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새턴의 고양이

보르도

*약간의 트리거 워닝 주의

 

 

 

산은 익숙하지 못한 이 장소가 버겁다고 생각했다. 쿵쿵, 시끄럽게 흐르는 음악에 귀가 얼얼한 건 둘째 치고 반은 헐벗은 사람들이 서로 엉겨붙은 모양새를 보자니 영 불편하다. 평소 노래를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들어도 조용한 발라드 쪽만 듣는 산에게 있어 이런…, 시끄럽고 귀 아픈 곳은 딱 질색이었다. 바닥을 딛고 있는 발을 통해 쿵쿵 울리는 음악 속 비트가 따라 올라와 산을 쿵쿵 흔들었다. 몸 속 장기가 그 비트에 맞춰 쿵쿵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썩 좋지 않아서, 산은 괜히 양쪽 발을 어정쩡하게 바꾸어 들어가며 이 무리에 섞이길 거부했다.

 

캔서, 여기는 리베라예요. 산은 시끄러운 음악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목소리에 하아, 한숨을 내쉬고는 마른세수를 하는 척 입가를 가렸다. 들려. 다시 한 번 클럽 내부를 슥 훑어보던 산은 으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길어지는 음성을 흘려들으며 익숙한 얼굴 몇을 확인했다. 종이가 넘어가며 팔락이는 소리, 펜이 무언가를 적어내리는 소리, 무언가 안 풀리는 듯 너머로 들려오는 작은 욕설. 몸을 돌려 난간에 기댄 산은 날씨가 추운 줄도 모르고 가벼운 차림새를 한 채 움직이는 사람들을 훑어보다 드러난 소매 사이로 보이는 종이 팔찌를 확인했다. 입장권과 같은 그 종이를 손으로 어루만지던 산은 곧 아! 하는 탄식에 귀를 기울이며 스테이지 근처를 살폈다.

 

 

“캔서, 들려요? 들리면 오른쪽 엉덩이 찰싹.”

“새턴한테 얘기해?”

 

 

아하하, 뭘 또 그렇게까지이! 누가 봐도 산을 놀리고 싶어서 안달 난 말투가 퍽 얄미웠다. 나름 경고를 섞어 얘기했는데 듣는 이는 농담을 받아친 줄 알았나 보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뚫고 꺽꺽, 희한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갑작스럽게 허리에 둘러지는 긴 팔에 멈칫한 산이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단단히 붙잡는 탓에 돌아볼 수가 없었다. 재빨리 스테이지 위를 훑어 머리통을 세던 산은 그 수에 변함이 없음을 알아차렸고, 이내 반대쪽 난간에 있어야 될 인물이 없음을 알아차리고는 쿵쿵 세게 뛰던 심장을 그제야 가라앉혔다. 캔서, 캔서? 들려요? 캔서? 끊긴 웃음에 이어 들려오는 말이 없자 급하게 산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시끄러운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산의 인상을 찌푸리자 손목을 잡은 그가 자신의 입가로 끌었다.

 

 

“리베라, 여기 새턴.”

 

 

산은 어딘가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구긴 채 민기를 올려다보았고, 민기는 그런 산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손바닥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

 

 

둘이 처음 만난 날에는 비가 왔다. 쏟아지는 억수비 사이로 번쩍이는 천둥에 지나가던 이가 놀라 소리를 질러댈 정도였고, 며칠이나 내리던 비 덕분에 저마다 우산을 쥐고 있었다. 딱 한 사람, 최산만 빼고.

 

산은 우산도 없이 가만히 골목 앞에 서있기만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마다 병신 바라보듯 쳐다봤지만 산은 개의치 않았고, 간혹 교복을 입은 학생에 대한 걱정을 가진 어른들이 다가와 우산을 기울였지만 이내 5분도 안 가 떨어져나갔다. 최산은 비를 맞고 있는 게 좋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이 두피가 찢어질 듯 내리는 비에 금방 씻겨나가는 느낌이 들어서, 간혹가다 무언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번쩍이는 천둥에 정신이 들어서. 내리깐 눈꺼풀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곧이어 속눈썹을 타고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사람들이 오고가는 골목에 멍하니 서서 억수비를 곧이곧대로 맞고 있던 산은 별안간 뚝 끊긴 빗줄기에 고개를 들었다. 하도 비를 맞아 얼얼한 몸뚱이는 그제야 추위를 느끼고 소름이 돋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희뿌연 담배연기였다.

 

 

“우산 없어?”

“…….”

“갈 곳은?”

“…….”

