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재혼 요소가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해서 봐주세요.
우영은 불행의 끝판왕이었다. 우영의 삶은 매우 조악했다. 어릴 적 제 혈육이었던 형은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자신은 살아남았고 손목이 아작났다. 그 일을 기점으로 우영은 미술을 그만 두었고 부모의 싸움이 잦아졌다. 싸움이라기보단 남성이 우영의 친모에게 손찌검을 밥 먹듯이 했다. 엄마 괜찮아? 하고 묻는 우영의 물음에도 친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우영은 영리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영의 친모는 그 미소를 짓고 정확히 3년 뒤에 친모도 제 형과 비슷한 방법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제 친모 얘기가 뉴스에 오르락내리락거렸고 우영은 그것들을 무시하며 제 친모의 장례식으로 향하는 계단을 이용했다. 남성은 해외에 있다가 그 다음날에 장례식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렇게 우영은 제 마음의 문을 닫았고 사랑 받는 법을 까먹었다. 그 영리한 머리로 공부만 주구장창 했다. 그렇게라도 남성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관심은 무슨, 우영에게 떨어지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제 친부는 어떤 여성과 만남을 시작했다. 아니, 제 친모가 죽기 전부터 만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영은 그것을 모른 채했다.
"아버지, 엄마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조용히 하고 밥 먹자."
우영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밥을 꾸역꾸역 삼켜 씹었다. 삼켰던 것들이 역류하려고 해도 꾹꾹 눌러야했다. 지금 밉보여봤자 좋을 건 없었다. 남성의 결혼 준비가 한창이었으니 말이다. 남성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도우미 아줌마가 매번 우영을 깨웠고 우영은 혼자 아침밥을 먹었다. 기사 아저씨의 차를 타고 학교에 등교했으며 하교했다. 홀로인 날이 늘어났고 그게 몇 주간 지속되더니 결혼이 바로 코앞이었다. 남성은 매우 신나보였다. 아버지 행복해요? 우영의 비꼬는 질문에도 남성은 싱글벙글 이었다. 우영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거실에 액자 칸에 있던 제 친모 사진은 제 방에 들어 간지도 오래였다. 우영은 거실에서 읽던 책을 덮었다.
둘은 결혼식을 치루지 않았다. 그냥 어느 날부터 어떤 여성이 제 집에 들어와 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이 아줌마 누구에요? 라고 했다고 회초리를 맞기도 했다. 네 새엄마 되실 분한테 말버릇이 왜 그래. 우영은 눈을 꾹 감고 참아냈다. 그리고 우영은 여성과 같이 밥을 먹었다. 그녀를 어머님이라 불러야했고 위해줘야 했다. 우영은 그것이 싫었다.
몇 달 뒤, 차디찬 겨울엔 또 이상한 것이 딸려 들어왔다.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였다. 체구는 저보다 작았으며 머리는 짧디 짧은 바가지 머리였다. 저 애가 제 나이 또래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 아이는 제 몸 크기만 한 캐리어를 이끌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홍조가 핀 볼이 예뻤다. 여우같이 생겼네, 지 엄마랑 똑같아. 우영은 아이를 쳐다보고 단박에 여성과 판박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감흥 없는 눈빛으로 계단 앞에 서있었다. 아이는 우영을 보더니 쪼르르 달려와 우영의 앞에 섰다. 우영은 당황한 건지 귀를 붉혔다. 아이는 눈을 곱게 접었다. 조악한 우영의 삶에 조악한 것이 또 더해졌다.
"안녕 나는 최산이라고 해, 잘 부탁해!"
산은 우영에게 힘차게 손을 내밀었다. 우영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산을 훑어봤다. 남성의 시선에 마지못해 산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어, 정우영이야. 응응 알아! 엄마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건조한 말투에도 산은 눈을 곱게 접어 웃고 대답을 했다. 짐도 많이 없었던 건지 캐리어 하나만 끌고 등장한 산은 집이 신기한지 요리조리 둘러봤다. 꼭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시골쥐 같았다. 목도리도 두꺼운 걸 둘러서 그런가 그런 이미지가 더더욱 겹쳐보였다. 옷은 명품 브랜드의 것이었는데 목도리만 그냥 길 가다 파는 노점상의 것 같았다. 손에는 곰 인형이 들려있었다. 털도 복슬복슬하고 중간 사이즈의 인형 말이다. 우영은 그런 산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감사합니다아-."
"많이 먹어라."
"네!"
시골쥐, 아니 산은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자세는 허릴 굽혔고 손놀림은 며칠 밥을 굶은 이처럼 행동했다. 우영은 그것을 아니꼽게 바라봤다. 평생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밥을 먹었던 터라 산을 보면 눈살을 찌푸렸다. 남성은 허허 웃으면서 산의 앞에 반찬을 더 가져다뒀다. 감사함니당-. 밥을 씹으면서도 입을 손으로 가리고서 감사인사를 전했다. 여성은 도우미에게 반찬을 더 내올 것을 시켰다. 어째 이 집의 진짜 아들이 산인 것 같은 느낌으로 돌아갔다. 우영은 그런 느낌을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밥을 집어넣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산이 방은 우영이 방 바로 맞은편이다, 우영이 네가 도와줘."
"네."
