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 직전의 세계엔 사랑이 없다
산성비
보석을 한 무더기로 쌓아둔 채 태어난 여상은 모든 걸 질려 놓았다. 자신을 좋아하지도, 또한 그렇다고 사랑에 타지도 않았으며 원하던 것은 빠르게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가 생애에 놓지 않았던 건 단 두 가지, 자신의 지위와 그 지위를 이용해 현재형으로 아끼는 애매한 애인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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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여전히 회빛으로 변하는 중이다. 망한 곳들이 줄을 이은 세계는 제2회의 심리전을 이루며 살아가곤 했다. 사랑, 그래 이때까지 사랑은 처연하고 아름다운 생존 방식 중 하나였다. 생명을 포기한 세계에서 사랑마저 없애려 달려드는 머리 좋은 개차반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두머리의 법도마저 무너진 행성은 불완전한 형태를 유지하다가 멸망을 택했다.
그로써 인류의 마지막 법은 사랑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한 첫 번째 방도이자 마지막 법은 수가 반으로 잘린 사람들 사이에서 현명한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자신의 자식들을 더 이상 사랑으로 돌보지 못했고 결혼 제도와 종교는 사라졌다. 그 누구에게도 애정을 주지 않는 삭막한 나라를 만들고 오아시스는 한낱 신기루로 뒤바꾼 그 법은 확실히 독특한 시도였다. 질기게 싸움을 할 바엔 바짝 말라죽겠다는 사람이 늘어섰고 샘은 그쳤다. 말도 안 된다며 법도를 비웃던 인간들도 이젠 여유가 없는 마음을 뚫고선 무료하게 살아갔다. 하나의 기본이 빠지니 사람들은 갈증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불법이 아닌 죄들은 더욱 자주 벌어졌고 밤을 피하려 안식처에 콕 박힌 사람들은 움직이기 귀찮다는 핑계로 연락을 한 올씩 끊어냈다. 물론 여상은 그런 흔하고 삭막한 사람 중 일부였다.
“어, 연락? 못하지. 잘 지내고, 잘 가.”
그는 이기적이게도 이런 세상이 편했다. 몇 년을 연락한 친구와 연을 끊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행한 그는 아주 잠시 후회했으나 그것은 짧은 한숨으로 끝났다. 오퍼센트 정도 남은 폰은 충전기를 찾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여전히 나른한 날씨에 나가지 않고 소파에 드러눕는다는 게 이리도 행복한 일인지, 그는 최근에서야 많은 것을 깨닫고 있었다. 느려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 가지 신경쓰이는 게 있다면 지루함으로 가슴 한 켠에 먹먹한 먼지 세 덩이가 쌓여있다는 것인데, 이 갈증은 원래 간직하던 것이었으니 크게 마음을 두진 않았다. 생생한 웃음이 그득한 세상에서도 이 콘크리트 바닥에서도 원하지 않던 생수가 그의 머리로 떨어질 것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 날은 세상을 금지한지 일 년 오 개월하고도 일주일 뒤, 정확히는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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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색 빛을 띄는 가죽 소파에 누워있는 도중 올라오는 향들이 불쾌하다. 쾌쾌한 불내, 매캐한 담배 연기, 붉고 비린 쇳내와 아지랑이 피는 끈적한 향수의 찝찝함. 창문을 모두 닫고 다시 폭신한 소파 베개를 쥐어 안아도 아까의 만족감보다 부족했다. 풍족함 덕에 갈증을 메꾸던 것들도 마음에 차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태는 새로운 욕구를 낳았으나 그 욕구를 해결할 여상의 부지런함은 저기 널려 있었다. 창문을 닫고는 배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듯 멍청하게 누워있던 그는 손에 잡히는 리모컨을 돌리다가 전원을 눌렀다. 