텐데 지금 그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기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유도 훈련에서는 짝을 짓는 방법이 가나다순인 게 다행스러울 지경이었다.

오늘 밥을 거른 건 강여상이었다. 강여상은 이게 참 웃기다고 생각했다. 어제 정우영의 성질을 긁어 놓은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거에 연연하지 않고 평소같이 행동하는 것 때문에 신경 쓰여 한다니. 누가 들어도 어이없었다. 강여상은 정우영이 늘 그랬듯이 침대에 올라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설마 내가 걔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고작 키스 한 번 해 놓고. 강여상은 헛웃음이 나왔다. 해 보라고 도발한 것도 자기 자신이었다.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간 꼴이었다.

 

정우영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강여상은 괜히 서운함을 느꼈다.

 

 

 

 

 

 정우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강여상의 방 앞으로 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가자, 는 말과 함께 둘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평소와 똑같았다, 모든 게. 햇볕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한 거 하며 정우영의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다 들어준 것까지. 다만 정우영이 뭐라는지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강여상의 머릿속은 정우영으로 복잡했다. 그리고 그건 정우영이 앞에 있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여상이 떠드는 정우영을 앞에 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정우영이 어어, 뭐야? 같이 가! 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강여상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 걸었다. 곧 옷이 잡아당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당연하게도 정우영이었다.

 

"뭐냐. 오늘 기분 안 좋아?"

 

 강여상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면 왜 그래? 강여상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정우영은 계속 눈을 맞추려고 하면서 물어왔다. 아, 대답을 해! 강여상은 정우영을 최대한 외면했다. 그렇게 훈련장까지 가는 동안 정우영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고 강여상은 무시로 일관했다. 훈련장 문 앞에 다다라서야 정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강여상이 먼저 훈련장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정우영에게 돌아섰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정우영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강여상은 먼저 쌩하니 훈련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하지만 정우영도 그 말이 걸렸다. 엄청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보다. 이렇게까지 연연해할 거면 애초에 그러지를 말든가.

 

이상하게 그 말을 한 것 빼고는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강여상의 행동이 조금 어색해진 것만 빼면. 강여상은 계속 정우영에게 뭔가 말하려다가 주저하고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조금 늘었다 - 그건 원래도 그랬지만. 그리고 모든 훈련에서 정우영에게 뒤쳐졌다. 매우 근소한 차이긴 했지만. 하지만 정우영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태도에 정우영 자신도 놀랐다. 예전 같았으면 강여상을 이겼다는 성취감에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을 거였다. 확실히 뭔가 달라졌다 - 달라진 게 그의 성격인지 그의 목표인지 그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목표가 달라진 건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강여상을 이기는 데 초점을 뒀다면 지금은 강여상을 - 말하자면 꼬시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그런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여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날 이후부터 정우영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그리고 정우영보다 계속 기록이 뒤쳐졌다. 평가를 할 때마다 강여상은 손을 떨었다. 강여상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 거친 정부군에서조차 어떤 일이 있어도 떨지 않던 자신이었는데 정우영 하나 때문에 훈련에 집중마저 못하고 있었던 거다. 확실히 사랑은 강여상에게는 처음 경험해 보는 감정이었다. 물론 강여상은 그걸 별 거 아닌 감정으로만 치부했지만. 하지만 어느 샌가 그 감정은 강여상을 지배했다. 자신이 정신의 주체라는 오만에 빠진 영혼은 쉬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강여상은 모든 걸 정우영의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러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강여상은 훈련장 한편에 앉아서 연습하는 정우영을 지켜봤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강여상은 누구보다 뛰어난 줄 알았던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마 오늘도 저녁을 거를 것 같았다.

