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자들의 이유
산성비
사망 요소, 유혈 요소 포함. 교통사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으시거나 불편한 분들은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을 오를 때 얌전하지 못한 고양이는 이미 지붕을 넘는 중일 것이다. 앞에서 비죽 웃는 우영을 본 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든 다음 생엔 제발 제가 저 놈을 족치게 해주세요. 천박한 소망을 읊던 그가 우영의 돈을 씹어 삼켰다. 한 두번 움직이니 녹아내려간 고깃덩이가 그의 돈이라고 할 만도 했다면서, 산은 눈썹을 잔뜩 올렸다.
“산, 맛있어?”
빙글빙글 웃는 모습을 보니 그 달큰한 고기가 공복에 먹는 매운 음식마냥 올라왔다. 우영의 가늘어진 눈이 해를 받은 먼지처럼 빛났다. 기분 나쁜 이질감이 산의 몸을 덮은 순간 그의 앞과 입에서 물컹거리는 덩어리들이 수습할 수 없이 흩어진 설탕 바다로 변한 착각이 들었다. 우욱. 산의 헛구역질 한번에 우영이 벌떡 서서는 당황한 티를 냈다.
“야, 왜 그래. 괜찮아?”
어깨에 닿은 미지근한 손을 익숙하게 빼와 자신의 손에 끼운 산은 놓칠 정도의 약한 압박으로 그것을 쥐었다. 너만 없으면 괜찮을거 같은데. 그는 입에 있던 익은 고기를 삼키는 동시에 그 말을 삼켰다.
“응, 괜찮아.”
산의 시야와 입 안에 고였던 곱고 따가운 가루들은 다시 선홍빛 고기로 돌아왔다. 산의 누나가 죽은지, 반 년 정도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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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갑의 아들과 을의 아들 정도였다. 산이 일곱 살, 그의 아버지가 한 재벌가 부부의 집에 정원사로 고용된 동시에 그들이 생전 처음 하는 이사가 진행된 해였다. 산은 자신의 조부모님과 살길 원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 집에 산의 또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뭔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를 데려갔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산과 그의 누나는 깜찍해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일층의 빈 방을 바꿔치운 협소한 방을 두개 얻고는 인심 좋은 미소를 지었다. ㅈ꽤 호탕한 고용주들이었다. 잘난 것들. 그렇게 말한 아버지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둘에게 단 꽈배기를 쥐여줬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에 어린 산이 고개를 번뜩 드니 그의 누나는 빵을 우물거리다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반을 뚝 떼주었다.
“산아, 다음부턴 아빠가 주는 거 받아먹지 마. 나중에 누나랑 더 많이 먹자. 아빠가 준 건 안 좋아.”
다 큰 티를 내는 그의 누나-최여울-는 산과 나이 차이도 별 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하는 생각의 높이는 이름만큼이나 차이가 나서, 여울이 하는 말은 그의 이해를 미뤄두고 만다. 아버지가 싫다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한 누나의 말을 들은 산은 그저 손 끝에 남은 설탕 가루만 쪽쪽 빨아 먹었다. 응. 표정은 여전히 물음표가 채워져있었지만 귀엽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여울은 산의 볼을 잔뜩 구겼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산은 지금 그 빵이 맛있었고 누나가 자신의 볼을 조물딱 거리는 것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해를 못하는 조그만 머리가 휘저어진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무슨 소리냐, 애는 나랑 같은 방을 써야지.”
“싫어! 내가 산이랑 같은 방 쓸거야.”
하, 그의 아버지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쪼그려 앉아 여울을 쳐다봤다. 봐, 만약에 여기 오래있으면 니가 클텐데 너랑 산이는 같지가 않잖아. 그럼 불편하겠지? 안 불편해!
“아빠 말 들어야지.”
“아빠도 우리 말 안 듣잖아!”