남아 있는 방송들은 시끄러운 뉴스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내보내는 중이었다. 전자 박스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쏟아져 나오는 범죄자들의 수배지를 보도하듯 읊는다. 여기가 뉴슨지, 범죄자의 신상 털기 방송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귀에 박히는 이름들이 머리 위로 맴돌았다. 최산, 박사랑, 김소망. 두 개의 이름은 반항에 어울렸으나 나머지 하나는 아니었다. 사람을 많이 품어서 산인가. 특이하게 빛나는 한 글자가 여상의 흥미를 사로잡았다. 그는 그때서야 화면을 바라봤다. 뭐가 좋다고 웃으며 찍힌 증명사진엔 붉고 검다란 머리색과 푹 패인 보조개가 대조적이었다. 산, 최산. 이름을 다시 되짚은 그가 사랑을 한 이를 한번 질책했다. 아까운 모습이었다, 제 앞에 있었다면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잡아둘 모습이었다. 분통한 마음에 여상은 뉴스에 나오는 무표정의 앵커만 쳐다본다. 동시에 거의 썩어가던 초인종이 울렸다. 여상은 인터폰을 확인하는 대신 자신이 무얼 시켰는지 생각했다. 세탁 맡긴 이불은 진작에 왔으며 시켰던 겨울 실내복은 내일모레 발송 예정이었다. 배달음식은 폰을 끈 지 오래였으니 시킨 적도 없다. 결국 느릿한 몸을 움직여 인터폰을 확인한 여상은 검붉은 머리가 동동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있었다.
[어제 신고가 된 나이 이십삼세 최산은 현재 도주 중인 것으로 추정되며...]
마침 뉴스에선 눈 앞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문장이 오가는 중이었다. 최산의 그 다급한 눈과 표정에 몇 초를 넋을 잃었던가, 여상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사각형 화면을 봤을 때 그는 옆집에서 나온 남자에게 팔을 잡혀 싸우고 있었다. 철문 뒤로 복도 내에서 울리는 소리가 몇 단어씩 섞여 들어온다. 아마 산이 수배지에 걸린 걸 아는 듯했다. 그 뒤로 들리는 소리가 앙칼지다. 문을 여니 둘이 여상을 돌아봤다.
“어, 여상 씨. 시끄러워서 나왔나 본데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놔주세요.”
응? 옆집 남자의 얼떨떨한 대답에 여상은 다시 한번 말했다. 놔주시라고요. 휙 돌아본 산이 애원의 눈치를 보냈다.
“얘, 제 전 애인이에요. 짐 가지러 가게 놓아주세요.”
사랑을 금지한 법의 가장 큰 단점, 이미 끝난 사랑에는 죄가 부여되지 않았다. 혹시 몰라 넣은, 법과 가장 가까이 있는 정치인들의 쥐구멍 같은 대책이었다. 그를 쳐다보는 두 쌍의 눈 모두 의구심에 차있었으나 둘은 자신만 보고 있었으니 거짓말이 들통날 일은 없었다. 산은 하루 전 쯤부터 수배지가 걸렸다. 그 말은 그가 몇 시간마다 애인을 갈아치운 게 아니라면 전 애인 행세를 하는 사람은 자신으로 충분하단 뜻이다. 대충 그렇게 생각한 여상은 반쯤 열었던 현관을 활짝 펼쳤다.
“뭐해, 최산. 안 들어가고.”
정말이지 애정이라고는 한 톨 섞이지 않은 톤이다. 산은 눈치를 깔짝깔짝 보다가 기회가 아까웠던지 여상이 열어둔 현관문 사이로 쏙 들어갔다. 그건 고개만 까딱 숙인 여상도 마찬가지였으니 멍청한 모양새로 복도에 남은 건 옆집 남자 한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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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구해줬어요?”
날카롭게 꽂힌 말에 여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시끄러워서요. 그걸 들은 산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였다.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 그 말에 대답을 않던 산은 그가 다시 해말간 미소로 던진 말에 손을 내젓게 되었다.
“그럼 신고라도 할까요?”
아뇨, 아아뇨. 늘여 뺀 말이 다급했다. 생각해보면 이렇고 저런 걸 가릴 때가 아니다. 쭉 내밀었던 입을 도로 집어넣은 산은 그제서야 불만을 지웠다.