“없으면…,”

 

 

따라와. 훅 끼쳐온 차가운 비바람에 지워진 담배연기 너머로 그제야 얼굴이 보인다. 산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우산을 기울이고 선 민기와 시선을 마주했고, 그 입새로 새어나오는 연기에 작게 콜록였다. 세상 어떤 사람이 나이 먹고서 따라오라는 말에 덥석 따라가겠는가, 심지어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무섭게 생긴 사람인데. 최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저 무덤덤한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최산은 열여덟이나 먹었지만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는 바보는 아니었다. 서너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최산은 의심이 담긴 눈으로 송민기를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너 살 먹고 유괴범 못 알아보는 애가 아닌 최산은 송민기가 유괴범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종일 떠돌아다니느라 배가 비쩍 곪은 개 한 마리, 다리 부러진 고양이 한 마리 집으로 데려가는 그냥 적당한 동정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담배연기에 콜록거리며 기침을 뱉어도 끄지 않았지만 우산을 기울인 탓에 젖고 있던 등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최산은 우산도, 갈 곳도 없었기에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잡기로 한다.

 

송민기는 최산을 정말 떠돌이 개나 길고양이 대하듯 행동했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더럽다고 씻겨주지 않았고, 추위에 떤다고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것 정도. 짐승과 달리 손과 발이 있어서 혼자 씻고 혼자 몸을 말렸으며 혼자 옷을 입었다. 교복만 입은 채 몇 시간이고 억수비 아래에 서있던 탓에 으슬으슬 몸이 떨렸지만 민기는 약 대신 방을 내주었다. 배가 고프냐 물어보는 대신 냉장고를 채우고, 춥냐고 물어보는 대신 두터운 이불로 바꿔주고. 그 사소한 행동들에 최산의 의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저씨.”

“…….”

“나 사람을 죽였어요.”

 

 

젓가락으로 코코아를 천천히 휘젓던 산이 덤덤하게 얘기했다. 옆집 개가 죽었다고 말하듯, 꼭 본인이 제 삼자인 것처럼. 소파에 기대 앉아 재미도 없는 예능을 뚫어져라 보고만 있던 민기는 그 폭탄발언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부엌에 멀거니 서있는 산에게 시선 하나 던져주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 같다. 당장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한 상황이라기엔 감정의 동요들이 없다.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한 사람도, 그 고백을 들은 사람도. 산은 예능에서 흘러나오는 가식적인 웃음소리들에 잠시 시선을 뺏겼다가, 다리를 꼬는 그 움직임에 도로 민기를 응시했다.

 

 

“어디서?”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적당한 말은…, 아니지 않나? 산은 지금 이 상황을, 저 사람을 어떻게 봐야 되는지 고민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말에 진짜냐고, 정말로 사람을 죽인 거냐고 물어보는 대신 어디서 죽였냐는 이 물음이 정상적인 건가. 무언가 비뚤어진 분위기에 멈칫한 산이 코코아 위로 후후 내불던 숨을 멈추었다. 꾹 다물린 입술에 맞게 점점 길어지는 정적에 따라 산을 바라보던 민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답을 재촉하는 듯 소파 위를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에 쫓기는 느낌이 들어 머뭇거리던 산은 결국 숨기려고 했던 자신의 죄를 들추기로 했다.

 

최산은 형 하나, 누나 하나를 두고 막내로 태어났다. 남들은 막내로 태어나면 부모님의 사랑 다 받아가며 오구오구 아주 사랑둥이로 큰다던데, 최산은 아니었다. 3대독자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독점해온 산의 형은 본격적으로 비뚤어져 산을 괴롭혔다. 이제 막 기어다니기 시작한 아기를 발로 밀어 넘어트린다거나, 먹고 있던 이유식을 괜히 뒤집어 쏟아버린다거나. 그런 사소한 괴롭힘으로 시작해 기어코 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학교 후배들을 시켜 본격적으로 폭력을 가했다. 산의 누나는 애초에 산을 고깝게 보고 있었고, 사랑은 본인끼리 나누었으면서 정작 태어난 산에 대한 사랑이 없었던 부모님은 그저 방치하기만 했다.

 

그러던 와중에 부모님의 이혼이 있었다. 돈이 많은 어머니는 이제 더는 키울 걱정 없는 형과 누나를 데리고 강남으로 갔고, 돈이 없던 아버지는 떠넘겨진 산을 데리고 서울 외곽으로 밀려났다. 남은 돈으로 겨우 집을 구하고 산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산은 아버지의 여자친구가 집에 올 때면 항상 5평밖에 안 되는 자신의 방에 갇혀 나가지도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뺨을 맞고 머리통을 맞았으며, 가끔 여자친구와 싸우고 온 날이면 고주망태가 되어 아무렇게나 발길질을 했다. 학교생활에 필요한 학비는 대주었으나 그 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산은 고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바로 아르바이트를 구해 살았다, 혼자서.

