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제갈정난
유혈 요소 트리거워닝 주의
하나는 둘이 되고
_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알잖아."
거짓말. 거짓말. 내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홍중의 입가에서 미처 나오지 못하던 말이 맴돌았다.
그의 눈이 반쯤 풀어진 채 상대를 겨우 응시하고 있었다.
"힘 풀어, 아파."
"흑…!"
양손에 묶인 매듭은 움직이려 하면 할수록 더욱 조여져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대체 얻어내는 게 뭐야,
그는 속으로 수도 없이 묻고 싶었지만, 말은 입가에 붙어진 것 때문에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진정이 되었으면 이제 말해 볼까…?"
검은 테이프를 천천히 들어내고는 그는 조금씩 웃었다.
"넌 진짜 미쳤어……."
홍중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양 뺨 위로 눈물 두어 줄기가 흘러내려 그의 시선을 흐렸다.
"울면 농도 진해져서 안 될 텐데."
제 밑에 앉은 이의 머리칼을 두어 번 쓰다듬다 말고 성화는 일어섰다.
철제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고 전등을 하나씩 켜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달칵, 달칵, 달칵. 버튼 소리가 나자 천장에 달려 있던 전등은 치직 소리를 내며 연신 깜빡이다 빛을 냈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낡고 녹슨 열쇠가 전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홍중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몸을 떨었다.
점점 다가오던 길고 어두운 그림자는, 갑작스레 주저앉곤 이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귀를 찢는 악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지듯 앉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에 괴로워하는 이의 모습이 노란 조명에 비추었다.
홍중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았다.
"성화야. 이런 내 모습이 보여?"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의 표정이 갑작스레 떨려 왔다. 얼굴을 감싸 쥐던 손을 떼곤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이.
손에 들려 있던 낡은 열쇠 꾸러미를 바닥에 팽개쳐 버리곤 그는 홍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또.. 무슨 일이야...?"
광적으로 품었던 독기 가득한 눈이 더는 그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냉혈한 같던 표정은 급속히 풀려 제 감정선들에 철저히 휩싸인 것만 같은 그는 끊임없이 불안의 언어들을 뱉었다.
"나랑 관련 있는 일은 아니지.."
"그렇지."
"또 이럴 수는 없지…."
성화는 홍중의 양손에 묶여있던 줄을 풀고선 방 안에 켜져 있던 기계들의 전원을 모두 내렸다.
"우리 어디로든.. 도망치자."
홍중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성화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아예 건물의 비밀번호를 바꿔 버려 더는 누구든 접근할 수 없을 것만 같이 행동하는 성화를 바라보며 그는 웃었다.
고요한 비명
_
"몸은 좀 괜찮아..?"
그가 말을 걸어왔다. 홍중은 제 옆에 앉아있는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글쎄."
오랜 시간 묶여있던 탓에 그는 좀 지친 듯 보였다.
푸르게 멍이 든 제 손목을 내밀어 보이며 그는 엷게 웃었다.
터진 듯한 피멍과 군데군데 보이는 작은 칼집들이 성화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어떤 놈인진 몰라도……."
"으응."
"찾으면…. 내가 먼저 죽일 거야."
불안에 떨며 거의 혼잣말을 하듯 말을 중얼거리는 성화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홍중은 성화가 건넨 코코아를 받아들며 애매하게 답했다. 컵을 잡아 든 그의 왼손 소매 밑으로 벌건 흉터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보였다.
"예전부터 자꾸 그래. 정신을 차려 보면……."
"내가 피떡이 된 채 네 앞에 있겠지."
"한두 번이 아니야…."
"한두 번은 아니지."
홍중은 성화가 불안에 떨며 이런 말들을 해나갈 때마다 지나치게 차분하곤 했다.
마치 아까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불과 몇십 분 전, 제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남자 밑에 앉아 고통에 울부짖었음은 온데간데없이.
