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할 수 없는 어떠한,
주
Trigger warning: 가정폭력 등 여러 종류의 폭력과 그로 인한 사망 언급 및 묘사
너는 언제부터 내 곁에 나를 위해 존재했을까. 구태여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시작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아주 오래 전임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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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했어요, 아빠. 죄송해요. 아, 악! 아빠!”
아마 제가 제일 먼저 하게 된 말은 엄마도, 아빠도, 밥도 아닌 잘못했어요, 일 것이라 산은 생각한다. 또래보다 말을 늦게 배운 탓에 산은 다섯 살이 넘어서야 입을 겨우 뗄 수 있었는데, 그 전부터 진즉 아버지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산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는 어머니 혼자 이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산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쯤 아버지의 손은 또한 산을 향하게 되었다. 덕분에 어렸던 산의 온몸에는 멍과 상처가 사라질 날이 없었고, 결국 사시사철 긴 옷을 입고 다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었고, 폭력에 익숙해졌을 때쯤 우영을 만나게 되었다. 초등학교 사 학년, 모두가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더위에 허덕일 무렵 우영은 산이 다니던 초등학교에 전학을 왔다. 얼굴은 깨끗했지만 우영 또한 산과 마찬가지로 긴 옷을 입고 있었다. 혼자 앉았던 산의 옆에 우영이 앉게 되었고 눈치가 빨랐던 산은 우영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영 또한 산의 반응에 숨겨진 뜻을 어렴풋이 눈치챘고, 동질감 아닌 동질감으로 둘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술을 자주 마시고 그때마다 우영과 우영의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했던 우영의 어머니를 피해 산의 집에 자주 갔던 우영은 그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임에도 아들의 친구라는 이유,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라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제가 숨을 수 있도록 받아준 산의 어머니에게 그 자신의 어머니에게서도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기억도 하지 못할 모성애를 느꼈다.
하지만 과도한 친절은 또한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산의 어머니는 미처 알지 못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우영을 도와준 친절. 물론 처음에야 그저 감사함 뿐이었겠지만 그 틈을 비집고 자라난 부채감은 어느새 아무도 모르는 새에 심연에 숨어 우영을 지배하고 있었다.
중학교 이 학년, 산이 울면서 우영의 집으로 찾아왔다. 절망으로 점철되어 일그러진 어린 날의 그 얼굴을 우영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와 우영을 위해 어머니는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고, 덕분에 우영은 자신을 찾아온 산을 받아줄 수 있었다.
“우영, 흑, 우영아... 나 어떡해?”
“왜 그래, 울지 말고 말해봐 산.”
“아빠가 엄마를 때렸, 는데, 엄마가 눈을 안 떠...... 나 어떡해 나...”
우영의 표정이 굳었다. 기계적으로 산을 품에 안으면서도 머릿속은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때렸다면, 단순히 때린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럼 얘는 어떻게 나온 거지?
“산, 나 봐봐. 너는 그럼 어떻게 나왔어?”
“도망쳤어. 너무 무서워서... 엄마 두고 나왔어, 우리 엄마 어떡해?”
말을 마친 산이 우영의 품에 안겨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최산, 괜찮아.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나한테 다 말해줘, 응? 우영은 그저 울고만 있는 산을 끌다시피 데려와 거실에 앉혔다. 산의 울음소리를 들은 우영의 아버지가 방에서 나와 산의 주변을 맴돈다.
“아빠, 산이 아주머니께서 눈을 못 뜨신대.”
“산이한테 무슨 일인지는 들었어?”
“아직, 너무 울어서 못 물어봤어.”
“산아, 아저씨야.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눈물 뚝 그치고. 다정한 목소리에 산이 내내 손바닥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우영의 아버지를 본다. 아저씨이.........
“아빠가, 흑, 엄마를 막 때리다, 칼로, 흐으...”
상황을 판단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영의 아버지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어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가정폭력 신고 때문에요, 애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렸는데 어머니가 눈을 못 뜬다고 하더라고요, 예. 여기 주소가.........
우영은 다시금 산을 품에 안았다. 산의 어머니가 제게 해준 것처럼, 그렇게. 그 상태로 등을 살살 토닥였다. 얼마나 있었을지, 밖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산이 울음을 그쳤다. 일어서 제 집으로 가려는 산의 허리를 붙들고 우영 또한 같이 걸었다.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산의 어머니와 그 뒤로 수갑을 찬 채 경찰에게 붙잡혀 나오는 산의 아버지가 보였다. 뒤따라 나온 우영의 아버지가 산을 경찰에게 인도했다.
여기까지가 그 날의 일이었다. 상처가 너무 깊었던 탓인지 산의 어머니는 결국 눈을 감고 말았고, 산의 아버지는 재판을 거쳐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이미 한 번 시설에 들어가 본 적 있던 산은 절대 시설에만은 가기 싫다 말했고 산의 친척들은 산이 그나마 심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우영의 집에 산을 떠맡기듯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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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시작은 의무감이었다. 어린 날의 저를 돌봐준 산의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산이 제일 처음 찾은 것이 바로 우영 자신이었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고등학교 일 학년, 산이 제게 좋아한다며 고백을 해왔을 때에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라 우영은 생각한다. 명백히 병든 관계였다. 일방적인 사랑과 일방적인 의무감. 사랑한다는 거짓으로 점철된 관계. 갑인 척 하면서도 철저히 을의 입장에 놓인 산이 병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영아,
“좋아해, 우영아. 좋아해... 사랑해. 너도 나 사랑하지, 응?”