 

그리고 사건의 그 날, 비가 많이 오던 그 날. 최산이 송민기를 만나고, 송민기가 최산을 주웠던 그 날.

 

 

“내가…, 어? 씨발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제 잘못 아니잖아요.”

“뭐? 씨발, 너 때문에, 어?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냐고!”

 

 

살지 마세요, 그럼.

 

이미 몇 번의 주먹질과 발길질을 견뎌낸 산은 시큰거리는 팔목을 붙잡고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었다. 꼴에 기독교라고 한 쪽 벽면에 걸어놓은 큰 십자가와 못이 박혀 축 늘어진 예수가 산을 바라본다. 전등 하나 켜지 않아 어두운 집은 창문으로 비춰오는 빛 하나에 의지할 수 있었는데, 그 빛은 산과 십자가를 빗겨나가 바닥에 내리쬐고 있었다. 딱히 용서를 빌 생각은 없었지만 무릎을 꿇고 있으니 꼭 기도라도 하는 것 같아서, 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바닥에 꿇고 있는 무릎이 무언가에 데인 것처럼 뜨겁다. 산은 한참이나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바닥을 적시는 것도 모자라 산의 무릎까지 뜨겁게 적시고 있는 검붉은 웅덩이와 그 위로 누워있는 아버지까지. 위로 쏟아지는 햇빛은 우습게도 산의 허벅지 근처에도 닿지 않았고, 산은 그 빛이 꼭 승천길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예수 믿는 애들은 이런 말 안 쓰던 것 같던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그 빛에 떠도는 먼지들을 가만 바라보던 산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피가 튄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살면서 기도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최산은 시체 위로 비추는 햇빛, 그리고 어둠 속에 걸린 십자가와 예수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하나님 아버지, 뭐가 됐든 저희 아버지는 데리고 가지 마세요. 제발 지옥으로 떨어트려서 사탄이 제 아버지를 지옥불에 담가버리도록 도와주세요.”

 

 

우르르 쾅쾅, 만화 속에서나 봐온 멘트가 머릿속에 그대로 적혔다. 번쩍이는 빛에 눈꺼풀을 들어올린 산이 고개를 돌려 창문 바깥을 응시했고, 그 얇은 유리 너머로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비가 오네. 신이 노크라도 하듯, 창문 위로 비가 톡톡 두드려 산을 재촉한다. 우습게도 산은 그 노크와도 같은 빗소리가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 잘나신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를 지옥으로 보내주겠다는 듯 찾아온 것만 같아서, 산은 바닥을 짚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흠뻑 적신 피가 옷을 타고 발등까지 차분히 내려와 자국을 남긴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던 산이 창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비가 열린 창문 사이로 침범하고, 산은 그 비를 가만히 바라보다 힘이 빠진 다리를 뻗어 집 밖으로 나섰다.

 

억수비가 쏟아졌고, 건물을 나서자마자 산의 몸을 적셨다. 짧게 자른 투블럭의 머리부터 시작해 입고 있던 교복, 뜨겁게 적셔진 무릎에 이어 그 속을 파고든 피까지. 모든 게 비에 씻겨 아스팔트 사이로 사라진다. 최산은 그 비를 맞으며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병신 보듯 바라보아도, 자기들끼리 입을 가리고 떠들어도 산은 개의치 않고 걷고 또 걸었다. 이 정도 떨어지고 골목 사이로 숨으면 죽은 제 아버지의 영혼이 발견하지 못할 거라고, 아무리 피눈물을 흘리고 눈에 쌍심지를 켜도 결국에는 놓칠 거라고. 산은 그렇게 좁은 골목에 숨어 비를 맞았다. 옷에 남은 피가 빗물에 완전히 씻겨내릴 때까지 기다리며.

 

 

“집이 어딘데.”

“얘기하면요?”

 

 

산의 물음에도 민기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고, 그 대신 커피 테이블 위에 놓인 수첩을 대충 찢어 펜과 함께 산 쪽으로 내밀었다. 부엌 언저리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산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다시금 소파 위를 두드리며 재촉하는 민기의 행동에 천천히 다가가 찢어진 종이 위로 집주소를 적었다. 추위에 얼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뜨거운 코코아가 담긴 컵을 쥐고 있어서 달아오른 건지 모르겠지만 손의 마디가 전부 붉다. 민기는 호수까지 적힌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덮어놓은 핸드폰을 뒤집었다. 전화가 오고 있었지만 진동이 없는 걸로 보아 무음이었나보다. 산은 괜스레 민기의 눈치를 한 번 보다 소파에 앉았고, 민기는 그 전화가 끊기기 직전에 액정을 두드려 전화를 받았다.