두 모습을 꿈뻑꿈뻑 어지럽게 응시하던 산은 누나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맞아. 화악, 밝아지는 하늘의 표정과 다르게 아버지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너희 맘대로 해라. 그 순간부터 대저택의 일층, 시린 방 하나는 산과 여울의 조그만 놀이터로 변했다. 산이 정우영을 만나기 직전이자 그가 정우영을 싫어하기 바로 전 날의 일이었다.
“나 저 누나 싫어.”
산보다 두 살 많은 누나에게도 얘, 라고 지칭한 우영은 정원에서 물을 주던 산의 누나에게 난데없는 손가락질을 해댔다. 아니, 얘가…. 그의 부모님이자 아버지를 고용한 고용주인 부부는 성급히 아이의 입을 막았지만 세 가족은 그 말을 모두 들은 뒤였다. 허허, 쌉쌀하게 웃으면 괜찮다고 하는 아버지완 다르게 산과 누나는 눈치따위 없었다. 여울은 물뿌리개를 놓치니 산은 바락 소리를 질렀다.
“우리 누나도 너 싫어하거든!”
산이 우영을 싫어했던 첫 번째 이유, 그가 자신의 누나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해결책이고 방어벽이자, 첫 애정을 준 사람에게 한 말이 그렇게 싫었다고, 그는 대답했었다.
“그래.”
우영의 뭉개진 발음이 흥미없이 내리깐 눈을 함께 대변했다. 결국 머쓱하게 웃는 사람이 남매의 아버지에서 외동의 부모님까지 세 명으로 늘었으니 그 날은 산이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혼나는 날이 되었다. 최산, 이제 걔가 뭐라고 해도 대꾸하지마. 알았어? 잔뜩 화가 난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에 산은 방울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그만 회초리 자국이 산의 여린 손을 따갑게 데웠다. 그 날 산은 여울을 꼭 안고 꿈에 빠졌다. 어느 해 봄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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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산과 우영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그 봄의 일은 잊힌지 오래였다. 아버지가 이 직장을 오래 가진 탓에, 또한 후함을 넘어 부담스럽게 모든 걸 나눠주는 우영의 부모님 덕에 그들은 말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우영과 여울은 여전히 이유 없이 서로를 싫어했으나 사근사근한 산에게 둘은 넘칠 정도로 친절했으며, 산은 삼분의 이 꼴로 우영의 말도 받아줬다. 여울은 못마땅한 얼굴로 같은 방 안에서 산을 나무랐지만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걔가 나까지 싫어하면 우리 아버지 잘릴걸?”
미리 철이 든 그들은 이상한 곳에서 따로 섰다. 산은 유했으나 이름따라 거친 여울은 우영의 심기를 항상 건들었다. 그 끝까지 쳐올려진 화를 아양으로 가라앉히는 건 산의 주 담당이다. 너 사회생활 되게 잘하겠다. 여울이 쏟아놓은 것을 해결하고 온 산에게 그녀가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산은 자신의 누나가 죽으라면 죽고도 남는 동생이었기에 그 말에 따라 웃곤 했다.
“넌 사람 새끼가 뭐가 그렇게 영악하냐?”
물론 여울이 화낼 때는 원망스럽기만 했지만. 반으로 접힌 우영의 눈을 살살 바라보던 산은 다시 빵긋 웃었다. 누나 왜 그래애. 산과 똑 닮은 가는 눈초리가 이젠 그를 노려본다.
“넌 좀, 하….”
“뭐요, 제가 뭘 했는데요?”
“남의 방은 왜 뒤져?”
“제가요?”
어, 니가요. 우영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바꿨다. 전 그 방 들어간 적도 없어요. 여울이 끝까지 오른 붉은 감정을 산을 보고 겨우 삼켰다. 이유는 딱 하나, 당사자의 앞에서 얘기하자기엔 이상한 것들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산과 여울의 방이 헤집어지고 사라진 건 단 두 개의 사진이었다. 하나는 산이 여울에게 줬던 증명사진 한 장, 다른 사진은 초점이 잘못 잡혀 여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산의 사진. 공통점은 산, 하나 뿐이다. 여울은 그렇기에 멀끔한 우영이 더욱 소름돋았다. 산은 눈을 여기저기 굴려가며 둘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잘근잘근 벌개지는 살은 결국 터져서는 비린 맛을 냈다.