엉성하게 집에 들어온 둘-사실 그렇게 들어온 건 산 뿐이다-은 유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눈만 마주치며 말을 걸지 않았다. 여상은 가만히 산의 얼굴을 구경하는 중이었으나 산은 식은땀에 얼굴이 절기 직전이었다. 아무 생각 없는 여상의 눈에서 무언가라도 읽기 위해서 나는 긴장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둥그런 시선에 부담스러운 미간이 찌푸려진다.
“아, 찡그리지 마요.”
왜지, 기분 나빴다고 신고하려고 그런가. 산의 배배꼬이고 일차적인 유치한 생각은 필요가 없었다. 여상은 그저 피그말리온이 조각상을 보는 바로 한 단계 아래에서 그를 쳐다본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일그러진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산은 깊게 들어간 탓에 그 가벼움을 읽지 못했다. 그 덕에 저려온 다리도 여전히 꼬인 채이다. 으음, 짧게 앓은 산이 고개를 돌렸다. 가지런한 집 안에는 손이 닿지 않은 흔적이 잘 보였다. 이 사람은 탁자를 쓰지도 않나. 그 위로 나타난 먼지 자국이 선명하다. 걱정은 걱정이고 궁금한 건 해결해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진 산은 질문하는데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았다.
“저기, 탁자는 왜 안 써요?”
“밥을 잘 안 먹어서요.”
아, 그렇구나. 여상의 시선은 여전히 산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빤한 시선이 계속 닿는 걸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가며 거실을 전부 훑은 산은 그제서야 여상과 눈을 마주쳤다. 다시 한번 정적이 돌아오기 전, 초인종이 울렸다. 여상은 당황스러웠다. 산이 오고 나선 무언가 산 적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수배자가 또 왔을리 없다.
“... 뭐해요, 확인 안해요?”
멍하니 뇌 속의 생각에 빠졌던 '그는 그제서야 퍼뜩 몸을 일으켰다. 인터폰을 확인한 여상의 머리에는 물음표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부른 적도 없는 경찰들이 문 앞에 음침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자수했어요? 할 시간이 있었나?”
“네?”
산이 여상을 휙 돌아봤다. 그의 찡그린 표정에 여상은 다시 한번 인터폰을 확인했다. 저 뒤에 작게 왔다 갔다거리는 옆집 남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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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되는 초인종 소리와 노크를 무시한 둘은 대충 자신들의 생각을 말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당신이랑 내가 뻥친 걸 옆집 남자가 알아차리고 신고한거 같다?”
끄덕끄덕. 산이 간단히 말하고 여상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밖에서 시끄럽게 내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저기요, 안 여시면 따는 수밖에 없습니다아. 여상은 급한대로 문을 열었으나 표정만큼은 여유로 완전히 차 있었다.
“아, 여기 신고가 들어와서 그런데요….”
인상 좋은 경찰 한 명은 사근사근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다른 한 명은 우그러뜨린 표정으로 집 안의 산을 발견하고는 부르는 중이었다.
“혹시 전 애인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게 남아있나요?”
있을 리가 없지.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산의 전 애인은 그를 신고하고는 혼자 살았고 여상은 사랑에 관심이 없던 인간이었으니.
“증거가 없어도 애정이 식으면 끝난 관계 아닌가요?”
“애정이 얼마나 식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여상의 순진한 대답에 산을 끄집어낸 경찰은 그런 질문을 한 그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그럼 여기서 키스를 해도 아무렇지 않으면 가실 건가요?”
특유의 건조하고 말간 질문이 장난스럽게 들렸다.
“그것밖에 없으면 해야죠, 해보시던가요.”
“그게 무슨 개소, 읍.”
여상은 다급했던 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뒷머리를 감싸 입을 맞췄다. 무작정 부딪친 입술 밑을 건드니 여전히 어리둥절한 산의 입이 강제로 틈이 난다. 들어간 혀가 익숙하게 질척한 소리를 내며 여러 곳을 유영했다. 산은 입에서 튀어 나올뻔한 욕을 간신히 막으며 여상에게 맞춰갔다. 헉, 경찰들인지 옆집 남자인지 모를 탄성이 여상의 귀에 쏘인다. 가만히 눈만 굴리니 해보라 시켰던 경찰의 표정이 당황을 띄고 있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여상이 산의 뒷머리를 놓는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입을 뗀 산이 일그린 표정으로 입을 거칠게 닦았다. 다섯 중 가장 아무렇지 않은 건 여상이었다.