 

새턴, 제발 전화 좀 받으세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는 제법 화가 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 반해 민기는 덤덤한 표정으로 종이 위를 쓱 훑어보고는 별다른 말없이 곧장 그 주소를 부른다. 왁왁 개 짖듯이 소리를 지르던 전화 너머의 상대는 민기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곧장 입을 다물었고, 그 전화 너머로는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정리해.”

“예. 아니, 근데 새턴…!”

“끊어.”

 

 

단호하게 전화를 끊어버린 민기가 곧장 핸드폰을 뒤집었고, 언뜻 보이는 핸드폰 밑에서 빛이 번쩍거린 걸로 보아 다시 전화가 오는 듯 싶었다. 산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민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말에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어딘가로 전화해 정리하라고 하는 이 남자를, 대한민국에서 굳이 새턴이라 불리는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민기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시 전화가 오든 말든, 개의치 않고 손 안의 종이를 구겨 테이블 위로 톡 던진다. 이내 경계심에 눈을 날카로이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산을 발견하고는 손을 뻗어 덜 마른 머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요새 밖에 나가면 열에 여덟은 하고 있는 흔한 투블럭이었는데, 왠지 모르겠으나 산이랑은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전한 속머리를 문지르던 민기가 피어싱 자국만 남은 귀를 툭 치고는 산의 손에서 코코아를 뺏어들었다. 하필이면 또 용도가 다른 컵에 담아서. 민기는 뜨거운 컵을 쥔 채로 산을 응시했고, 순식간에 코코아를 뺏긴 산이 머뭇거리다 손을 움츠렸다.

 

아버지라고 생각해? 민기의 물음에 산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아 자신의 발을 응시했다. 회색의 부드러운 러그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흰 발등을 가만히, 그 위로 핏자국이 남은 것만 같아서 괜히 발을 꼬았다. 러그 위에 놓인 발마저 다르다. 두터운 검은색의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민기와 맨발의 산. 피가 같으니 아버지는 맞죠, 딱히 그렇게 생각해온 적은 없지만. 산은 부러 러그 위로 발을 살살 문지르며 대답했다. 한참 뒤에 돌아온 대답에도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민기가 다시금 핸드폰을 뒤집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아까 전에 보았던 이름과 같았고, 산은 그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입모양을 그렸다. 리베라. 익숙하지 않은 말은 소리를 죽인 채 입 안으로 먹혀든다.

 

 

“아니, 새턴! 도대체 어디예요?”

“찢어서 버려.”

“예? 잠시만요. 새턴이 하신 거예요?”

“아니.”

“그럼요?”

 

 

고양이. 민기는 턱을 괸 채로 덤덤하게 얘기하면서도 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장 자신의 아버지의 시체가 찢겨 어딘가로 버려질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은 졸지에 고양이가 되어버린 본인이 머쓱해 괜히 뒷목을 주무를 뿐이었다.

 

다음날, 민기는 잠에 덜 깨 비척이는 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의 시체를 잘게 잘라 바다에 버렸다고 전해주었다. 신고 들어온 건 없었으며 청소까지 전부 다 했으니 가보고 싶으면 얘기하라고, 마치 산이 그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얘기했다. 아직 제대로 눈도 못 뜨고 눈가를 비비던 산은 민기의 말을 얼추 알아들었다. 이제 네 집은 그 시체가 있던 집이 아니야. 십자가라고는 한 개도 없는 이 커다란 집이 앞으로 네가 살 곳이야. 산은 머리 위를 덮은 민기의 큰 손에 머리를 부볐다. 그 꼴이 퍽 고양이 같아서, 산은 스스로가 우스웠지만 아닌 척 벽에 기댔다.

 

약간 부자연스러운 전개들의 연속이었지만 민기는 본인의 직업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잠에 덜 깬 산이 씻고 나와 주섬주섬 민기의 옷을 빌려 입을 때까지 소파에 앉아 얌전히 기다리다가, 큰 허리춤에 고무줄을 최대로 당겨 묶고 있는 산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사람 처음 죽인 놈이라기엔 눈빛이 너무 덤덤하기에 학생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남의 옷 좀 입었다고 이렇게 뼈대 얇은 티가 나는 걸 보니 학생은 학생인 것 같다. 어벙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탔으면서 안전벨트는 또 야무지게 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기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약간 애매하지만 민기의 직장에 따라가게 된 산은 경계심이 가득했다. 딱 봐도 합법적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저마다 민기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으며, 그 후로 곧장 민기의 옆에 움츠리고 선 산을 빤히 응시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아 민기의 뒤에 찰싹 숨었던 산은 얼마 안 가 팔을 잡아당겨 옆에 세우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경계심에 날이 선 눈으로 주변을 훑으면서도 민기의 옆에 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는 산을 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시선을 보냈다. 쟤가 그 고양이구나. 입 싼 리베라 덕에 이미 건물 안에 죄다 퍼진 그 고양이의 주인공이 바로 쟤구나.