"너나 나나 멘탈에 힐링이 좀 필요하다.“
홍중은 웃었다. 담배 있냐, 는 신호와 함께 말이다.
"그치……."
주머니를 뒤지던 성화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분명 내가 두 갑씩이나 넣어놨는데…?"
"또 없어졌지?“
태연히 마지막 남은 코코아 한 모금을 입안에 털어놓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응대했다.
제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냄과 동시에 말이다.
"있었잖아."
"그냥 너 있으면 네 것도 맛 괜찮으니 달라고 했지.“
홍중은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치익 소리가 나며 시뻘건 불이 담배 끝에 일었다.
앵둣빛 입술 사이로 살살 퍼져나오는 담배 연기가 하늘을 향해 뿜어져 올라갔다.
"그거 난 좀 별로더라."
홍중을 바라보던 성화가 입을 뗐다.
"호불호 갈리는 느낌이긴 해."
캡슐을 똑 깨며 그는 답했다. 어느새 아까의 일은 잊었는지 서로를 향해 한껏 웃으며 대화하는 둘은 여느 평범한 연인 같아 보였다.
결국 우리는 어디로 행하는 것일까
_
도로를 달리는 차체가 가로등 빛을 받아 노랗게 반짝였다.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점점 삼켜지는 붉은 해가 눈에 가득 담겨와 빛났다.
"우리 대화가 좀 필요하지 않아?"
"필요하지."
"오갈 데도 없어 보이는데 우리 집이나 와."
"미치겠다 진짜."
"맞는 말 아니야?"
"맞는 말이라서 그래."
"솔직히…. 지금 집 들어가야 험한 꼴만 당할걸."
"내가 제일 잘 알지. 그 꼬라지 감당이나 하겠어..."
백미러에 달린 보랏빛 보석 모형이 차의 진동에 따라 함께 흔들렸다.
이를 잇고 있는 검은 줄은 단단히 묶여 놓칠세라 제 몸을 붙들고 있는 것을 꽉 잡고 있었다.
끼익- 바퀴에서 마찰음이 나며 차가 마당에 멈춰 섰다.
뒤를 힐끗 돌아보며 내리라고 말하는 홍중의 입가에 미소가 띠었다.
회피성 불안
_
"따뜻해라."
집 안쪽에 위치한 벽난로가 둘을 향해 열기를 내뿜었다. 장작 타는 타닥타닥 소리가 귀를 한껏 감싸 왔다.
"있잖아, 성화야."
"으응?"
"넌 정말 나를 사랑해?"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홍중은 말을 건넸다.
"내가 널 사랑하지 않고서 누굴 사랑해."
벽난로의 불빛이 성화의 눈에 가득 담겼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활활 타오르는 불기운을 응시하다 그는 제 옆에 있는 이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알아. 그래서 나도 널 사랑하는 거야."
왜냐면 넌 정말 날 끔찍이도 사랑하니까, 같은 말들을 몇 차례 더 중얼중얼 뱉고선 그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 미친 거야?
- 네가 드디어 미친 거지?
남성의 목소리. 마치 모든 걸 갈라놓을 듯 앵앵 울려대는 기분 나쁜 음성.
- 그 인간은 미쳤어. 당장은 널 사랑하는 듯 보일지 몰라도, 결국…. 널 죽이려 들고 널 처참하게 갈라놓을 거라고.
나도 알아. 알고 있다고. 그것쯤은 감수하고 살아갈 수 있다며, 수도 없이 외쳐대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
모든 게 무너져내릴 듯 절망적인 떨림을 내뱉고선 사그라져 가는 그.
그의 눈가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 홍중아.
제 애인의 목소리.
- 부디 날 믿어 줘.
"......"
"괜찮아?"
미동이 없는 그를 보며 성화는 말을 꺼냈다.
"으응. 잠깐 멍때린 거야."
"다행이네."
"있잖아."
"응."
"예전에 내가 꿈을 꿨었어."
"꿈?"
"응. 아주 기분 나쁜 꿈을."