"그래 올라가봐, 아저씨가 꾸미긴 꾸몄는데 산이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완전 좋을 거 같아요! 산은 몸짓으로 오바를 떨었다.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그 짓이 우습기도 했고 귀엽기도 해서였다. 무용한다고 그랬나, 표정 진짜 많네. 우영은 산의 짐을 올려다주면서 생각했다. 여기가 네 방이고, 저 끝이 창고야. 화장실은 창고 옆에 있어. 산은 조심스럽게 2층 바닥을 밟았다. 우영은 한숨을 쉬면서 제 방 앞에 섰다. 그리고 바로 앞방을 삿대질로 가리켰다. 여기가 우리 형, 아니 네 방이야. 산은 제 방 앞에 섰다. 문을 열어보니 정말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뭔가 우영의 방보다 살짝 더 넓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우영은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산은 제 캐리어를 제 방에 밀었다. 우영은 그런 한심한 뒷모습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너 내 방에 들어오지 마."
"⋯."
"알겠어?"
우영의 말에 뒤 돌은 산은 무표정으로 우영을 대했다. 우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애새끼 정우영은 다시 물었다. 알겠냐고. 우영의 말에 조소를 짓는 산이었다. 산의 태도에 우영은 당황했고 산은 계속 무표정으로 우영을 바라보다가 목도리를 풀고 입을 열었다.
"싫으면?"
뭐? 우영의 당황한 음성에도 산은 그것을 무시하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우영은 벙쪄서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었다. 지금 쟤가 나한테 싫다고 한 거 맞지? 우영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씨발놈이라고 욕을 박아주고 싶었지만 첫 만남을 망치고 싶진 않기에 제 방문을 쿵 소리가 나게 세게 닫았다.. 그게 산과 우영의 첫 만남이었다.
조악한 형제
블엥
시간이 흐르고 산은 10센티나 훌쩍 자라버렸다. 그래서 그런 건지 더디게 크고 있던 우영의 키를 따라잡고 넘어버렸다. -그래봤자 고작 1센티 차이다- 산은 속으로만 우쭐댔다. 우영은 산과 같이 산다는 것을 싫어했다. 우영과 산은 아침을 다 먹으면 같은 차를 타고 등교를 했다. 우영은 산에게 대화 한 번 걸지 않았다. 뭘 보는 건지 계속 제 휴대폰만 바라보고 산을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산은 그것에 컴플레인을 걸지도 않았고 건 적도 없었다. 둘은 소수들만 다니는 사립학교에 다녔다.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붙어있었다. 이곳은 부잣집들이거나 머리가 월등하게 뛰어나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는 애들이 전부였다. 산은 전학 왔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성격이라 친구들과 어울렸고 우영은 홀로 다녔다. 급식실에서 혼자 밥을 먹는 우영을 본 산은 우영에게 가려 했으나 애들의 만류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점심시간에 매점을 가던 도중 친구들은 산에게 물었다.
“산아, 너 우영이랑 친해?”
“아니 친한 건 아니구, 근데 왜 쟤랑 안다녀?”
친구들은 머뭇거리며 조잘조잘 우영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중학교 때부터 미친놈으로 유명했다고, 같이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쟤랑 싸우더니 어느 날에 죽었다. 이런 얘기들을 늘어놓는 친구들을 심각하게 쳐다보는 산이었다. 진짜? 그렇게 미친놈이라고? 친구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야겠네! 하고 산은 바나나 우유를 집었다. 친구들은 산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아까 식겁했다면서 깔깔대며 웃었다. 산도 정보 고맙다면서 매점은 자신이 쏘겠다고 했다. 다들 먹을 것을 고르는 동안 산은 만족한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
우영은 남성의 친자식이면서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산과 남성이 매우 닮았다. 날카로운 눈이며, 뾰족한 턱이며. 산이 남성의 친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우영은 그것조차 아니꼬았다. 산과 산을 닮은 어른 둘과 같이 사는 것은 우영에게 짜증나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싫은 얼굴상이 셋이나 있다니, 그리고 그 셋만 하하호호 떠들다니. 우영은 밥을 먹다말고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았다.
"먼저 올라가볼게요."
우영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른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얘기를 했고 산은 턱을 괴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우영을 응시했다. 또 입 안 여린 살을 깨무는 우영을 보고 헛웃음을 짓는 산은 우영이 제일 좋아하는 반찬을 한 움큼 집어먹었다. 그러곤 다시 어른들과 하하호호 떠들었다.
둘의 방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산은 방문을 조금 닫았고 우영은 굳게 닫고 살았다. 저녁식사가 끝났던 건지 산은 우영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우영은 대답을 하지 않고 펜만 움직였다. 우영의 답은 없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산은 우영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기 좋았다. 그러곤 우영의 방을 훑어봤다. 그러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했다.
"너는 내가 싫어?"
"⋯응."
"왜?"
그걸 설명해야 알아? 우영의 대답에 산은 아랫입술을 조금 내밀더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말해주면 안돼? 산의 질문에 우영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싸가지, 싸가지가 없어. 몇 분을 생각해낸 것이 고작 ‘싸가지가 없다‘라니 산은 웃음을 터트렸다. 산은 우영의 공간에 침범했다. 우영의 옆에 놓인 액자를 매만졌다.
"너희 어머님이야?"