 

 

*

 

 

“예? 아니, 새턴이 왜 거기 있어요?”

“끝났어.”

“뭐야, 새턴은 제 말 안 들리잖아요. 지금 혼자서 할 말만 하려는 거죠? 캔서, 새턴한테 진짜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해주세요.”

“화장실, 문은 걸어놨어.”

 

 

제발…, 일 끝나면 빨리 얘기하라고 했잖아요…. 리베라의 원망 섞인 목소리는 당연히 산에게만 들렸고, 정작 그 원망의 주인공 민기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산의 소매 안쪽에 붙은 마이크를 떼 스테이지 쪽으로 휙 던졌다. 사람들에게 밟혀 부서질 저 마이크가 당장 40만원이 넘는다는 것은 당장 리베라만 알고 리베라만 슬퍼할 소식이기에 산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엉엉 원망만 늘어놓던 리베라의 목소리까지 들리지 않기에 돌아보니 소형 이어폰까지 빼낸 민기가 똑같이 스테이지 위로 툭 던진다. 민기 몫의 것들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산은 적어도 리베라가 진짜로 울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도 산은 민기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민기도 딱히 산에게 일 시킬 생각 없이 데리고만 다니려고 했는데, 그 문제의 ‘고양이’가 나타났다는 말에 허겁지겁 뛰어내려온 리베라가 산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민기를 두고 한참 떨어져서 아주 싹싹 빌고 빌었다. 저 분조장을 감당할 사람은 산밖에 없을 거라고, 뭐가 됐든 산이 새턴을 쥐어잡을 수 있다고. 산은 민기의 눈치를 한 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죽인 고등학생이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고 해서 일반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열여덟에 민기를 만나 어느덧 성인이 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민기도 서른이 되었다. 뼈대도 얇고 덩치부터가 작았던 산은 내내 캣으로 불리다가 성인이 되고서야 캔서라는 이름이 생겼다. 하도 근육이 없다고 잔소리를 들은 탓에 운동을 했고, 밖으로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던 투블럭 머리는 제법 많이 긴 상태였다. 그리고 최산이 그렇게 달라진 만큼 송민기도 변한 부분은 있었다. 예를 들면 산이 열아홉이 되면서 담배에 관심을 가지자 몇 번이고 기침을 하고 코를 막아도 피우던 담배를 갑자기 끊었다는 것이나 더는 산을 고양이 정도로 보지 않는다는 것 정도.

 

 

“새턴, 이래도 돼요?”

“새턴 말고.”

“…아저씨.”

 

 

처음에는 왜 리베라가 민기를 분조장이라고 부르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그 당시 산이 보는 민기는 차분하고 덤덤했으며 어른스러운,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실제로 그 후로 몇 번이고 리베라가 아 미친 분조장 새끼! 하면서 소리를 질러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오의 심부름을 하고 생각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한 산은 자연스럽게 민기의 사무실로 향했다. 리베라가 문자로 저 미친놈 또 지랄이라며 욕을 해댄 것이 갑자기 떠올라서 무심코 찾아간 것이었는데, 4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산을 발견한 리베라의 표정이 단번에 펴졌다. 왠지 모르겠으나 사무실 문에서 엘리베이터까지 핏자국이 이어지고 무언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리베라는 산을 보자마자 냅다 민기의 사무실 안으로 밀었고, 엉망이 된 사무실을 둘러보던 산은 책상을 짚고 거친 숨을 내쉬는 민기를 발견했다. 아저씨? 산의 목소리에 돌아보는 민기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게 없이 덤덤해서, 산은 엉망이 된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왜 아저씨 소리를 좋아해요?”

“왜?”

“리베라도 아저씨를 새턴이라 부르고 레오나 스콜피오, 전부 새턴이라 부르잖아요.”

“그래서 좋아해.”

“…….”

“다른 사람들한테는 새턴이지만 너한테는 아저씨니까.”

 

 

작은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던 민기가 산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정신 산만한 사람들을 뒤로 두고 클럽을 나섰다. 송민기와 최산, 새턴과 캔서의 관계는 애초에 애정을 기반으로 둔 사이였다. 민기가 분조장 모드가 될 때마다 리베라가 산을 부르는 것도, 레오가 민기에게 줄 물품들을 전부 산에게 부탁하는 것도. 초반에야 따로 썼던 방도 지금은 산이 민기의 방으로 옮겼으니 말은 다 했다.