"아직도…. 잘 때 시달리는구나."
성화는 홍중을 꽉 끌어안았다.
무엇이 널 괴롭히든 내가 모두 막아내 줄게. 지켜 줄게. 속으로 사랑의 언어들을 읊으며 그는 생각했다.
"왜인지 요새 자꾸 끝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어."
묘한 느낌.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막이 내려가는 이미지.
손을 흔들어대는 저 자신이 스스로를 옥죄이는 기분이었다.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있으니까."
"그렇겠지…."
둘은 상대를 슬 바라보다 웃곤 서서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때론 너무 많은 말보다는 행동이 빠른 법이라며.
감싸 안은 서로의 몸 위로 벽난로의 열기가 흘렀다.
진행되는 내면은 울지 않는다
_
반 나신의 몸을 이끌고 비몽사몽 침대에서 나오던 홍중이 눈에 가득 담겨오는 따가운 햇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제 애인을 뒤로하고 옷가지들을 챙겨 입곤 그는 거실로 나갔다.
"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조금 굳는 듯하더니 이내 한껏 찡그려졌다.
"아악-"
거의 집이 떠나가라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성화는 잠에서 갑작스레 깼다.
무슨 일이냐며 반쯤 감은 눈으로 허둥지둥 방 밖을 나오는 그에 홍중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길래 아침부터…."
"이 미친 진짜."
상대를 노려보다 홍중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의 목에 그득히 채워져 있는 붉은 표식들이 보이자 성화는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거실에 어질러져 있는 옷들을 정리하며 홍중은 한숨을 쉬었다. 혀를 내두르는 그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짓궂음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행복해 뒤지려고 그러다가 아침만 되면 꼭 이래 진짜."
"누가 모르냐, 너가 안 사리니까 나도 안 사린 거 아니야."
평소와 같은 농담들. 그러나 결코 그동안의 느낌과 같지 않았다.
겉으로는 애써 차분을 읊고 있었지만 둘은 선단 끝에 놓인 것마냥 내면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대로 이 관계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정처 없는 불안이 둘 사이를 감쌌다.
위태로운 만큼 서로는 서로를 원했다. 상대와 상대를 가로막는 알 수 없는 막, 그 막을 둘은 뚫고자 했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다.
- 서로가 누구였는지…. 모두 드러난 순간….
문득 누군가 책의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났다.
희미하게 생각난 것이라 그저 스쳐 지나가듯 넘겨 버렸다.
드디어 꺼내진
_
"너 요새 자꾸 불안하고 그러지."
담배 연기를 뱉어내다 말고 홍중은 그를 바라보았다. 뒤로 길게 뻗어난 머리가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집에 갈 때 병원 들러."
"그래야겠다."
함께 연기를 내뿜어내며 성화는 입을 뗐다.
테라스 난간의 유리에 그의 옷차림이 옅게 비추어 왔다.
저만치로 보이는 떼 지은 구름들, 중간중간 끊겨 이탈한 모습이 꼭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결과가 어떻든 너무 자책하지는 말고."
재떨이에 꽁초를 버리고 제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더 꺼내며 홍중은 응대했다.
그의 눈에 성화의 목에 잔뜩 나 있는 깊은 이빨 자국이 들어왔다. 예전부터 사라지지도 않고 날이 갈수록 더해져만 가는 흔적들.
"혹시라도 말이야."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말이 없던 성화가 말을 꺼냈다.
"내가 다시는 널 못 보면 어떡하지."
이에 그는 대답 대신 넌지시 미소지었다.
곧이어 성화는 조금 씁쓸한 웃음을 내보이며 시선을 멀리 던졌다.
폭발
_
밥도 안 먹고 어딜 나가려고 그래. 다급한 목소리가 홍중의 귀를 때렸다.
"약…. 먹었더니 좀 상태가 안 좋아."
"또 그거?"
"미안한데 나 잠깐만 내버려 둬 줘…."