"들어오지 말랬잖아."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을 만지자 그제야 경계를 하는 우영이었다. 산은 알겠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고 벽에 걸려있는 큰 캔버스를 쳐다봤다. 이건 네가 그린 거지? 산이 그것을 가리켰다. 우영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어떻게 알았냐고 했다. 물감 덧칠한 것이 투박한게 딱 너잖아. 산은 우영의 그림 앞에 섰다. 지금 우영의 방의 창문으로 내다본 야경이었다. 아름다웠다. 우영의 것에서 조악하지 않은 것은 이 그림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 그린 거야? 우영은 펜을 내려놓고 제 그림을 쳐다봤다.
"중학교 올라가기 직전에, 형 죽기 전에."
우영의 말에 산은 그림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우영은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엄마랑 형이랑 여기 야경 제일 좋아했어. 산은 고갤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치곤 야경이 예뻤다. 별도 군데군데 보였고 건물들도 조화를 이뤘다. 좋아할만 하네. 산은 침대에 걸터앉아 중얼거렸다. 우영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우영은 다시 펜을 잡고 문제를 풀어나갔다. 산은 한참동안 우영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일어서서 방문을 열었다. 나가기 전에 다시 뒤를 돌아 우영의 뒷통수를 쳐다봤다.
"나 싫어하지 마, 싫어해봤자 좋을 일도 없어."
"미친놈."
우영의 추임새에 산은 피식 웃었다. 그러곤 우영의 방문을 다시 굳게 닫아주었다. 우영은 펜을 다시 내려놨다. 그러곤 책상에 엎드렸다.
*
우영과 산의 관계는 호전되는 듯싶었다. 여전히 싸가지 없었지만 말이다. 산이 매번 우영의 방에 들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거의 제 자신들에 대한 얘기였다. 여기 오기 전엔 뭐 어디서 살았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등 산이 얘기하면 우영도 조금씩 얘기했다. 그 조금씩이 쌓이고 쌓여서 서로를 다 아는 경지에 오른 둘이었다. 하지만 우영은 계속 산을 미워했다. 기분이 상하면 산을 제 방에서 밀어내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산은 그런 우영을 잘 컨트롤했다. 그렇게 관계는 유지되었다.
“너 우리 집에서 산다는 거 말했어?”
“아니.”
“말하지 마.”
왜? 산이 묻자 우영은 그냥이랬다. 뭐가 그냥인지 알려달라는 산에 얼굴을 붉히며 우영은 입을 열었다. 네가 애들한테 안 좋은 소리 들을까봐. 우영의 대답에 산의 얼굴에는 활기가 돌았다. 진심이야? 정말? 산의 질문에 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에게 이런 면이 있는지 산은 피식피식 웃었다. 약속하자, 말하지 말기. 산과 우영은 5살 아이처럼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지속되는 듯 했다.
*
아침부터 교실이 산만했다. 교실에 있던 애들의 눈들이 다 산에게 향했고 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산아 그거 들었어? 정우영 소문! 산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친구들이 달려들었다. 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알려줄까?"
"아니, 알아서 뭐해."
산은 어깨를 으쓱이고 자리에 앉았다. 왜인지 애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은 다시 흩어지고 반 앞에서 모였다. 산은 듣지 않고 싶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산은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다. 잔잔하게 들리는 무용곡을 들었다. 하지만 그 사이로 애들의 목소리가 들어오니 산은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우영에 대한 소문도 다 제가 아는 사실이었다.
미안 미안, 많이 기다렸지! 산은 무용 가방을 들고 나와 연우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연우는 아니라면서 웃었다. 둘은 같은 무용단에 소속되어있었다. 매번 파트너도 연우였으니 같이 연습실로 가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산과 연우는 깔깔대며 복도를 걸었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산은 무시했지만 연우가 산의 어깨를 툭툭 치고 뒤를 보라했다. 저기 좀 봐, 쟤 정우영 아니야? 다른 건물을 쓰는 우영이 있었다. 우영의 표정은 화나있었다. 산은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연우를 먼저 보냈다. 연우는 빨리 오라면서 복도를 나갔고 산은 맑은 표정으로 우영을 대했다. 우영아 여긴 어쩐 일이야? 하고 묻자 우영은 다짜고짜 산의 어깨를 쳤다.
"너야? 소문낸 거."
"⋯미쳤니, 내가 그럴 애로 보여?"
"내가 널 믿는 게 아니었는데."
산은 헛웃음을 쳤다. 날 못 믿어? 우영은 말없이 서있다 악에 바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가 그 여자랑 우리집 왔을 때부터 좆같았어! 우영의 말에 애들이 다 웅성거렸다. 헐, 뭐야 최산이랑 정우영 같이 살아? 대박⋯. 애들의 웅성거림에 산은 헛웃음 쳤다. 우영이 발설한 것은 비밀이었다. 꼭 지키자고 약속까지 한 사항이었는데, 우영이 그것을 어겼다. 산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마른세수를 했다. 화가 났다는 것이었다. 아 맞다 우영아, 나 할 말 있는데. 산은 우영에게 밀착하려는 듯이 우영의 앞에 다가섰다. 둘의 눈높이는 비슷했고 산은 눈깔을 부릅 떴다. 우영도 거기에 질 수 없다는 듯이 무표정으로 산을 대했다. 너네 엄마랑 형 죽은 거, 이상하지 않아? 산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우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우영은 그것에 관한 얘기를 싫어했다. 그게 과연 자살, 사고였을까? 산은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우영을 비웃는 것이었다. 우영은 눈이 회까닥 돌았다. 닥쳐라. 우영은 낮은 목소리로 산에게 말했다. 복도에서 이게 무슨 짓인지 싶었지만 둘은 분노에 차있었다. 산은 그거에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난 구라 안쳐, 그냥 니가 존나 불쌍해서 해주는 말이야. 산의 말에 우영은 정신을 놨다. 산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우영은 산이 이러는 모습을 처음 봤다. 말투는 싸가지 없었고, 행동도 뭣같았다. 이게 최산의 본성이었다.