 

송민기는…, 분노조절장애라기보다는 원래 성격이 그랬다. 본인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마음에 안 드는 티를 냈고,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기분 나쁜 티를 냈다. 주로 그럴 때마다 꼭 눈치 없는 부하직원들이 있었고, 민기는 참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화살은 그 눈치 없는 부하직원들에게 향했다. 어쩔 때는 손이 완전 아작이 나서 흰 천을 손에 감고 응급실로 갔으며 어쩔 때는 크리스탈 명패로 맞은 머리가 찢어져 얼굴 가득 피를 흘리며 부축을 받고 나간 적도 있었다. 열여덟 최산의 살인 고백에도 덤덤했던 송민기는 그만큼 폭력에도 덤덤한 사람이었기에 매번 피해자가 늘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송민기는 본인의 고양이 최산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리베라가 비싼 돈 주고 맞춘 크리스탈 명패를 깨고 부하직원들을 때려 뼈를 부러트려도 최산이 눈앞에 나타나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매번 보이는 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비가 오던 그 날에 먼저 우산을 내밀었던 순간부터 산은 한 번도 본인의 특별대우에 있어 의구심을 가진 적이 없다.

 

 

“아저씨.”

“응.”

“왜 저는 안 때려요?”

 

 

운전석에 앉아 히터를 튼 채로 가만히 차 안 온도를 확인하던 민기는 갑작스러운 산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고, 올곧은 눈빛에 어이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안전벨트를 맨 꼴이 퍽 귀여워 빤히 바라보니 히터 바람을 조정하던 산이 손을 뻗어 민기의 앞머리를 정리한다. 내가 널 때렸으면 좋겠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헛웃음과 함께 튀어나온 물음에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던 산이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산의 마른 볼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린 민기가 차를 몰아 부드럽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

 

 

리베라의 호출이 왔다. 근처 편의점에 있던 산은 심상치 않은 문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별안간 불안감이 들었고, 레오 몫의 담배 한 갑을 사면서 오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카운터에 던지고 걸음을 재촉했다. 평소와 같이 단순한 폭력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뒷골이 쎄하게 당겨오며 최산의 불안감을 더한다.

 

회사 건물에 도착한 산은 이상하게 피비린내를 맡았다. 분명 로비 어디를 둘러봐도 피를 흘리는 사람은 없었으나 자꾸만 소름이 돋으며 비린 냄새가 산의 등을 떠밀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마침 1층 화장실에서 나오던 레오가 반갑다는 듯 손을 들며 담배를 찾았지만 산의 걸음은 멈추지 않고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민기의 사무실이 있는 4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웅웅, 오늘따라 시끄러운 소음을 내는 것만 같다. 왜 이런 식으로 호출을 했지? 단순한 사고가 아닌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점점 지저분하게 늘어난다. 기계음과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에도 선뜻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산은 결국 문이 닫히기 직전에 발을 내디뎠다.

 

왜 로비에서 피비린내가 진동을 한 건지 이제야 알겠다. 산은 4층 복도에서 저마다 피를 닦고 있는 직원들을 천천히 훑어보다 삐걱이는 고개를 돌려 문 앞에 불안하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리베라를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뒤늦게 그런 산을 발견한 리베라가 캔…! 하고 불렀다가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입을 틀어막았다. 그 사소한 행동에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확실히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한두 명 정도로 끝이 나야 되는데 꽤 여럿이 복도에 쓰러지듯 누워서 끙끙 앓고 있는 것도, 굳게 닫힌 문 너머의 눈치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리베라도.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문 앞에 멈춘 산은 자신의 팔뚝 언저리를 붙잡는 리베라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 보니 리베라의 오른쪽 입술 언저리에도 터진 상처가 있다. 이 회사에서 리베라는 꽤 오래 일해왔기에 이런 상처를 남길 사람이 없었다. 레오나 스콜피오는 물론이고 심지어 민기마저도 리베라의 속을 썩이고 청개구리처럼 굴어도 손을 올리진 않았다. 근데 그런 리베라에게 상처가 있다는 건…. 산이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뭐야. 캣, 무슨 문을 그렇게 벌컥벌컥 열어?”

“…미하일.”

“대답도 안 하네.”

 

 

내가 주인이 아니라서 그런가?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 산은 의외의 얼굴에 멈칫하는 것도 잠시, 등 뒤에 있을 리베라가 떠올라 서둘러 문을 닫았다. 테이블에 앉아 손등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미하일은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았고, 산은 뒤늦게 무릎을 꿇고 앉아 쌕쌕 가쁜 숨을 몰아쉬는 민기를 발견했다.