“아... 그럼 확인 했으니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엔 조심해주세요.”
하하, 인상 좋았던 경찰이 머쓱하게 인사하며 까칠한 경찰에게 귀엣말을 했다. 내가 아니랬지. 뭐래, 확인은 해봤어야 됐어. 투닥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의향이 없었던 여상은 표정이 구겨져있는 산을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왜, 왜 이딴 방법을 써요?”
잔뜩 성이 난 목소리가 톤을 높여간다. 아니, 그냥 같이 갖고 있던 건 다 버렸다고 하면 될 일이지... 여상은 눈만 꿈뻑이며 산의 투정을 듣는 중이었다. 그러게요. 느긋한 대답이 높아진 목소리를 차분하게 내렸다.
“그래서 왜 그 방법을 쓴 건데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논제에 여상은 말을 내뺀다. 글쎄요, 왜 그랬을까요. 산은 답변을 듣고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놈은 상 또라이인 걸까, 아니면 그냥 느긋하다 못해 느려터져서 만사가 귀찮은 인간인 걸까.
“이게 가장 편해서?”
가장 어이없는 건 이 마지막 대답이었다. 결국 산의 결정은 반반이었다. 헤헤, 웃는 모양새가 연기인지 진심인지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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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던 공개 키스에 짜증난 산이 걱정도 잊고 도롱대고 있을 때, 여상은 그 앞에 주전부리를 잔뜩 갖다댔다. 죄송해요, 라는 사과와 함께. 단순한 산-자신은 아니라 주장한다-은 단 음식들을 오독오독 주워먹으며 슬슬 기분이 풀리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면 둘은 어울려서 나쁜 게 없었다. 여상은 평생을 그를 데리고 있어도 될 돈을 갖고 있었으며 산은 삶을 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친화력이 폴폴 넘쳐 흐르는 산은 의심과 걱정을 금세 거두고 여상에게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자고 있을 때 혼자 나가서 나만 신고하고 지는 튀고… 반말이 나오는 걸 안 건 정신없이 전 애인에 대해 털어놓을 때였다. 여상의 대답은 이미 반말로 바뀌어 있었고 산은 그것을 눈치챈 뒤 존대를 쓰는 성의를 지웠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알았어? 아는 사인가?”
애교 그득한 말투가 여상의 미소를 돋웠다. 저어기 나와서. 여상의 눈이 향한 곳에서 그가 그토록 지루해하던 뉴스가 퍼렇게 빛난다. 아, 산이 길게 탄식했다. 리모컨 어딨어? 아까와 같은 시선으로 티를 내니 홀랑 집어 푸른 화면을 꺼버린다.
“보기 싫어.”
“왜?”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거 아니지?”
응. 짧은 대답에 산이 뒤로 넘어갔다. 들썩하니 꺼지는 소파의 질감이 매끈하다. 너 돈 많아? 산의 짧은 질문에 여상은 잠시 생각했다.
“응, 많아.”
질리지만 않으면 너를 평생 데리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이 망한 후까지 우뚝 선 대기업의 유일한 자손은 뒷말은 꿀꺽 삼켰다. 적어도 소름돋는 말로 제 발로 나가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오랜만에 굴러들어온 흥미는 놓치기 쉬운 사람이었다. 다리도 달렸고, 생각도 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위험은 금세 알아차릴 사람. 여상은 문고리에 이중 잠금 장치를 다는 게 빠를지 그에게 확실한 신뢰를 얻는 게 좋을지 계산하는 중이었다.
“산아, 잠깐 여기서 지낼래?”
“... 그래도 돼?”