하루아침에 자신을 지탱하던 것들을 모두 잃은 산의 새로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우영 하나뿐이었다. 아직 겪지 않아도 괜찮을 일을 너무 빨리 겪어버린 탓인지 산은 애정 결핍을 내비쳤고 우영에게서 자꾸만 사랑을 확인하려 했다. 우영은 그럴 때마다 네가 내게 느끼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그저 안정감에서 비롯된 어떠한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이라고, 산의 양 어깨를 붙든 채 눈을 맞추고 몇 번이고 일러주고 싶었지만 자신마저 산을 내치면 산이 어떻게 될지 눈에 선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또한 아직까지 자신을 짓누르는 부채감이 너무도 컸으니까.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우영이 산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닌 그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비롯한 의무감으로 자신의 행동을 받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쯤, 산은 우영에게 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러는 것은 산 자신의 아버지와 우영의 어머니가 했던 행동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산은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산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그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영을 상처 입혔다. 하도 물어뜯어 손가락 끝을 넘어본 적이 없는 손톱을 가지고 우영의 손등을 힘껏 긁어댔다. 짧고 뭉툭한 손톱이어도 고르지 못한 그 끝은 날카로웠다. 손톱이 지나간 대로 붉게 길이 났고 가끔은 살이 찢어져 피가 배어나오기도 했다. 우영은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해치는 산의 손을 마주잡아 깍지를 꼈을 뿐이다. 그 행동에 산의 마음이 몇 번이고 무너져 내리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산의 폭력은 점차 그 강도를 더해갔다. 처음에야 긁고 할퀴는 것이었으나 그 다음은 우영의 살갗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몇 번이고 제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우영은 기꺼이 제 온 몸을 산에게 내주었다. 덕분에 우영이 제 어머니와 같이 살 때와 다름없이 상처투성이의 몸을 가려야만 했다.
“우영아.”
“왜?”
“키스해줘.”
여름방학 어느 날 침대에 누워있는 산과 그 옆에 앉아 교과서를 보고 있던 우영이었다. 산은 다짜고짜 우영에게 입맞춤을 요구했고 우영은 당연히 거절했다. 산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입 맞추는 대신 한 손을 뻗어 산의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산의 마음은 우영과 같지 않았다. 곧바로 일어나 입술을 꾹 깨문 채 힘껏 우영의 왼뺨을 내리쳤다. 우영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도 잠시 우영의 고개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맞은 뺨을 만져볼 생각조차 없는 듯 올곧은 시선이 향한 곳은 산이었다. 산은 항상 우영에게 손찌검을 하고 나면 울먹이며 잘못을 고하곤 했다. 일말의 양심이었을까, 그들처럼 감정을 주체 못하는 자신에 대한 사과였을까. 어느 쪽이든 우영은 상관없었다. 자신의 역할은 산을 받아주는 것이지 산의 행동에 대해 따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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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른 무엇도 아니고 딱 애증이라고, 산은 생각했다. 우영이 제게 의무감만을 느낀다는 것은 진즉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그것으로 서운해 하기엔 이미 이렇게 지내온 시간이 너무도 길었고 우영의 마음을 돌리기에도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제가 어째서 폭력을 답습하고 있는 것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우영의 몸 어딘가에 저로 인한 상처가 생겨 있었다. 산은 그게 못 견딜 정도로 괴로워서 우영에게 울며 사과하곤 했다. 미안하다는 말끝에는 항상 내가 싫지? 라는 물음이 따라왔다. 이전의 우영이었다면 밉지 않다는 대답만이 나왔을 테지만 요즘의 우영은 사랑한다는 말까지 내뱉곤 했다. 그게 못내 서러워서 산은 더 크게 울었다, 마치 제 어머니가 죽었던 날 우영을 찾아가 대뜸 내뱉었던 울음처럼. 그러면 우영은 산을 깊게 끌어안았다. 그 품이 또 못 견디게 따뜻해서 산은 몇 번이고 무너져 내리는 제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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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까지 이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산은 자주 불안해했다. 제가 우영에게 하는 행동이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산 또한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우영이 곧 자신에게 질려 떠나버릴 것이라는 예상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고 혼자 버텨나가야 할 미래를, 우영이 없는 자신을 산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산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우영이 짊어진 부채감은 그 존재가 산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해서 산이 어떤 짓을 하던 우영이 먼저 산을 내칠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산의 유일한 세계가 우영인 만큼 우영의 유일한 세계 또한 산이었다. 이 비정상적인 관계는 우영을 지치게 만들긴커녕 오히려 우영 또한 산 없인 삶의 이유가 없도록 만들었다. 우영의 삶의 이유는 산이었다. 우영 자신이 여태껏 살아있는 이유, 또 살아가야 할 이유는 제게 이만큼의 부채감을 남겨준 그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예의인 산이었다.
이 끔찍하고도 기형적인 관계는 끊을 수 없는 어떠한 것. 어느 한 쪽이 먼저 손을 놓는다 해도 나머지 한 쪽이 다시 손을 잡으려 무엇이든 할 관계. 이 관계는 평생 지속될 것이다.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못하지만 이것만이 우영과 산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