 

 

-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정우영은 강여상의 옆에 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김홍중은 저런 정우영의 모습이 낯설었다. 원래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낄지언정 붙어먹을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김홍중은 박성화와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냥 걔 성격이 바뀐 거라고 생각해, 나는.” 박성화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의아하다는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친해지려고 했으면 아마 우리랑 같이 다니자고 했을 것 같은데.” 김홍중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정우영이 강여상과만 다니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의 예상 범위에서는 그 정답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그냥 직접 물어볼까? 같이 안 다닌다고 우리가 멀어진 건 아니잖아.” 박성화의 말에 김홍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을 못했네. 항상 해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거다. 그들은 정우영이 강여상과 떨어져 있을 때 정우영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정우영이 어찌나 강여상에게 꼭 붙어 있었는지 떨어지면 죽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영문도 모르는 정윤호를 데리고 둘은 하루 종일 정우영(과 강여상)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정우영은 늘 강여상과 함께였고 만에 하나 정우영이 혼자 있는 기회를 찾으면 강여상은 금방 돌아왔기에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성과 없이 하루가 지나가는 줄만 알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날 강여상은 저녁을 걸렀다. 혼자 식당으로 들어가려는 정우영을 김홍중이 붙잡았다.

 

“혼자 먹어?”

“응.”
“그럼 같이 먹자.”

 

정우영의 대답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김홍중이 정우영을 끌고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이미 박성화와 정윤호가 있었다. 이미 그들은 정우영의 식판에 밥을 받아 온 채였다. 김홍중이 정우영을 자리에 앉혔다. 셋의 눈이 모두 정우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부담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갈게.” 김홍중이 정우영의 말을 무시하고는 말했다. 정우영이 뭔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그것마저 무시당했다. “요즘 강여상이랑만 다니는 이유가 뭐야?” 뭐야. 설마 형들 그것 때문에 삐졌어? 라고 대답하려던 정우영은 뭔가 얼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그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던 거다. 확실히 그들에게는 털어놓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나 사실 강여상 좋아해.” 예상치 못한 답변에 김홍중은 입이 떡 벌어지고 박성화는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정윤호는 그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계속해서 기침을 했다. 진짜야? 혼란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정우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정우영은 진짜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저 셋은 정우영이 강여상을 좋아한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 갔다. 첫 날에는 강여상이 자신을 이긴 것에 곧 죽기라도 할 듯이 분통을 터뜨리더니 그 날 이후로 갑자기 그 강여상과 붙어 다니고 이제는 그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납득이 가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른 교육생이면 놀리기라도 할 텐데 강여상이라니까 셋은 정우영의 말이 믿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우영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일 물어보려고. 걔는 나 좋아하는지.” 들을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셋은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 듯 했다. 다만 정우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밥을 퍼 먹고 있었다. 밥 안 먹어? 다 식는다. 정우영의 말에 그제야 셋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정윤호는 아직도 기침을 하고 있었다.

 

 

-

 

 

강여상은 사격 훈련이 끝나고 휴게실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정말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도 정우영은 그 일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거에 연연하는 건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강여상은 괜히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오전에는 수영이고 오후에는 사격. 차라리 총을 쏘면 며칠간의 걱정이 사라질 것 같았다 - 물론 그 전에도 사격 훈련은 몇 번 있었지만.

강여상은 식사를 할 때마다 얹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우영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어서인지 급하게 먹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여상은 들 다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정우영이 쳐다보는 바람에 급하게 먹게 된 걸 것이다. 그래서 정우영 탓이다. 누가 그 날 먼저 정우영의 방에 쳐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 정우영 탓이었다.

 

수영 실습마다 강여상은 물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총책임자는 물론 그를 그러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래서 헤엄을 쳤다. 눈을 물 위로 내놓으면 정우영이 먼저 헤엄쳐 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정우영은 잘 하고 있었다. 정말 평소와 같았다. 괜히 화가 났다. 수영이야 원래 자신이 정우영보다 뒤쳐지긴 했다지만 자신은 그 일에 매여 있는데 매번 기록을 단축해나가는 정우영을 보니까 괘씸했다. 강여상은 물에서 빠져나갔다. 그러자 정우영이 좀 더 잘 보여서 차라리 물 속에 있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여상은 이번 평가에서 그리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 총책임자의 표정에서 실망감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 표정을 보자 강여상마저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강여상은 하릴없이 바닥만 쳐다보고 있다가 정우영의 이름이 불리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정우영이 물살을 헤치고 나갔다. 그는 이번에도 기록을 단축했다.