 

미하일은…, 보스의 오른팔이었다. 말이 좋아 오른팔이지 사실상 나이 먹은 노인네를 이겨먹을 힘이 충분한 사람이다. 회사에서는 저마다 미하일을 두고 조직의 실세라 불렀고, 유일하게 리베라에게 손찌검을 할 수 있으며 민기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캔서라고 부르는 산을 유일하게 캣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문 앞에 서서 머뭇거리던 산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눈높이가 확연히 다른 둘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미하일의 시선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산은 먼저 미하일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터진 입술이나 빨갛게 부어오른 광대, 손자국이 남은 목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온다.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해 머뭇거리던 산은 먼저 찢어진 이마에 손수건을 꾹 눌렀다. 하늘색의 손수건은 금세 피에 젖어 진한 남색으로 물들었고, 산의 손등 위로 민기의 커다란 손이 덮어졌다.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네.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 어딘가 묘하게 붕 뜬 말투였지만 산은 이상하게 본인을 비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 안이 터진 듯 혀로 볼 안쪽을 꾹꾹 누르던 민기가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내뱉었고, 미하일이 다리를 뻗어 민기의 허벅지 위에 꼰 다리를 올렸다.

 

 

“캣.”

“…….”

“캣?”

“저 이제 캣 아니에요.”

 

 

라인 잘 타고 잘 붙어. 새턴이 당장 동아줄인 줄 알고 붙잡은 것 같은데, 뭐…. 그 때는 네가 어렸으니까. 근데 잘 알아둬, 캣. 새턴은 어디까지나 썩은 동아줄이야. 리베라나 너나 전부 생일 따서 만든 이름인데 왜 새턴이랑 나만 다른 줄 알아? 왜 송민기가 새턴이고 내가 미하일인지, 궁금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뮤지컬 속 대사를 읊는 것처럼 쭉 말을 이어가던 미하일이 피를 닦아낸 천을 바닥으로 툭 던졌다. 팔랑이던 천은 피에 젖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곧장 추락했고, 잠시 시선을 뺏겼던 산이 민기의 이마에 대고 있던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다시 꾹 눌러 지혈했다. 궁금한 적이야 있었다. 리베라, 레오, 스콜피오, 캔서. 산이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전부 그 생일을 따서 지은 이름들이었는데 민기 혼자만 새턴이었으니까. 언젠가 나란히 야경을 보다가 새턴의 이름을 물어본 적은 있다. 토성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냐고. 그 때 민기의 반응이 어땠더라. 산은 대답 없이 머리를 쓰다듬는 민기만 떠올랐다. 그 침묵이 부정이라는 것을 아는 산은 더는 묻지 않았다. 민기가 맞다면 맞고 아니라면 아닌 거였으니까.

 

새턴과 미하일, 산은 그 둘의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새턴이 뭐고 미하일은 뭔데. 단순히 산이 고등학교 중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애초에 미하일은 궁금하지 않았으나 그 이름이 새턴과 엮인다면 얘기는 다르다. 산과 시선이 맞닿은 미하일이 슬쩍 입꼬리를 당겨 푸스스 웃었다.

 

 

“미카엘을 그리스어로 미하일이라고 해.”

 

 

그리스어는 아니지만 새턴은 사탄. 얘는 처음 보스가 주워서 들어올 때부터 보스 목에 칼 겨눌 날만 기다리고 있거든, 주제도 모르고. 보스는 리베라나 스콜피오를 악마라고 불러. 새턴이 그 둘을 유혹해서 자기 밑으로 데리고 갔다고. 그래서 보스는 나밖에 안 믿어. 새턴 뒤에 숨어서 손톱을 숨기고 있는 놈들을 어떻게 믿겠어. 아, 캣. 그거 알아?

 

 

“미카엘이 사탄을 짓밟고 지옥으로 내몰아.”

“…….”

“그리고 이 바닥에서 지옥은 그냥 죽는다는 의미고.”

 

 

계속 옅은 웃음을 띄우고 있던 미하일의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구두 위로 튄 피는 민기의 허벅지에 닦아졌고, 느릿하게 일어난 미하일이 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뒤 사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고 앉은 산은 피가 멎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손수건을 떼고 상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는 민기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난 산이 파르르 떨리는 손에 주먹을 꾹 쥐었고, 뒤늦게 사무실 안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새턴, 괜찮으십니까? 낮은 음성들이 줄을 지어 민기의 상태를 살피고 사무실을 치우기 시작한다. 문을 한 번 걷어차고 들어온 리베라가 뒤에서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눈을 뜬 민기가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섰다. 다시금 바닥 위로 퉤, 뱉어진 침이 피가 섞여 빨갛다. 산이 머뭇거리는 사이 민기가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을 집었는데, 누군가 말릴 새도 없이 그 컵이 날아가 사무실 바닥에 부딪혔다. 높은 파열음에 귀가 쨍하게 울린다. 순식간에 차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눈치 챈 리베라가 직원들을 내보내기 시작했고, 늑대가 우는 듯 악을 지르던 민기가 커피 테이블을 엎었다. 우르르 들어왔던 직원들이 다시 우르르 빠져나가고, 문을 닫기 직전 바라보던 리베라는 나갈 생각이 없는 듯 단호한 산의 얼굴을 본 후에야 문을 닫았다.