“아!”
그 누구보다, 뜨겁고 시리도록 그를 아끼는 이들이 산을 돌아본다. 왜 그래? 동시에 들리는 섞인 섞인 말과는 다르게 그와 가까운 우영의 손이 산의 볼에 닿았다. 마른 턱을 살짝 들어올리는 그 손길 틈에 산이 옅게 손을 쳐냈다.
“괜찮아.”
“... 그래?”
열다섯 둘과 열일곱 하나, 위태한 관계가 오늘까지도 차곡차곡 지속된다. 우영의 집의 식탁 의자가 세 개에서 여섯 개로 바뀐지 이년 정도 되는 날, 예기치 못한 불행의 심지는 여기서부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한참 사진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산의 아버지는 몸이 뭉개진 채로 병원에서 흰 천을 덮고 있었으니 그 말은 다한 셈이었다.
그냥 걷고 있었다고, 그가 걷고 있는 곳으로 술에 취한 운전자가 차로 그를 들이받았다고. 급하게 전달된 연락을 받고 달려간 산과 여울이 들은 소리였다. 그냥 걸었다, 그의 아버지는 죽었다. 술에 취한 운전자에 의해 그냥, 그저 그냥 사고로. 그 말로 풀어진 검은 실들이 점차 산에게 엉겨붙기 시작한다. 두려움에 돌아보니 여울의 덤덤한 모습이 이제야 보였다. 어째 꿋꿋한 눈은 두려움은 고사하고 혼란스러움조차 보이지 않았다.
“산아, 아주머니한테 연락드려. 오늘 늦게 들어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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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상복은 둘의 모습에 딱 어울렸다. 덤덤하고 비참한 똑 닮은 두 얼굴. 여느 장례식장에서나 볼 수 있던 모습은 이젠 둘이 되어 가지런히 놓였다. 뱅뱅, 뇌 속이 돌아가는 소리가 텅 빈 조문객의 자리를 채운다. 예의상 차려진 음식들은 가족의 발길이 끊긴 아버지의 행실을 잘 보여주는 듯 여전히 식어가는 중이었다. 산은 없는 행복을 짜내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뭐든 할 수 있다며 떵떵거리고 조부모님의 집에 자신들을 버린 기억, 사람은 저리 교만하게 살면 안된다며 남매의 머리를 쓰다듬던 동네 이웃이 생각났다. 회상의 주인공은 금세 뒤집어졌다. 결국 맨 처음 떠올린 기억은 처참한 기분에 물을 붓고 만다. 혈육을 잃은 산의 기분은 찬 바닥마냥 변했다.
조문객은 단 세 명이었다. 실질적으로 남매에게 모든 걸 나누는 아버지의 고용주와 그런 고용주의 아들. 입을 열면 둘이 터질까 다문 입이 두 개, 관심없이 다문 입은 하나. 산과 여울은 그들을 올려다봤다.
“많이 힘들지?”
동정 담긴 그 한 마디에 산의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붉어질 뻔한 눈시울을 꾹꾹 지운 그는 고개를 다시 내렸다.
“살려주세요.”
여울의 그 말 하나에 산의 눈시울에서 나온 물이 식는다. 홱 돌아보니 그의 누나는 비참한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어 하늘을 보던 그녀의 머리가 바닥을 향해있었다. 저희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산이 급하게 바닥에 엎드린 그녀를 잡아 일으켜 세우려 해도 날카롭게 내칠 뿐이다. 바닥을 되짚은 팔 한 쌍이 바들바들 떨렸다. 누나, 왜 그래. 산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얘, 일단 고개 좀 들어. 우린 너희 안 죽여.”