 

강여상은 먼저 식당으로 올라가 있었다. 방금 씻어서인지 차분하게 정돈된 머리를 한 정우영이 곧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정우영이 식판을 들고 두리번거리다가 곧 강여상을 발견하고는 강여상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도 기록 단축했던데.” 강여상은 일부러 정우영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정우영은 강여상의 질문에 당황하나 싶더니 곧 웃으며 무마했다. “어어, 그랬지. 다음 훈련 뭐더라?” 강여상은 정우영이 분명 기록 단축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의 대답에 놀랐다. 정우영은 분명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여상은 그것을 쉽게 눈치채지 못했다. 대상에 대한 편견이 심할수록 변화를 잘 알아내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건 강여상도 마찬가지였다.

 

정우영은 먼저 사격훈련장에 들어가 있었다. 강여상이 뭔가를 좀 생각해볼 게 있다며 정우영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정우영은 그게 뭔지 궁금했다. 하지만 분명 자신에 관한 것이었으면 했다. 이상하게 강여상에게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정우영은 그게 강여상이 자신을 좋아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곧 강여상이 사격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 쪽 벽에 기대고 앉아 있는 정우영의 반대쪽 벽에 몸을 기댔다. 정우영은 그 모습을 보고 강여상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여상은 언짢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우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곧 다른 교육생들도 사격훈련장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다 모이자 총책임자도 사격훈련장에 나타났다.

 

“오늘은 자율 연습 후에 평가를 한다. 놀지 말고 연습하도록.”

 

짧은 말 후에 총책임자가 자리를 떴다. 실탄도 아니었고, 총을 가지고 장난치는 어린애들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여상이 총기를 집어 들었다. 금속의 마찰음 속에 김홍중의 가나다순으로 연습할 거라는 공지가 들렸다. 그 말에 교육생들은 바로 가나다순으로 정렬했다. 강여상은 그들의 맨 앞에 섰다. 모두가 숨을 죽였지만 결과는 뻔했다. 강여상은 모든 총알을 과녁의 중앙에 맞추고는 줄의 맨 뒤로 가서 섰다.

 

강여상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만약 정우영이 자신에게 사귀자고 하기라도 한다면 뭐라고 반응해야 하지? 이미 정우영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강여상 자신이 먼저 그의 감정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잘못된 선택일지도 몰랐다. 강여상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잘 없었다. 강여상이 정우영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정우영은 저 앞에는 없었다. 아직 순서가 좀 남았나, 생각하던 찰나 정우영이 맨 앞에 나타났다.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정우영이 곧 총을 들고 쐈다. 두 발은 명중이었다. 정우영은 마지막 한 발을 쏘기 전에 뒤를 흘끗 돌아봤다. 그와 강여상의 시선이 맞물렸다. 강여상은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는 걸 느꼈다. 강여상의 느낌에 그건 여름의 열병 같았다. 진정하려 해도 쉽게 가라앉지도 않았다.

강여상의 두 번째 차례가 돌아오기도 전에 총책임자가 들어왔다. 강여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교육생들은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다들 의아해했다.

 

“오늘은 센터에 일이 있어서 훈련을 일찍 마친다.” 총책임자의 말에 모두가 들키지 않게끔 좋아하는 내색을 띄었다. “바로 평가에 들어가겠다.”

 

강여상은 순간 머리가 하얘지는 듯했다. 평가를 잊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강여상은 정말 맨 앞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느새 발걸음이 옮겨졌다. 강여상은 다시 맨 앞에 와 있었다. 총책임자가 그의 이름 석 자를 불렀다. 강여상이 앞으로 나가서 총을 들어 올렸다. 절대 이런 적이 없었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세 번의 총성이 들렸고 그 중 두 개는 확실히 빗나갔다.