눈이 아팠다.
심하게 올라오는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자꾸만 느껴지는 정체 모를 아픔이 홍중을 자꾸만 괴롭혀 왔다.
그러고는 마치 필름이 끊긴 것처럼 정신을 차려 보면 나 자신이 절대 스스로 가지 않을 만한 장소에 있다든지, 하는 상황들이었다.
어렴풋이 무언가와 겹친다 여기곤 했으나 깊게 생각할 여유가 그는 없었다.
눈이 심히 아프면 재빨리 애인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알았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성화는 답했다.
어디든 가야 해. 점점 차오르는 분노는 계속해서 홍중을 감싸고 돌았다.
내가 이래서는 안 돼. 중얼거리는 말들이 귀에 맴돌아 끊임없이 고막 속으로 파고들다 제풀에 이기지 못해 솟구쳐 나오기를 반복했다.
까드득.
그는 이제는 거의 병적으로 알약을 씹어먹었다.
약통을 몇 개씩이나 챙기곤 반사적으로 차에 타 홍중은 그곳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철문. 바뀐 비밀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겉에는 누군가가 발로 수도 없이 찬 듯한 모양새들이 가득한, 이에 따라 스며 나오는 냉기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 널 사랑하기 때문에 난 날 보호해야겠어.
마지막으로.
얄팍한 음성. 그 음성은 홍중의 귀에 맴돌았다.
구조는 이미 예부터 외워 빠삭했으나, 다만 늘 묶여있었기 때문에 저항하지 못한 것이리라.
순서에 맞추어 구석에 자리한 발판을 밟곤 물체를 끼우니 지하로 통하는 게이트가 열렸다.
'이건 내가 잘못되었을 때 쓸만한 거고.'
이것저것 물건들에 손을 대다 끝내 눈길을 떼지 못한 것은 피 묻은 조금 녹슬어진 식칼이었다.
'이 물건이 나랑 관련이 있었던가.'
무시하려 해도 자꾸만 챙겨야 할 것 같이 느껴졌다.
뭔가 이걸로 하려던 게 있겠지, 싶어 그것을 흰 천에 감싸곤 그는 지하를 나왔다.
‘어…?’
순간적으로 눈앞이 흐려지며 파직, 하는 느낌이 들며 온 신경으로 견딜 수 없는 통증이 파고들었다.
오른쪽 눈에서는 눈물 대신 진득한 피가 흘러나왔다.
"뭐야.“
남자는 감싸쥐던 손을 풀고는 당황스러운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고민하나 싶던 남자는 곧 조금 웃더니 상체를 두어 번 양쪽으로 돌렸다.
'또 여기네, 그나저나 박성화는 또 어딜 간 거야. 분명 또 도망갔겠지.'
도망가 봐. 한번 죽을 때까지 도망쳐 봐.
그의 얼굴에 살기가 흘렀다.
차체 보닛을 내리고 큰 집에 도착한 그는 정원이 곧장 보이자마자 한껏 웃음을 지었다.
대면
_
"씨발, 왜 자꾸 그 집에 가 있는 거야."
남자는 낮게 욕지거리를 읊조리며 철제문을 꽝 찼다.
열쇠도 잃어버렸지, 비밀번호도 안 맞지. 이게 뭐야.
그것만 주입하면 끝이었는데…. 끊임없이 병적으로 단어들을 중얼거리던 성화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대체 내가 언제 비밀번호를 바꿨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기억은 두통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것뿐,
그 이후로 눈을 떠 보니 또 그 음산하기 짝이 없는 큰 집이었다.
'그것만 성공하면 영원히 끝이었는데…. 영원히 내가 가질 수 있었는데….'
건물 안 홍중이 생각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순식간에 그가 이 안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 그는 몸을 떨었다.
언제까지 네가 이기나 보자. 한번 끝까지 도망쳐 봐.
인상을 잔뜩 구기며 성화는 문을 등지고 돌아섰다.