우영의 아버지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섞여 있다. 그의 어머니는 진작에 여울의 어깨를 안고 토닥이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들썩이지도 않던 여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그녀가 걱정했던 건 아버지의 죽음이 아닌 자신들의 생사라고 산은 생각했다. 꼿꼿하게 서 있는 건 우영 하나다. 그때 산이 고개를 들어올려 본 우영의 표정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슬픔을 연기하는 모습. 눈썹과 입꼬리는 내려갔고 손은 모아져 귀찮다는 새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완벽한 연기였다. 다만 그 사이로 내리깐 눈이 심하리만치 무의 감정이 채워져있어서, 과열된 산의 몸이 순간 차갑게 얼어 굳는다.
“너….”
“산아, 괜찮아?”
우영은 여전히 산만을 걱정했다. 산이 우영의 집에 발을 들인 봄날과 달리 바람이 사나운 눈의 계절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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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근사근한 산은 그 날 이후 좀 더 영악해졌다. 예쁜 아가들, 자신을 그렇게 보는 우영의 부모님에겐 여전히 남아있는 일곱 살의 잔재를 내비추었으나 우영에겐 아니었다. 탓을 한다면 정우영, 세 글자 때문이었으니 그가 원인에게 사근사근 굴 필요는 없다. 일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위치에서 산을 바라봤던 우영은 이젠 산을 내리깔아 간직하길 원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우영과 멀어졌다. 최산이 변한 건, 정우영이 교만해졌기 때문에. 식탁의 의자가 다섯 개로 줄어든 사이 작은 공식이 그들 사이에 좁고 높은 텀을 두었다.
“영아.”
“응.”
“우리 방 들어오지마.”
어, 안 들어갈게. 말은 잘한다. 앞에서 턱을 받치고 웃고 있는 우영은 여전히 이상한 도벽이 있었다. 최산 사진 훔치기. 당사자가 알아차린지는 한 반년, 당사자의 누나가 화내다가 지쳐서 그만둔 건 일 년. 알아차린 때는 산이 우영의 방에 머물렀을 때였다. 책상에 널려있는 용지들 가운데 코팅된 사진은 꽤 잘 보였고, 생각없이 그걸 뒤집은 산은 몇 년 전 자신을 마주했다. 사진 속의 고요한 제 모습을 우영이 보고 있었다 생각하니 산은 일순간 몸이 멈췄다. 방 안의 물건들이 이젠 울렁이기 시작한다. 뛰쳐나가고픈 마음은 몸의 정지를 풀고선 넘어질락 말락 깡마른 다리를 굴렸었다. 그런 일로 산은 우영이 제 방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한다, 물론 정우영도. 들켜도 여전히 꼿꼿한 모양새가 재수없고 재미없고, 하여튼 여러 이유로 최산은 정우영이 싫었다.
최산과 정우영은 항상 학교가 같았다. 초등학교에서는 무려 사년 간이나 같은 반을 했으며 중학생 때는 단 한번도 붙지 않았으나 질기도록 찾아오는 우영이 있었고 새로운 고등학교에서는 첫 반 산의 전 번호가 우영이였다. 이십사번 정우영, 이십오번 최산. 등교도 같이, 밥도 둘이서만, 심지어는 하교도 함께 하는 그들에게는 행세와 안 어울리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정우영은 최산을 싫어한다고. 산이 무엇을 하든 갉아먹으려 쫓아다닌다고. 사실은 반대에 가까운 그 소문은 9할은 우영의 탓이었다.
“산아, 오늘 발표 열심히 해.”
산이 우영을 싫어했던 두 번째 이유, 정우영은 쎄한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을 뛰어넘었다. 이 날도 마찬가지였다. 식은 공기 속에서 발표를 마치고 칭찬이 끊기지 않던 가운데 받은 질문은 산의 목을 졸랐다. 그런데로 시작해서 아닌가요, 로 끝나는 그 질문의 주인공은 정우영이었다. 예상 질문에 존재하지도 않은 그 말이 숨을 막는다. 전날 우영에게 생각없이 보여주었던 발표문이 까만 눈 앞에 보였다.
“예, 그게….”