 

민기의 거친 비명이 유리가 깨지는 파열음보다 크게 울렸다. 여전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로 민기를 올려다보던 산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사무실 안을 휘젓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뒤늦게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커피 테이블이 뒤집히며 깨진 유리조각에 손이 베여 피가 뚝뚝 떨어진다. 거친 숨소리가 조용한 사무실 안을 울렸다. 이마를 짚은 민기의 등이 크게 들썩이며 그 기분을 표현하고 있었고, 천천히 다가간 산이 민기의 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민기의 와이셔츠에 산의 피가 번진다.

 

 

“나한테는 새턴 아니고 아저씨라고 했잖아요.”

“…….”

“아저씨는 미하일이랑 싸울 일 없을 거고, 죽을 일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집에 가요. 넓은 등에 이마를 기댄 산이 고개를 부비적거리며 민기를 재촉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상처가 이제야 얼얼하게 아파와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 말도 없이 거친 숨만 몰아쉬던 민기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고, 이내 산의 손등을 부드러이 감쌌다. 자연스럽게 얽혀든 손가락은 새턴이 아닌 송민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남들에게서 캣 소리 듣는 것이 싫어 성인이 되자마자 캔서라는 이름을 사용한 거지만, 산은 이럴 때면 꼭 고양이처럼 굴었다. 송민기가 기분이 안 좋을 때, 송민기의 기분이 좋을 때, 송민기가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고 폭주할 때.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천천히 살펴보던 민기가 산을 끌어 소파에 앉혔다. 당장 바닥에 깨진 테이블 유리가 판을 쳤지만 민기는 개의치 않았고, 포켓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을 꾹 눌렀다. 주먹 쥐고 있어. 산은 민기가 시키는 대로 주먹을 꾹 쥐어 손수건으로 상처를 압박했다. 구둣발에 밟힌 유리가 까드득, 으스러지는 비명을 지른다. 민기는 사무실에 어울리지 않는 구급상자를 꺼내와 산의 옆에 앉았는데, 그 구급상자마저도 산이 며칠 전에 들고 온 것이었다. 산이 상처를 눌러 지혈하는 사이에 구급상자를 열어 소독약과 거즈를 꺼내던 민기가 별안간 우뚝 멈춘다.

 

 

“안 했으면 좋겠어?”

“아뇨.”

“그럼?”

“죽지 말아요.”

 

 

산이 다치지 않은 손을 뻗어 민기의 손에 쥐어진 소독약을 뺏어들었다. 한 손으로 용케 소독약의 포장을 뜯고는 민기의 찢어진 이마를 소독하니 그 쓰라림에 민기가 인상을 찌푸린다. 산은 익숙하게 상처 위를 소독하고 구급상자 안에서 커다란 반창고를 꺼냈다. 손수건을 쥐고 있는 손이 불편해 입술로 물어 포장을 뜯고 그 위에 붙인 후에야 민기가 산의 손을 잡아 멈춘다. 산은 괜스레 민기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민기의 일을 막아본 적이 없었다. 민기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부수고 사람을 때려도 산의 등장과 함께 멈추기만 했을 뿐, 산이 말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산은 이번에도 민기에게 하지 말라는 말 대신 죽지 말라 전했다. 뭐가 됐든 민기가 계획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보스의 목을 노리는 일이고, 그로 인해 미하일과 싸우게 되어도 죽지만 않으면 된다고. 산은 손등 위를 설설 쓸어내리는 손길에 그제야 시선을 마주했다.

 

 

“날 믿어.”

 

 

미하일이 했던 말들이 자꾸만 산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하일은 조직 내에서도 지분이 컸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커서. 그럼에도 산은 민기의 말을 믿기로 한다. 얼굴 가득 상처를 달고 있으면서도 덤덤히 믿으라고 하는 저 얼굴이 정말로 믿음직스러워서, 무슨 일이 있어도 산을 혼자 두고 죽을 것 같진 않아서.

 

캔서는 새턴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모든 이에게 악마의 왕이라는 칭호로 불리지만 정작 따르는 이가 없으며, 종말에는 신의 아들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맞이하는 사탄. 아무리 본인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폭력을 휘둘러도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많은 새턴은,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아직 시기가 이를 뿐이지 새턴은 미하일을 이길 힘이 있다. 그러니 새턴은 죽지 않을 것이다.

 

산은 대답 대신 민기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송민기는 최산을 두고 죽지 않기로, 암묵적인 거래가 오고간다.

© 2019 by ateez_collabo. Proudly created with Wix.com

  • Twitter - Black Circl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