수배지에 오르기 전까지 염치가 있던 산은 호의를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으니 답은 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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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며칠 간을 여상의 집에서 지내며 느낀 점을 추리자면 세 가지였다. 일, 강여상은 돈이 많다. 이, 강여상은 자신을 편하게 대한다. 삼, 강여상은 이상하다. 두 개는 객관적인 결과였고 마지막 하나는 감이었다. 가끔 손톱을 질겅댈 때의 모습이 그랬고, 자신에게만 다정한 투가 그랬다. 쭈욱 올라갔던 여상의 신뢰도가 들쭉날쭉하다가 다시 안정기에 접어들기를 반복한다. 그 이상한 모양새가 아찔한 심장을 망치로 쳐댄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흔들다리 효과의 흔들다리가 상대방이 된 결과였다.
여상이 산을 집에 들이며 느낀 세가지. 하나, 최산은 애교가 많다. 둘, 최산은 갈 곳이 전혀 없다. 셋, 최산은 사람을 많이 품어서 산이 아닌 사람을 끌어들여서 산이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최산은 야속하게도 여상이 그를 보는 감정을 흥미에서 더 올려갔다. 이젠 목 끝까지 차오른 호감의 감정은 울컥울컥 물을 부어넣으며 다신 없을 강여상의 사랑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와 별개로 뭐든 한다면 올바름을 추구하던 산에게 여상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산은 여상에게 애매한 감정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손봐갔다. 오후에 일어나 풀린 눈으로 다시 흥미없이 하루를 마감하던 여상의 일상은 거의 반대로 뒤집어졌다. 일곱시에 일어난 그들은 간단한 아침을 먹고 흔한 대화를 나눴다.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산은 웃기 일쑤였다. 그들은 적어도 이틀에 한번 외출을 했다. 산이 부린 수많은 애교로 얻은 부탁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본 적 없는 흰 도로를 걷고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의 온기를 구경했다.
“야, 어때 재밌지.”
응, 재밌어. 별 거 없이 미소를 입에 건 산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는 것도 여러 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다시 집에 들어갔다. 또 노을이 질 때 쯤이면 뉴스를 틀었고, 해가 사라지면 장을 봐온 모든 걸 싹쓸어 어설픈 요리를 도전했다. 나태로 범벅되어 있던 삶은 겨우 이주만에 가뿐해졌다. 연이 지나도 이 포근포근한 감정은 설렘에 변치 않을 것이라고, 둘은 자신들의 마음만 도닥인다. 결과는 기분 좋게 빗나갔다. 별과 가루, 반짝이는 밤하늘, 이젠 게으르지 않은 여상의 미소, 달콤한 사탕의 행복. 변치 않을 것이라 느낀 그 몇 주의 경험은 겹겹이 쌓여 그들의 심장에 부푼 풍선을 몇 개씩 갖다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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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아.”
“응.”
“너 나 왜 데리고 있어?”
여상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간다. 산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냥, 이라고 답한다면 분명 가늘어진 눈초리로 바라보겠지. 문득 산과 만난 날이 떠오른다. 그 날의 참을 수 없던 바깥의 악취가 이젠 상관이 없었다.
“니가 좋아서.”
여상은 넘치는 감정을 숨길 생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먼지가 지워진 탁자에서 결을 매만지는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정교한 행동은 멀찍이 앉아있는 산의 눈에 그림을 그렸다. 하나하나 조각이 되어 펼쳐지는 여상이 이젠 이상하게도 멈춰보인다. 넓은 상아색 미술관에서 봤던 금빛 액자의 흑백 그림이 연상됐다. 자신이 작아지는 그 그림 앞에서 산은 이상하게도 풍성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두 가지 색이 다시금 앞에 존재하는 듯 기분이 한 풀 산뜻해진다. 색채로 반짝이는 그는 반대의 인간을 보고 가슴을 한껏 부풀렸다.
“응, 나도.”
부서지는 햇살이 뒤에서 산을 비췄다. 여상을 바라보는 보조개가 움푹 패여있다. 그들은 오늘, 애매한 연애를 시작한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법을 준수하는 척하기 위한 핑계였다. 이제야 정의가 내려진 둘의 관계가 우습고 사랑스럽게 한 획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