대답하는 산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렸다. 눈을 굴리느라 숙인 고개에서는 숨겨진 두려움이 드러났다. 억지로 짜낸 그 대답은 분명 완벽했으나 점수는 완벽하지 못했다. 깎인 태도 점수가 기록을 한 용지에 선명하게 보인다. 한참을 떨어진 기분으로 우영의 발표를 들은 산은 뭉툭한 질문마저도 던지기 버거웠다.
“질문 없으신가요?”
재수 없어. 건방져 보이는 그 모습이 상당히 당당하게 보였다. 말은 잘해, 어제도 방에 절대 안 들어오겠다고 대답만 잘했지. 노려보다 눈이 마주쳐선 어색해진 입가가 잘게 떨린다. 소문에서 맞는 1할은 그가 오만으로 최산을 갉아먹고 있는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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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을 뭔데 니가 상관 써.”
“그럼 누나는 가족이라는 거 말고 얘한테 도움주는 게 뭔데요?”
“너는 씨발, 꼭 말을 그렇게 하고 싶냐?”
“어쨌든 도움되는 건 없잖아요.”
또 나왔다, 저 버릇 없어 보이는 말투. 산은 턱을 괴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요즘 여울과 우영은 하루를 멀다하고 서로를 찢어발기는 중이었다. 여차하면 산이 우영에게 부리지 않던 아양을 다시 부렸을까. 싫어한다기엔 둘의 감정은 증오에 가까웠다. 이미 부서진 관계에서 금이 차츰 커지고 있었다. 최산의 애교섞인 왜 그래, 라는 말이 세번 정도를 그들을 맴돌아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싸움은 짧게 욕을 읊고 나간 여울로 마무리됐다.
“산.”
“어?”
“안 갈거야?”
아니이, 가야지. 늘여뺀 말은 태평했다. 문을 열고 나간 산이 평소에 쳐다보지도 않던 폰을 들어 여울에게 전화를 건다. 우영이 보냈던 수십통의 밀린 문자는 뒷전이었다.
정우영은 통유리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최산을 제 앞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여우인 척 하는 먹잇감은 여울과 자신이 그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르는 듯 여전히 순진했다. 문득 그들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분명 욕심많은 제 부모님이 서커스 같은 범죄를 꾸몄었다. 남매의 아버지는 귀여운 아이들을 얻고 싶은 정신나간 심리를 가진 부모님의 피해자이다. 꼭두각시를 이용해 죽은, 욕심의 명확한 피해자. 우영은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 딸의 죽음을 설계한다. 지금 그의 모양새는, 남매의 아버지를 죽여놓곤 남매를 동정하던 부모님과 비슷했다. 어른의 모습은 아이의 미래, 어디선가 본 교육용 비디오의 문구가 우영의 머리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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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쳐나간 여울이 갈 곳은 사실 몇 되지 않았다. 학교 앞, 자그마한 카페, 주택의 앞, 그리고 다시 학교. 산은 그 길을 전부 꿰고 있었으니 찾기를 걱정할 일은 없었다.
“집 좀 가면 안돼?”
얇은 빛깔의 노을이 여울의 머리색과 겹쳐졌다. 한층 밝아진 산의 목소리는 애교있게 높았다. 어, 산아. 가자, 가. 누그러뜨려진 미성이 산의 귀에 겨우 들린다.
“왔어?”