정우영이 그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강여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강여상은 오직 훈련을 마치겠다는 총책임자의 말만을 기다렸다. 곧 총책임자가 입을 열었다.

 

“훈련을 마친다. 남은 시간은 알아서 잘 쓰도록.”

 

총책임자가 문 밖으로 나가고 몇 초 뒤에 강여상도 훈련장을 떠났다. 그 뒤를 정우영이 급하게 쫓아갔다. 강여상은 이런 적이 없었기에 분명 그 자신에게 매우 큰 충격일 거였다. 강여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정우영이 잠시 한눈 판 사이에 강여상은 사라져 있었다. 정우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확실히 이 주변에는 갈 만한 데가 없었다. 일단 정우영은 7층으로 올라가 강여상의 방부터 가 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익숙한 뒤통수가 휴게실 문을 열고 나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정우영은 그 길로 그에게 뛰어갔다.

 

“야, 강여상!” 그의 목소리가 강여상에게 들릴 정도로 충분히 컸음에도 강여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정우영은 그의 앞까지 가야 했다. 바라본 강여상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 그래도 잘생긴 건 변함이 없었지만. 아마 운 것 같았다.

 

“괜찮아? 너 찾으려고 돌아다녔잖아. 올라가서 쉬다가 밥 먹으러 가자. 너 요즘에 저녁 너무 많이 빠졌 - ” 정우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여상이 그의 팔을 꽉 잡았다.

 

“너, 이러려고 그때 그런 거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강여상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내가 너보다 잘하니까, 이겨 보겠다는 것 때문에 마음 흔들려고 - ” 정우영이 말을 가로막지 않았음에도 강여상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강여상도 자신의 말이 틀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때 먼저 정우영을 긁어댄 것도 자신이었다. 키스해보라고 도발한 것도 자신이었다. 강여상도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싫었다. 긴장한 채 정우영의 표정을 살피니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여상은 어쩌면 그가 화내도 당연한 거라는 생각을 했다.

 

“무슨 소리야.” 생각과는 다르게 정우영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하지만 표정은 침착해 보이지 않았다. 정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정적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정우영이 뭔가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근데 넌 왜 내가 네 마음 흔들려고 키스했다고 생각해?” 강여상이 그 말에 움찔했다. 그 말을 한 건 확실히 실수였다. “혹시 너 나 좋아하냐?” 강여상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지만 이미 한 번 부정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지금 와서 말을 바꾸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했다. 강여상은 대답하지 않고 정우영의 다음 말만을 기다렸다. 반대로 정우영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결국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답 못하는 거 보니까 맞나 보네. 그리고 그건 네가 먼저 시작했던 거야. 알고 있지?” 강여상이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자기가 철저히 정우영한테 지고 있었다. 정우영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맞는 말이었다. 강여상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정우영이 그의 고개를 잡아 올렸다. 정우영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너 알아서 해. 그냥, 너 좋을 대로 해, 이제.”

“그럼 키스해도 돼?”

 

뜻밖의 말에 강여상이 눈을 깜빡였다. 정우영도 말을 내뱉고 당황했다.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지금의 강여상은 그 밤의 강여상을 생각나게 했다. 이미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기에 정우영은 최대한 태연한 척을 했다.

누가 봐도 놀란 듯한 강여상의 얼굴에 정우영이 씩 웃었다. “나 아직 키스는 너보다 못 해. 근데 이번엔 적어도 멈추진 않을 거니까.” 강여상이 주저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영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난 안 멈춘다고 말했다. 강여상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자신은 정우영에게 패배한 거였다. 그리고 이 상황을 만든 것도 강여상 자신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강여상도 이 상황이 싫진 않았다. 그동안의 일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쨌든 나도 너 좋아해.”

“……나도 좋아해.”

 

강여상이 겨우 대답했다. 그러면, 키스해도 돼? 정우영이 재차 물었다. 강여상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곧 정우영과 그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강여상의 머릿속이 점차 새하얘졌다. 셋, 둘, 하나. 그들의 입술이 맞닿았고 강여상의 머릿속에는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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