"씨발, 야 안 다물어?"
"⋯우영아, 애들 다 본다."
우영은 산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손아귀에 힘이 얼마나 센 건지 산의 조끼가 잡힌 모양대로 다 늘어날 것 같았다.아이들이 웅성웅성 거렸다. 몇몇의 아이들은 선생님을 부르려 했고 몇몇 아이들은 계속 그 광경을 쳐다봤다. 가슴이 살짝 들린 산은 우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가, 네가 이래서 안되는 거야 우영아. 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우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우영은 눈깔이 또 돌아버릴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듯한 눈깔을 치켜뜨고서 산을 쳐다봤지만 산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우영을 비웃었다. 거기 뭐야! 학년부장의 목소리에도 우영은 계속해서 산을 노려봤다. 웅성거림이 더 커졌을 때가 되어서야 굳게 잡았던 멱살을 풀었다. 산이 우영의 어깨를 툭 치고서 제 길을 갔다. 툭 쳤다기보다 밀쳤다는 것이 더 가까운 표현이었다. 우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산의 동그란 뒷통수를 노려봤다. 산은 뒤돌아 우영을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그것에 버튼이 눌렸는지 우영은 산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
"산이 공연이 언제라고 했더라."
"다음주 수요일 7시에요. 그래서 말인데⋯, 공연 와주실 수 있으세요?"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산은 배시시 웃었다. 어느새 산의 눈가엔 반창고가 붙여져있었다. 티켓 드릴까요? 산의 말에 남성은 또 고개를 끄덕였고 산은 제 가방에서 티켓 세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아버지랑 어머니, 그리고 우영이랑 같이 와주세요. 그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우영은 눈을 치켜뜨고 산을 쳐다보았다. 산은 제가 아닌 남성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우영이 그 날 시간 비워둬라. 남성의 말에 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 아니꼬았다. 저거 지금 다 가식인 거잖아. 우영은 속으로 욕을 해댔다. 우영과 산은 그 날 이후로 말도 잘 안했다. 집에서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둘 다 서로를 무시했다. 산은 꼭 와달라고 우영을 보며 말했다. 우영이 너도 올 거지? 산의 질문에 우영은 께름칙하지만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이후로 처음 눈을 마주치고 처음 대화하는 거였다. 우영의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너 연기 잘하더라."
"무용하잖아."
산의 대답에 우영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 일이 있고서 둘은 선생님께 경고도 받고 사이가 안좋아졌다. 원래 좋지도 않았던 관계지만,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은 회복 불가능한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우영은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존나 싸가지 없어. 우영은 제 방문을 세게 닫았다. 산은 닫힌 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바로 불이 꺼졌다. 우영의 방 불이 꺼지고, 집안의 모든 불이 꺼지는 것을 본 산은 자신의 방 불도 껐다. 문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
산이 무용을 했다. 그것도 무용단에서 제일 간다고 그랬다. 우영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무용계에서도 유망주로 불리고 있었고 산이 속해있는 무용단의 티켓 값은 하늘을 치솟았다. 그리고 그만큼의 값어치를 해냈다. 산은 무용 중에서도 현대무용을 했다. 춤선이 딱 현대무용과 맞는 몸이었다. 산이 무대에 등장하면 분위기부터 달라졌다. 산이 등장했을 땐 분위기는 조용히 가라앉았으며 동작 하나하나 할 때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영은 그것을 매우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표정은 시큰둥했지만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홀로 외롭게 흰 천을 휘날리며 무용을 하는 모습은 뭐랄까, 마치 한 마리의 백조같았다. 정말 한 마리의 백조처럼 날았다. 그냥 그 장면 자체가 아름다웠고 세련됐다. 우영은 그 장면들을 제 눈 안에 담고 있었다.
"산이 멋지던데?"
"감사해요!"
남성은 산에게 꽃다발을 건네줬다. 산은 짙은 화장을 하고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우영도 마지못해 들고 있던 꽃 한 송이를 산에게 건넸다. 누가 봐도 남성이 시킨 것 같았다. 산은 놀란 표정으로 우영이 준 꽃을 받았다. 고마워 우영아. 우영은 산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산의 공연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무용계에선 극찬을 받았고 특히 연우와 산은 더 주목받았다. 산은 꽤나 만족했다. 연우와도 기념사진을 찍겠다며 사라지자 우영은 차로 가고 싶다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걷다가 고갤 돌려 연우와 산이 같이 있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서로 안는 장면까지 보고서야 우영은 다시 차로 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기분이 뭔가 묘했다. 짜증나면서, 싫었다.