붕붕, 기분이 좋아져 흔드는 손 사이 얼굴에 보조개가 핀다. 야, 쟤한테 웃어주지마. 겨우 펴졌던 우영과 여울의 인상에 다시 주름이 졌다. 어째 진작 받아쳤어야 할 말이 오지 않는다. 대답할 생각 없이 이쪽만 바라보는 눈이 이상하게 그 장례식에서와 비슷해 산은 누나를 이끌어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그 눈에 심장을 쓸은 것도 잠시 일층에서도 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꽤나 예쁘다. 최근 들어 가장 헤픈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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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더 정확히 말하면 팔 일. 심하던 둘의 싸움이 우영을 기점으로 뚝 끊겼다. 여전히 볼멘소리를 서로에게 해댔지만 그것도 마무리 되고 있었다. 대개 끝은 고개를 쳐들고 눈을 내리깐 우영의 거만한 모양새였으나 그게 뭐 한 두번 보던 것도 아니고, 라는 말로 넘겨버렸다. 산은 요즘 하루를 최상의 기분으로 보내는 중이다. 무음으로 알림이 차곡차곡 쌓이던 휴대폰에 온 전화가 사막과 같은 잔인한 소식이 아니었다면 산은 오늘도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지 않던 최여울 폰의 가장 최근 수신기록, 최산. 그는 응급실의 전화를 받고는 그대로 뛰었다. 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택시를 이용할 생각도, 쉴 새도 없었다. 꼬박 삼십 분을 걸어야 하는 곳을 뜀박새로 십여 분만에 도착하고는 막히는 폐에 숨을 몰아넣었다. 정신없는 휠체어 소리, 다급한 사람들의 분주한 시선. 갈피를 못 잡는 산이 몇몇 물썰을 걸쳐 죽어가는 누나를 본다. 띠이. 멈추는 심장을 나타내는 병원의 기계음이 산의 충격을 대신했다.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누나, 왜 누나가 죽어. 나만 남기고. 한 마디라도 말을 꺼냈다가는 꼭 저 아슬아슬한 형태마저 끊어둘 것 같아 그는 유리통 너머로 입을 막았다. 떨어뜨린 폰이 하얗게 빛난다. 산아, 너희 누나가 죽었대. 덜렁 놓인 그 문자는 이상하리만치 수상했으나 지금 주위가 변한 산은 회로를 돌릴 여유조차 되지 않았다. 긴장에 부풀었던 어깨가 열을 받은 얼음 마냥 녹아내린다. 새까만 그림자가 위에서 스러진 산의 환한 백색 머리를 보았다. 여울의 선홍빛 머리칼이 좀 더 짙은 색으로 젖어 말라 비틀어진 걸 본 우영은 입을 가렸다.
“산. 이리와.”
산을 잡아 안고 가린 입 속이 붉게 찢어졌다. 웃음이 애굣살을 듬뿍 올려주어 예쁜 모양새가 손 하나에 가려졌다. 이 순간이 너무 기쁜 나머지 우영의 웃음이 멎지 않았다. 아, 이렇게 약해빠진 산이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울음에 젖은 얼굴은 우영의 어깨에 푹 꽂혀 그의 미소를 마주하지 못한다. 교만스러운 우영은, 사람 하나도 이리 쉽게 죽였다.
–
죽은 자들은 안식자의 집으로 날개 달린 자를 이끄니 교만한 주인은 그런 자를 온갖 말로 현혹해 아름다운 유리 조각에 가두었다. 독사의 사랑은 살아 있던 자의 총기를 빼앗았으며 그의 환함을 지웠다. 모든 걸 다 알게 된 뒤의 잠시 발생한 불꽃은 화에 인해 생긴 것으로, 유함을 잃고 다시 짓눌러진 자신을 비춘다. 산은 누나를 잃은 자리에 억지로 우영을 끼워맞췄다. 원망과 비꼬인 사랑이 얼마나 아팠던지, 그는 더 이상 죽은 자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따가운 가루들이 다시 산의 눈에 보였다. 달은 것들이 언제 녹아 화상 입힐지, 또 무엇으로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할지. 그것이 두려워 좌르르 쏟아지는 것들에 우영을 겹친다. 예쁘게 깎은 보석이 한가운데 놓인 듯, 산은 그에게 억지로 환상을 덮었다.
“사랑해, 우영아. 사랑해.”
“응, 나도.”
시든 영혼 사이 가득한 애정을 연극에 올렸다. 텅 빈 안식처에서 산은 외치고 우영은 읊는다. 처음부터 뒤틀린 애정에 잔을 맞추며, 그들은 다시 한번 옳은 사랑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