뒤돌아 발걸음을 떼려 첫발을 옮기는 순간, 익숙한 실루엣이 그 앞에 나타났다.
"넌 또 왜 여기 있어. 니 발로 들어가고 싶어, 거길?"
김홍중?
분명 닮았으나 그일 리 없으리라.
기분 나쁜 검은 눈과 소름 끼치는 미소가 연약이 제 밑에서 떨던 그일 리가 없었다.
"왜 거깄냐고. 미치고 싶어서 환장했나, 얘가."
실실 웃음을 흘리며 한 손으로 제 어깨를 잡아끄는 홍중에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알던 그 새끼 맞아?
당황도 잠시뿐 성화는 바로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너 그거였구나?"
다른 쪽 손으로 통을 꺼내 가볍게 가스를 주입하고는 곧이어 주저앉은 상대에 성화는 덧붙였다.
"진짜 이중인격자를 내가 여기서 볼 줄이야."
축 늘어진 상대를 거의 물건 잡아끌듯 잡으려는 순간,
"이런 거 나한텐 안 통한다?"
갈라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홍중이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순간적으로 찡하는 통증이 머리에 울렸다.
"니새끼가 알던 내가 누군지 나는 몰라도,"
잽싸게 뒤돌아 막았던 코를 떼고서 홍중은 제 손에 쥐고 있던 버튼을 눌렀다.
그들이 서 있던 바닥은 쿠르릉 소리를 내며 지하로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성화는 벙찐 듯했다.
"이러면 너만 힘들어져, 알잖아."
홍중은 웃었다. 상대의 목에 잔뜩 나 있는 붉은 이빨 자국을 보며 말이다.
"너…. 여길 어떻게…."
정면에 들어오는 큰 전신거울에 등장한 저 자신의 모습은 어느새 어깨를 잡힌 채, 군데군데 피 묻은 식칼이 목 끝까지 들어와 있는 모습이었다.
여긴 분명 열쇠를 통해 이어지는 구간에서 신체 인식까지 해야 뚫을 수 있는 곳인데.
마지막 수단으로 두었던 자폭 버튼을 대체 쟤가 왜 가지고 있는 거야, 그는 무언가가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걸 누르면 어떻게 되는지 알긴…."
"오늘따라 말이 많다?"
거의 닿을 듯 영 점 몇 센티만을 남겨놓고 성화의 목에 자리해 있는 날카로운 것이 흰 전등 빛을 받아 빛났다.
그간 상대에게 실험해 왔던 유독가스들을 모으고 합쳐 만든, 무슨 일이 발생할지 저도 모르는 물질.
그것이 곧 나오기 시작할 것을 그는 알았기에 몸을 떨었다.
자신을 평소 힘의 거의 수십 배로 붙잡고 있는 홍중을 그는 당해낼 수 없었다.
흐리멍덩하게 풀린 눈빛은 어디로 가고 당장이라도 무언갈 찢어놓을 듯 검게 번득이는 눈이 그에게 꽂혀 들어갔다.
어느새 희뿌연 연기, 점점 스며드는 아릿함이 꼭대기에 도달해 춤추기 시작했다.
한쪽 눈에는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독한 불치병,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끊이지 않는 아픔이.
심장이 조여 들어가는 듯 아파 왔다.
환각처럼 나타나는 이미지가 둘을 뒤덮어 이는 점차 뚜렷해져만 갔다.
볼 수 없는 기억
_
- 살려.. 주세요... 아악, 흑..!
목 끝까지 식칼이 들어온 채 울부짖고 있는 남자. 그를 꼭 안곤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중얼거리며 웃는 남자.
- 성화야. 그렇게 좋아하면 내가 널 더 괴롭히고 싶어져….
한없이 올라가는 입꼬리.
날이 어느새 닿아와 얄팍한 피가 흐르자 이제는 온몸을 벌벌 떨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남자.
- 예쁘다, 너무 예뻐... 그거 알아..?