*
산이 공연을 끝내고서 바로 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이건 혼자 하는 거라며 우쭐해대던 모습도 벌써 한 달 전이었다. 벌써 입김이 나오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영은 산을 제대로 본 적이 꽤 됐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산을 만났다. 그렇게 산이 우영의 방에 들어오지 않은지도 어연 2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영은 허전하면서도 후련했다. 원래도 싸가지 없었다며 웅얼거리는 우영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일어났다. 닫혀있는 문을 몇 분 바라보다 다시 잠드는 게 일상이 될 즈음이었다.
산은 평일엔 매번 학교 연습실에서 연우와 함께 연습을 했다. 연우가 가도 계속 남아서 연습을 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게 밤이 되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 날은 유독 반에 무언가를 놓고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을 무시하게 만든 건 무서움이었다. 어둠이 내린 학교는 공포 그 자체였다. 휴대폰 알림이 울려도 화들짝 놀라는데 어떻게 그 어둠을 뚫고 교실에 가겠는가. 산은 빠르게 연습실 문을 잠갔다. 종종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집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산은 그제서야 문자를 확인했다. 표정이 삽시간으로 굳었고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표정은 정말 좋지 않아보였다. 휴대폰에만 집중한 건지 발목을 살짝 삐끗했다. 넘어질 뻔 했으나 난간을 잡고 올라가는 산의 모습을 위태로웠다. 산은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계단의 끝엔 우영이 서있었다. 몇 달 만에 보는 우영의 모습이었으나 산은 피곤하다는 듯이 우영은 지나치려했다. 우영은 자신의 지나치려는 산의 손목을 잡아챘다. 야, 할 말 있어. 우영의 말에 산은 듣기는 하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우영을 대했다. 그 때 한 말 다 맞아? 우영의 질문이었다. 산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헛웃음 쳤다. 입김이 사라지자 산은 연습 때문에 떡진 제 앞머리를 매만졌다.
"넌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다 아는데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뭔 소리야."
산은 질문을 하며 우영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우영은 뒷걸음질 치며 진심을 담아 산의 말에 반문했다. 산은 정말 답답한 건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전자구나, 너 진짜 눈치가 없구나. 산의 말에 우영은 헛웃음을 쳤다. 무슨 소리냐니까? 우영의 물음에도 산은 한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우영아, 우리 엄마랑 니네 아빠는 잔인한 사람이야."
"⋯."
"내가 했던 말들, 다 떠올려봐."
다들 죽었을 때, 그 둘이 우리 곁에 있었어? 산의 말에 우영은 눈을 내리 깔았다. 그랬던 적이 없다. 산의 말이 다 맞았다. 제 형이 죽을 때는 남성은 어느 지방에 내려가 있었고, 친모가 죽을 때도 남성은 해외에 있었다. 산은 우영의 반응을 보자 우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죽기 싫잖아, 그냥 가자 춥다. 산은 우영을 흔들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울 아버지랑 니네 엄마가 다 죽였다는 소리야? 우영의 질문에 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누굴까, 응? 우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산의 팔을 세게 쳐냈다. 어느새 우영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뒷걸음질하며 제 머리를 세게 쳤다. 그럴 리가 없어! 우영은 발악했다. 당황한 산은 우영의 손을 잡아끌면서 우영의 행동을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영은 계속 몸부림쳤다.
"⋯아니야, 아니라고!"
"야 정우영!"
"헛소리야 씨발."
우영은 눈을 부릅떴다.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우영은 저에게 붙어있던 산은 세게 쳐냈다. 우영의 태도에 당황한 산은 뒷걸음질 쳤다. 바로 뒤엔 계단이 산을 반겼다. 우영의 눈에 산과 남성이 겹쳐 산이 남성으로 보였다. 우영아-. 라고 자상하게 부르는 남성이 우영의 앞에 서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우영은 남성이, 제 아버지가 저질렀다고 추정되는 짓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악몽이었다. 자신의 형부터 어머니까지 다 남성이 죽였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죽어가는 형의 눈동자가 아직도 생생한데, 죽어있는 제 어미의 형상이 아직도 뚜렷한데. 우영은 발악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우영은 남성을 계단 밑으로 세게 밀쳐버렸다. 저 계단 끝으로 말이다. 허나 그것은 남성이 아니었다. 밀치고 난 후에 자신이 밀쳐버린 것이 남성이 아닌 산인 것을 알게 된 우영은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금 제 눈에 보이는 산은 저 밑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산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그 두 눈을 마주친 우영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작은 체구가 얕게 날아 추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무대 위에서 날던 백조가 아니었다. 이내 산은 계단을 심하게 굴렀다. 산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떡해, 어떡해. 우영은 발을 동동 굴렀다. 우영의 분노에 의해서 이루어진 찰나였다.
*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와."
"산아 엄마 결혼해."
산은 빨래를 널던 손을 멈췄다. 진한 화장을 하고 나타난 여성은 자신의 친모였다. 그 아저씨 대기업 사장이야, 돈도 많고 네가 좋아하는 무용도 걱정 없이 시켜줄 수 있어. 무용, 산은 무용이라는 한 단어에 홀렸다.
작년에 갑자기 제 아비가 죽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그것은 아무도 몰랐다. 무용학원을 갔다 오니 들은 소식은 제 친부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남성이 하얀 천을 덮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산은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아빠가 왜 여깄어, 아빠 눈 좀 떠봐! 산은 발악했다. 조촐하게 차려진 장례식장에는 찬기가 맴돌았다. 장례식장 안에 있던 티비만 시끄러웠다. 조문객들은 드문드문하게 들어왔고 남성의 여동생, 그니까 산의 고모는 산을 안고 엉엉 울었다. 이렇게 어린 애를 남기고 갔다며 말이다. 끝내 장례식장에는 친모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긴, 몇 달 전부터 둘을 버리고 홀랑 도망 가버렸는데 올 리가 없었다. 그렇게 산은 제 아비를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었다. 무용도 할 수 없었다. 한 6개월 정도 그 찬 집안에서 이불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지내던 나날이 산을 흔들었다.
"진짜 무용시켜줄 거야?"
"당연하지, 엄마 이번엔 산이 고생 안 시킬게."
그 대신 엄마 부탁도 들어주라, 비밀도. 산은 미심쩍은 눈을 하고 평상에 앉아있는 여성의 앞에 앉았다. 부탁이랑 비밀이 뭔데? 여성은 입꼬리를 한쪽만 올려 웃었다. 산은 그때 그 말을 듣지 말았어야했다.
부탁은 대충 이러했다. 아저씨, 아니 이제 아버지가 될 사람에겐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을 죽이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이서 그 남성의 재산을 먹자는 얘기였다. 그 애가 어릴적부터 형도 잃고, 엄마도 잃어서 정신상태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라고 조금만 꼬드기면 될 것 같다는 여성의 말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미술도 관뒀데, 이게 약점. 산은 어떻게 꼬시냐는 듯이 어이없게 웃었다. 어떻게 꼬드기긴, 넌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여성의 말에 이런 것에 무감각했던 산은 그 부탁을 받아들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걔가 누군데? 여성은 맘에 드는 답을 들었다는 듯이 사진을 내밀었다. 정우영, 너랑 동갑이래. 무쌍인데도 눈이 큰 아이를 유심히 쳐다보는 산이었다. 그 아저씨랑 하나도 안 닮았네. 오히려 네가 더 닮았어. 여성의 말에 산은 바로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서 나 언제 데리러 올 건데?"
"한달만 이걸로 살아."
여성은 산에게 돈 봉투를 던졌다. 오만 원짜리가 몇 십장이 들어있었다. 한 달 생활비로 치면 매우 널널한 금액이었다. 산은 봉투를 반으로 접어 제 주머니에 넣었다. 여성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여성은 값비싸 보이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옥탑방을 내려갔다. 산은 여성이 내려가는 방향으로 침을 퉤하고 뱉었다. 생각해보니 비밀을 듣지 못했다. 산은 여성이 내려간 계단을 쳐다봤다. 다음에 물어봐야지. 산은 추웠던 건지 제 팔을 비비면서 집 문을 열었다. 문짝에서 나는 기괴한 소리를 한 달이나 더 들어야한다니, 산은 귀를 살짝 매만졌다.
*
한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던 여성은 정확이 4달하고도 5일이 지나서야 산을 찾았다. 내일 다시 올게, 짐 챙겨놔. 내일 이거 입고. 라는 말과 고급 브랜드의 옷을 넘겨주고 사라지는 여성에 산은 또 욕을 했다. 무용 때문에 간다 내가! 산은 그 시간부터 짐을 쌌다. 짐을 싸기 전 방 안에 앉아 우영이라는 아이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잘생겼네. 그게 딱 우영의 첫인상이었다. 앳되어 보이는 중학교 증사는 귀여웠다. 그러곤 우영의 증사를 찢어버렸다. 괜히 챙겼다가 오해받으면 골치만 아파지는 일이었다. 지금 산은 돈과 무용에 눈이 멀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서서 제 짐을 챙기러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에 캐리어를 꺼냈다. 쌓인 먼지를 후후 불어 털다가 먼지가 날리자 소리 내어 기침을 해댔다. 옷도 챙기고 생필품을 챙겼다. 그렇게 넣고 넣었는데도 캐리어가 텅텅 비었다. 캐리어가 큰 건가? 싶다가도 제일 작은 사이즈였기에 산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제일 마지막으로는 곰 인형을 챙겼다. 이 인형이 없으면 산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비어있는 곳에 솜을 넣으려 곰 인형을 주물럭거렸다. 어릴 땐 이걸 갖고 놀았는데, 벌써 그게 몇 년 전 얘기였다. 산은 피식 웃으면서 계속 주물렀다. 그러자 이상한 것이 느껴졌고 산은 이상하다는 듯 곰 인형에 옷 부분과 몸체가 이어지는 실이 살짝 뜯어져있는 것을 봤다. 안에 무언가가 있는 듯 해서 손가락을 넣어 꺼냈다. 편지 같아 보였다. 산은 곰 인형을 내려놓고 종이를 펼쳤다. 그리운 제 아버지의 글씨체였다. 아마 죽기 전 마지막 편지였을 것이고 산은 그것을 읽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곤 제 머리를 감싸며 울었다. 편지가 아닌 유서였다.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 적혀있는 유서 말이다.