- 내가.. 다 잘못했어…….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 그렇게 앙앙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 때가…. 제일 꼴리는 거 알아..?
얼굴을 타고 내려 목까지 한없이 흐르는 눈물, 그 위로 난 깊고 붉은 이빨 자국.
같은 곳에 더해지는 고통.
- 아악...!! 흑…!
까드득 소리가 나며 남자의 목 위로 검붉은 피가 솟구쳐올랐다.
- 내가 곧 네게 마지막 사랑을 줄게.
그리고 피어오르는 또 다른 이미지.
- 눈을 뜨면.. 자꾸 낯선 허름한 집이야.
곳곳엔 무서운 것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분명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하실에서 묶인 채 울고 있었지.
성화는? 박성화.. 그새 바뀐 건가….
어느새 눈 통증을 호소하는 남자를 뒤로하고 집에서 도망쳐 나온 남자.
숨이 멎을 듯 달려 나오다 어느새 차디찬 벽에 기대어 미처 흘리지 못한 눈물을 떨구는 이.
- 난 널 사랑하지만…. 날 보호해야겠어.
목 뒤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있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거치고 거쳐 도착한 곳은 넓고 화려하지만, 왠지 모르게 온기가 돌지 않는 큰 집.
어느새 집에 도착한 그의 앞에 마중 나오곤 깜짝 놀라는 제 애인.
- 너 진짜 사람 걱정시킬래…? 또 어디 갔다 다치고 온 거야….
- ....그냥 미친개한테 물렸어.
- 그러잖아도 나도 갑자기 정신 차리니까 기분 나쁜 거기.. 그 집이길래 너 졸라 찾았단 말이야...
넌 모르겠지.
작게 속삭이는 서로의 무의식이 먼 곳을 향해 퍼졌다.
유독한 연기. 정신적으로 해약해지기에 좋은 매캐한 것은 변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그것은 삽시간에 서로가 모든 것을 깨달아버리게끔 헸다. 알아서는 안 되었을 것까지.
서로는 죽어도 아닐 거라며.
끝에 다다를수록 거의 병적으로 읊던 그 마지막 음성은 연기와 함께 끝내 잦아들었다.
"......"
지상에서 쿠르릉 소리가 나며 진동이 일었다.
花樣年華
_
많은 시간이 둘을 가로막고 흘러갔다.
병실 창문을 통해 떨어지는 빗물이 창가를 타고 툭툭 흘려내려 떨어졌다. 어두컴컴한 병원 독실 안에는 작은 랜턴만이 작은 책상 위에 놓여 어렴풋이 책을 비추고 있었다.
"약 드실 시간입니다."
젊은 간호사는 가지각색의 약병을 들고 홍중에게 다가갔다.
까드득. 곧이어 맨 알약 씹어먹는 소리가 조용한 병실 안에 울렸다.
"씹어 드시지 말고요…."
까득. 두 번째 알약을 반쯤 씹어 뭉개다 말고 홍중은 물을 들이켰다.
이제 저 자신의 어느 쪽도 이젠 분노조차 사라진 길 잃은 자아일 뿐.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깨달아버렸기에 더는 서로는 대면한 채 견딜 수 없었다.
빗줄기가 계속해서 세차졌다.
그의 진짜 얼굴이 무엇이었는지 그려지지를 않는다.
파직, 한쪽 눈에서 시작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온몸에 흘렀다.
- 서로가 누구였는지 몰랐을 때 그들은 제일 아름다운 관계였다.
절대 볼 수 없는 등진 얼굴이 결국 모두 드러난 순간, 모든 것이 망가져 내렸다.
홍중은 멍하니 책의 한 구절만을 바라보나 싶더니 곧 책을 덮었다.
귀에 꽂은 것에서는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은 노래 화면을 띄웠다.
빗소리가 계속해서 세차졌다.
덜컹이는 창문 너머로 멀리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속절없이 바라보던 그는 곧 눈을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