*
산이 그 으리으리한 집에 가는 날은 엄청나게 추웠다. 여성은 보여주기 식인건지 산에게 명품 목도리를 건넸다. 남성이 자신의 집안이 잘 산 줄 안다며 말이다. 하지만 산은 그 목도리가 아닌 제 친부가 선물해줬던 목도리를 감았다. 여성은 주변인들을 신경 쓰며 산에게 작게 소리쳤지만 산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제 품에 곰 인형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 꼬질꼬질한 곰 인형에 여성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곰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집은 좀 높은 쪽에 위치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던 그 부잣집 스타일이었다. 산은 가뿐하지만 무거운 발걸음으로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받았다. 그러곤 집을 올려다봐야했다. 이제 여기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산을 기쁘게 했다. 이젠 무용도 할 수 있었고, 배고픔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여성은 산을 챙기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 산은 그런 여성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어떻게 보면 같이 일하게 된 사이면서 저렇게 매정할 수가 있는가. 산은 캐리어를 끌고 문을 열었다. 산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
우영은 산을 경계했다. 첫날부터 악수를 해도 표정이 좋지 않았고 저를 대하는 태도가 삐딱했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저를 대할 때 삐딱함에도 붉어지는 볼과 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황상 우영은 산을 좋아했다. 산은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행동했다. 우영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제 얼굴을 들이댔고 막 손도 잡았다. 그러면 우영은 기분을 풀고 다시 얘기를 조잘조잘해댔다. 산은 그렇게, 이대로만 가면 그 부자 아저씨의 돈을 반절이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산을 기쁘게 했다. 혈육의 죽음은 죽음이었고 자신이 살아야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였다. 그것은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돈으론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냥, 그렇게 우영을 꼬드겨서 자신과 여성의 계획이 성공하기를 원했다. 산은 빨리 이 집의 외동이 되고 싶었다. 허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
어느 날 산은 화가 난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연습도 하지 않고 학교도 조퇴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뭐야? 왜 난 아직 등본에도 없어? 산은 쿵쿵대며 여성에게로 가 따졌다. 여성은 당황한 건지 산이 건넨 등본 종이를 받고서 어눌하게 답했다. 어디서 난거야? 여성이 입을 열자 산은 눈을 부릅떴다. 여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접수가 안됐나보다-, 산아 좀만 더 기다려볼까? 이곳에서 산지가 1년이 넘었는데도 접수가 안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산은 헛웃음을 쳤다.
"엄마, 이러면 나 곤란해."
"뭐가 곤란해-."
여성은 눈을 곱게 접어보였다. 그 모습이 딱 산과 닮았다. 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산은 여성의 손에 들려있던 등본을 낚아챘다. 엄마는 나한테 잘해야 돼, 엄마랑 아저씨가 한 짓 몰라? 산의 말에 이번엔 여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여성의 질문에 산은 여성을 한번 노려보곤 방을 나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쿵쿵대며 계단을 올랐다. 산이 들고 있는 종이에서 산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 방문 맞은편에 굳게 닫힌 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산은 여성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왜 이러는 건지 지금까지 꼬드기려 한 짓이 너무 미안했다. 어느새 산에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떡해, 나도 쟤 좋아하나봐. 산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
산은 악몽을 꾼 듯 소리를 내지르며 잠에서 깼다. 거친 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창문에 보이는 하늘은 어두웠다. 꼭 우영이 그렸던 그림 같은 야경이었다. 야경을 한번 보고 제 다리를 보니 붕대 투성이었다. 산은 자신의 다리를 보고 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소리 내어 울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
"산아 괜찮아?"
"어엉-, 이제 괜찮아."
사고 다음날 다들 산을 찾아 병원에 찾아왔다. 산은 한동안 걷지도 못했다. 손엔 링거액을 다리엔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아예 망가졌다. 뼈는 두동강났고 그로 인해 인대를 다치는 건 당연하게 나타났다. 인대가 아예 파열됐다. 의사도 탄식을 자아냈다. 떨어지면서 다리가 아예 꺾여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 짧고도 길었던 순간이 낳아낸 비극이었다. 그때 다리가 날아가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산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산을 걱정했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산이 속해있는 무용단의 단장도 와서 산의 다리를 매만졌다. 결국 산은 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아마 무용으로 나갈 수 있는 출세의 길도 막혔다고 봐야했다. 산은 애써 괜찮다고 웃어봤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끝내 단장님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어쩔 수 없었다. 다들 산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세상이 이런 거였다. 당연히 무용단의 수석 타이틀은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 산은 단장이 찾아온 그 날, 아예 무용단을 나갔다. 정신적으로도 힘든 것이 많았다. 더 이상 무용을 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기에 희망은 더더욱 없었다. 산은 며칠을 계속 울었다. 식사는 하지 않았으나 자신을 찾아오는 병문안을 온 이들이 주는 것들은 받아먹었다. 그러고 새벽에 먹은 것들을 게워냈다. 산은 고통스러워했다.
"산아 괜찮니."
"네, 조금요."
남성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산을 쳐다봤다. 푸석해진 산의 머릿결이 산의 상황을 알려주는 듯 했다. 몇 마디를 나눈 후 남성과 우영은 그 자리를 피했다. 산이 오늘은 혼자 있기를 바랐다. 그러고 나갔는데, 우영이 가방을 놓고 나온 것을 떠올렸다. 남성에게 짧게 내용을 전하곤 다시 병실로 올라갔다. 병실 문에 있는 작은 유리를 통해 산이 여성을 앞에 두고 제 손에 얼굴을 박고 펑펑 우는 것을 봤다. 산은 병실 안에서 울부짖었다. 우영은 주먹을 꽉 쥐고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우영은 가방 없이 등교했다.
*
산의 다리가 많이 호전되자 산은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바뀌고 재활만 몇개월을 했다. 고등학교도 거의 관뒀다고 해도 뭐라 할 게 아니었다. 거의 평생을 절뚝거리며 살아야했다. 그 일만 아니어도 산은 절뚝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인대도 적당히 파열되어야지, 산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 다리를 매만졌다. 그날부터 저녁 반찬들은 산이 좋아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갈비찜, 생선구이, 달걀찜, 깻잎 짱아찌 등등등 매일 다르게 올라오는 진수성찬에 산은 애써 웃어보였다. 괜찮아 보이려 숟가락을 크게 움직였다. 양볼에 밥을 쑤셔 넣고 억지로 삼켰다. 우욱- 하면서 토를 하기 직전까지 말이다. 산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그런 산의 모습들을 지켜보는 우영의 표정도 좋지는 않았다.
그 이유의 원인은 어제로 돌아간다. 산이 새벽에 부엌 식탁에 앉아 밥을 퍼먹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계단을 내려간 것이었다. 배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 것처럼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물을 마시러 내려오던 우영이 봤다. 산은 갑자기 수저를 내려놓고 몇 초간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우는 산에 우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소매로 제 눈물들을 닦는 꼴을 보자니 우영은 다시 계단 위로 올라갔다. 산은 그렇게 몇 분이고 울었다. 그 정도로 산은 죽고 싶었다. 우영은 그 모습이 지금의 산의 모습과 겹쳐보여서 가슴을 팍팍 치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결국엔 남성에게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듣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먼저 올라가볼게요."
우영은 그런 산 앞에서 밥을 못 먹겠는지 고갤 돌리고 부엌을 벗어났다. 산은 그런 우영에게 시선을 두지도 않았다. 그저 반찬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우영은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다. 오늘따라 유난히 긴 복도를 지나 제 방으로 들어가기 전 살짝 열려있는 산의 방을 응시했다. 우영은 입술을 꾹 깨물며 손을 제 방문 손잡이가 아닌 산의 방문 손잡이로 향했다. 조심스레 들어간 산의 방은 예전과 다르게 어두움과 함께 찬기가 돌았다. 우영은 산의 방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첫날에 봤던 곰 인형이 있었고 제 책상에는 액자가 있었다. 액자엔 산의 친부라고 추정되는 자와 산보다는 어려보이는 남자애가 있었다. 우영은 액자를 들어보았다. 산의 얼굴 위 유리를 매만졌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더니 우영은 뒤를 돌았다. 방문에 기댄 산이 팔짱 낀 채로 우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려놔."
"⋯미안."
"좆같게 하지 말고 나가."
산은 목소리를 억눌렀다. 우영이 액자를 내려놓고 어버버거렸다. 나는, 나는⋯. 이 말만 반복하며 주저했다. 산은 한숨을 쉬며 제 방문을 잠갔다. 산이 제 방을 잠군 것은 처음이었다. 힘들게 절뚝거리면서 우영에게 다가갔다. 그러므로 우영의 멱살을 잡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손아귀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가 풀리면서 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다 말해줬잖아."
"⋯."
"너 나 아니었으면 바로 죽었어."
눈치 없는 새끼, 내가 너 살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산의 말에 우영은 두 눈을 꿈뻑였다. 뭐라고? 우영의 반문하자 산은 우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우영은 벙쪘다. 산의 눈빛을 보니 아까 한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어보였다. 너 나 아니었으면 그 날 죽었다고, 안 들려? 말투에서 결백함이 묻어나왔다. 우영은 할 말이 없어졌다. 지금 그것도 모르고 한 순간의 분노로 인해 제가 사랑하는 이의 모든 것들 막았다. 우영은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우영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응? ⋯미안해, 산아. 산은 한숨을 쉬더니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문장을 꺼냈다. 우영은 산이 보이는 정면을 바라봤다.
"내가 미쳤지, 그 때 말을 들으면 안됐는데."
앞에 있는 산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산은 조용히 발악했다. 우영은 산에게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분노가 전혀 없는, 순수한 눈빛으로 산에게 용서를 구했다. 산의 자신의 다리를 한번,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산은 다시 우영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서 우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박았다. 우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산은 눈을 꾹 감고 눈물을 흘렸다. 그 장면은 매우 조악했다. 조악한 것들이 뒤엉켜 만들어낸 극락이었다. 그렇게 둘은 혀를 섞었다. 거친 소리들이 산의 방을 휘어 감았다. 깊은 숨을 내쉬며 둘은 떨어졌다. 한 뼘도 안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둘은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산은 자연스럽게 멱살을 풀었다. 그러고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입을 맞췄다. 서로를 침대로 이끌었다. 둘의 애증은 끝까지 조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